[제주댁, 정지에書] (53) 송당리 이월선 어르신 이야기2

송당리 이월선 어르신(1938년생)은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서, 내 아이들이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며 한평생 살아오신 우리 옆집에 사실법한 평범한 어르신이다. 딸 없이 아들만 다섯을 낳으셨기에 집에는 남자들만 우글우글 했단다. ‘집안에 여자가 없어서 외로울 법도 하지 않았냐’고 여쭤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하루하루 먹고 살일, 아이들 키울 일로 치열하게 사셨단다.

“옛날엔 송당에 버스가 다니지 않았어. 우리 아저씨가 농협 비료일 한 몇 년 했었지. 농협에서 송당까지 직원들이 비료 태워주러 와. 그때는 지금처럼 농협 직원들 차가 어디 이서나서? 김녕농협에서 비료 가지고 송당 오면 그땐 버스도 식당도 없던 곳이 송당이었으니까. 우리 집에 오면 밥 행 주고 잠도 재우고 다음날 내려갔었지. 우리 막내아들 막 낳았을 그 해 기억이 나. 우린 중산간이라 해도 빨리 떨어지고 그럼 얼른 밭에 강(가서) 무영 나물이랑 베어 왕 씻엉 채수김치랑 밥 해서 먹이고 잠도 재웠지. 우리 아저씨 농협 일 그만 둔 해에야 송당에 하루에 한 번 교통(버스)이 들어왔었어.” 

손님이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다 해도 그 시절은 그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에 김치 하나만 잘 차려도 사람들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으셨던 어르신 댁에는 다행히 쌀이 부족한 전전긍긍했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다행히 어르신이 소위 말씀하시는 ‘먹을 일’ 걱정은 하지 않았었기에 불시에 손님이 와도 얼른 따뜻한 밥을 해 줄 수 있었다. 어르신이 내어 주시는 산디(밭벼)쌀 섞은 따뜻한 밥 한공기와 김치면 집에 찾아온 객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어르신의 삶의 행복은 그저 이런 것들이었다. 소소하게 내 손으로 밥 한 끼 차려줄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이월선 어르신의 삶의 전부를 묻자 바로 나온 대답은 바로 다섯 아들이었다.

“우리 아들들은 국민학교는 모두 다 송당 다녔지. 중학교는 세화중 다니고. 고등학교 가려고 하니까 시내로 가야 했어. 농고(지금의 제주고등학교)도 보내고 네 번째 아들은 사대부고 1회로 들어갔어. 애들끼리 제주시에서 자취해야하니까 돈을 부지런히 벌지 않으면 안됐어. 농사지어서 쌀 보내줘야 아이들이 밥 해먹고, 시내 가서 살 집 빌어주고, 밥 해먹젠 하니까 곤로 해주고. 지금에야 좋은 가스레인지 있었지만 우리 아이들 시내에서 학교 다니멍 밥 해먹젠 하면 곤로 해 줘야했지. 그땐 전기밥통도 없었을 때니까. 아이들 세 형제가 그렇게 시에 가서 자기네끼리 살았어. 족은 아들은 세화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금오공고 다니면서 육지 넘어 강 살고 고등학교 끝나고 군인 5년 하고 와서 혼자 시험 봐서 큰 전기회사 들어갔어. 그 아들의 아이가 벌써 고3이야. 다섯 아들 중 셋은 육지에 살고 둘은 제주에 살아. 그저 각자 인생 편안하게 살면 그게 내가 가장 편안한 거야.”

자녀들이 시내에서 자취했을 때 사용한 바가지를 아직도 어르신이 사용하고 계시다. / 사진=김진경
자녀들이 시내에서 자취했을 때 사용한 바가지를 아직도 어르신이 사용하고 계시다. / 사진=김진경

아들만 다섯이었던 어르신은 아들만 키우는 것이 많이 힘들 것이라고 주위에서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아이들이 모두 무난하고 착하게 잘 커주었다고 한다. 말도 잘 듣고 얌전하게 말썽 하나 부리지 않고 자라준 아들들이 어른들의 가장 큰 보물이라고. 어떻게 아이들이 다들 그렇게 잘 컸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어르신의 말씀 그대로 빌린다면 “자이네가 얌전하게 잘 큽디다게.”

