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302) 없다고 기죽지 말라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 편집자 글


* 엇노랭 : 가진 게 없다고, 가난하다고

인생, 빈부라는 것, 생각하기에 달린 것 아닐까. / 사진=픽사베이<br>
인생, 빈부라는 것, 생각하기에 달린 것 아닐까. / 사진=픽사베이

근본이 가난해 가진 게 없다고 남에게 기죽을 필요가 무엇이겠느냐 함이다. 하지만 실제는 빈부의 차이가 사람 사이를 갈라치기 하기 일쑤다. 더욱이 가난을 대대로 물려받아 온 처지이고 보면 의당 기죽게 마련인 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배고파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형편에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기백을 갖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조선 시대의 선비(청백리나 산림처사