이월선 어르신은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 뒷바라지를 위해 봄에는 농협에 돈을 빌려 쓰고 가을이 되면 농사지은 것들을 팔아 갚아가며 사는 삶을 살아오셨다. 

중산간에 자리 잡은 송당은 아무래도 생선을 먹을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생선을 구하기 위해서는 세화장까지 내려가서 사다 먹었다. 장날이 되면 아침 일찍 나서서 걸어서 내려가야 했다고. 그러다 6월이 되면 마을에 자리장수들이 많이 올라왔다. 지게에 고기를 가득 담은 구덕장수들이 마을로 올라오면 그 날은 아들들이 생선반찬을 먹는 날이었다. 김녕 사람들이 특히 송당으로 많이 올라왔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지게를 짊고 오는 생선장수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트럭장수들이 마을로 오기 시작했다. 트럭에 생선도 과일도 가지고 마을로 찾아왔다. 그런 트럭장수들도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없어졌다. 

“마을에 생선장수 와서 각재기(전갱이) 사면 그날 밥상에는 각재기국이 틀림없이 올라오지. 생선장수 오는 건 나보다 우리 아이들이 더 좋아해. 아들들이 각재기국 올라오면 그렇게 좋아했어. 멜장수 멜 팔러 오면 그걸로 멜젓 만들어서 반찬으로 일 년 내내 먹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차 있으니까 차로 장 보러 다녀와. 하지만 우리 같은 나이 든 사람들은 장보러 나가는 게 영 힘들어. 그래서 동네에 큰 슈퍼가 없어. 옛날엔 콩나물 같은 것도 팔았는데 지금은 콩나물도 구하기가 쉽지가 않아.”

송당에는 이월선 어르신처럼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많이 계시다. 그래서 아직도 직접 장을 담그는 집도 꽤 있다고 한다. 어르신 역시 콩은 직접 농사를 지으신 후 그 콩으로 장을 담그신다 하셨다. 제주사람들이 먹었던 콩은 그저 메주콩 또는 장콩이라고 불렀던 콩이었고 그 콩으로 메주도 띄우고 된장도 만드셨다. 소금물의 농도가 좋은 된장을 만들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인데 어르신은 바까스(바가지) 물 가득 하나면 소금은 솔박으로 두 관을 넣어 소금물을 만들어 장을 만들었다 하셨다. 올해는 이상하게시리 콩 농사가 잘 안된다고 장을 담글 만큼 나오지 않았다며 속상해 하셨다. 

올해 유독 콩농사가 잘 안된다며 속상해 하셨다. / 사진=김진경
올해 유독 콩농사가 잘 안된다며 속상해 하셨다. / 사진=김진경
올해 유독 콩농사가 잘 안된다며 속상해 하셨다. / 사진=김진경
올해 유독 콩농사가 잘 안된다며 속상해 하셨다. / 사진=김진경

나와의 인터뷰 전날, 어르신은 세화오일장을 다녀오셨다. 물건 구경도 하고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필요한 물건 사러 나오는 시장 나들이가 어르신의 낙 중 하나였다. 처음 만나는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곳도 시장이었다. 시장에 모인 어르신들이 주로 나누는 인사는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어르신의 대답이 재밌었다.

“우린 서로 나이 들어가니까 먹을 것만 맹심해진다며 나누는 게 인사야. 잘 먹어야 거시기 한다고 서로 고릅니다.”

2010년 무릎 수술하기 전까지 어르신은 매년 제사 여덟 개와 명절 한 개, 총 9번의 음식을 장만했었다고 한다. 제사도 그렇지만 특히 팔월멩질(추석)에는 소와 말에게 줄 촐을 베러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쁜데 명절준비까지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하셨다.

제사나 명절에는 반드시 메(밥)는 흰쌀로 정성으로 준비해 일순위로 마련했다. 어르신 댁에서 진설하는 음식은 콩나물, 고사리, 잡채, 소고기적, 돼지고기적, 생선(옥돔구이), 고사리전을 했다. 옛날엔 시리(설기)와 송편도 집에서 직접 했었는데 나중에 세화에 떡집이 생겨 맞춰오는 걸로 올렸다. 집에서 떡을 할 땐 절벤 솔벤 찍어서 올리고, 지름떡(기름떡)도 다 집에서 했다. 

“나 완전 옛날 오래전 기억에 흐린차조로 지름떡도 하고 감주도 해났지. 감주를 좀 더 폴폴하게 끓여 엿 만들면 차조로 만든 기름떡에 그 엿을 발라서 올렸어. 나중에야 송당에서도 찹쌀 나룩 막 많이 갈아날 때 찹쌀 지름떡 해난. 유채기름으로 지져서 옛날에는. 유채농사도 지으멍 사는데 보탰주게. 그 여름에 유채씨 공판하영 팔면서 돈 벌었지. 암튼 고기 안 넣은 엿 해서 그걸 단지에 담앙 고팡에 넣어뒀다가 식게때 멩질때 떡해서 해서 그거 볼라(발라). 그때 (찹쌀)나룩 나난 찹쌀로 하다가 그것도 없어지니까 이제 찹쌀 사다가 만든 게 지금 기름떡이라.”

남편분이 손님을 모시고 오거나 술이 필요할 때는 고소리를 사서 마련해 두었다. 동네에 고소리술 하시는 할머니들이 있어 그 술을 샀다. 술은 추니 단위로 구입했다. 추니는 제주에서 술을 담는 항아리를 세는 단위이다. 옛날에는 흐린조(흐린좁쌀, 차좁쌀)로 막걸리도 곧 잘 만들었다. 어르신은 밀이랑 보리농사도 지으셨는데 곡식을 갈고 남은 겨로 누룩도 만들어 술 만드는 데 사용하셨다고 한다. 산디(밭벼)랑 모물(메밀)도 가을들면 수확하여 도루미깡(드럼통)에 잘 보관했다가 일 년 먹을 식량과 자녀들 공부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때 사용한 도루미깡은 아직도 보관하고 계신다며 우리에게 어르신의 고팡을 보여줬었다. 예전에는 쇠막이었던 공간이 지금은 어르신의 보물창고로 남아 있었다.

어르신 댁 창고에 있는 보물들. / 사진=김진경
어르신 댁 창고에 있는 보물들. / 사진=김진경
어르신 댁 창고에 있는 보물들. / 사진=김진경
어르신 댁 창고에 있는 보물들. / 사진=김진경

이월선 어르신의 남편 분은 2005년도에 돌아가셨다. 갑자기 아프셨는데 어떻게 손을 쓰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이미 어렸을 때 죽음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경험했던 터라 남편분의 죽음은 말로 이룰 수 없이 슬펐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다. 남편과의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의 시기, 어르신이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아들들이었다. 남편과의 사별 후 밭농사는 대부분 남에게 빌려주었다. 그리고 때마침 무릎도 고장나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농사만 한평생 짓고 물허벅을 매일같이 지고 돌밭을 다녔던 어르신의 무릎은 고장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2010년에 결국 오른쪽 수술을 받으셨다. 재활 후 아들들의 만류에도 어르신이 다시 돌아간 곳은 밭이었다. 아니, 다시 돌아갈 곳은 농사를 하던 터전  뿐이었다. 그래도 소소하게 용돈 벌이를 할 수도 있고 농사는 거짓말을 안했다. 한 평생 해온 것이 농사와 밥 짓는 것이 전부였던 어르신에게 사별한 남편과 출가한 아들을 대신한 벗이자 가족이었다. 2020년에 왼쪽 무릎마저 수술하고 농사는 그만 두셔야 했다. 집 앞에 딸려 있는 조그만 우영팟 정도만 어르신 몫으로 남겨졌다.

이월선 어르신은 최근 공공근로를 시작하셨다. 일주일에 4번 정도 리사무실로 출근을 하신다. 사무실 청소 한 칸 마당 한 칸 청소, 2층 청년사무실 청소, 노인당 2층 운동기구들 중 한 부분을 맡아 청소하는 것이 어르신의 새 일이다. 무릎 수술 후 잘 걷지 못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가 그렇게 또래들과 오전에 만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활력소였다. 아침 7시에 가서 11시에 돌아오는 일정을 보내면 하루가 금방 가신다 했다. 

수술을 하신 이후에 많이 걷지는 못하시고 구루마에 몸을 보태어 천천히 걸으시는데 다리보다는 허리가 아파서 오래는 걷지 못한다고 하셨다. 구루마를 밀면서 가면 몇 번씩 쉬면서 조금씩 욕심내지 않고 걷다보면 그래도 꽤 걸을 수는 있다. 아마도 젊었을 때 일만 죽기 살기로 하면서 살아온 것이 몸에 배어서 그렇게 걷나 싶다 하신단다.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격동의 세월을 사시면서 그래도 중국과 동경도 다녀와 보셨단다. 환갑에는 설악산도 다녀왔는데 공무원 호텔에서 잠도 자보았다며 자랑하시는 어르신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르신의 부모님 세대는 꿈도 못 꿨을 일인데 그래도 어르신은 운도 좋아서 이런 여행도 다녀볼 수 있다고 하셨다.

송당에 외지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입도민들이 감귤농사를 하겠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송당은 감귤을 아무도 안하는데 왜 서울사람들이 와서 감귤 농장을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고 한다. 우리 마을 땅은 다른 동네와 달라서 감귤농사도 잘 안되고 설령 된다고 해도 맛이 없다고, 우리 동네는 메밀, 산디, 콩이 잘 되는 동네라고 알려줘도 감귤농사를 시작하고는 몇 년 후에는 다들 치웠다고. 지금은 그렇게 마을에 남겨진 어른들과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같이 살지만 예전처럼 마을사람 모두 다 소식을 물으며 사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어르신의 세월 속 제주는 너무 빠르고 눈 뜨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고 하셨다.

나는 이월선 어르신에게 언제가 가장 행복하시느냐고 여쭤보았다.

“나는 제국주의도 보고 4.3에 6.25도 겪었어. 먹고 사는 것도 힘들고. 아이들 키우면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산거는 하나도 후회가 안돼. 그런데 행복한 때라면 혼자 사는 게 지금이 가장 행복해. 나한테도 일 하지 않아도 되고 먹을 걱정, 키울 걱정 하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있긴 있구나 싶어. 지금은 누가 나한테 군소리를 할까. 지금이 오히려 너무 행복해.”

말 백 마리에 소에 가족들이 왁자지껄 함께 모여 살았던 송당의 집에는 어르신 혼자 살고 계시다. 어떤 음식이 생각나냐고 물었더니 모물카루(메밀가루)로 만든 조배기를 말씀하셨다. 내가 메밀조배기 만드는 방법을 말하니 ‘어떻게 아냐’는 표정으로 기특하게 쳐다보셨다. 서울에 사는 며느리에게 아기 출산하고 메밀조배기 만들어 줬었는데 서울 며느리라 익숙한 음식이 아닌 지 낯설어 했다. 우리 제주사람에게는 익숙하고 중요한 음식인데 올해는 그 메밀도 너무 늦게 밭을 갈아서 그런지 비료를 써서 농사를 지었는데도 잘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송당에서도 메밀 가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다고.

나는 어르신에게 올 해가 지나가기 전 꼭 다시 찾아오겠다며 그때 함께 모물카루 조배기 만들어 먹자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르신이 이제껏 본 얼굴 중 가장 환한 얼굴로 웃으시며 그럼 메밀가루는 본인이 장만하시겠다고 했다. 내가 준비해서 오겠다고 하니 한사코 말리셨다. 어르신과의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저 정말 와요. 진짜에요”라고 말 하며 집을 나서는데 어르신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짧은 인터뷰를 나눈 사이 사십년이 넘는 우리의 사이에는 그 사이 하나의 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오는 차에서 곧 다시 송당에 오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하루가 너무 바빴어. 물길어오고 밥하고 농사짓고… 매일매일 한 번도 쉬지 않고 농사를 지었지. 이렇게 힘든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어.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 나는 괜찮아" - 이월선 어르신의 인터뷰중에 /&nbsp;ⓒ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나는 하루가 너무 바빴어. 물길어오고 밥하고 농사짓고… 매일매일 한 번도 쉬지 않고 농사를 지었지. 이렇게 힘든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어.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 나는 괜찮아" - 이월선 어르신의 인터뷰중에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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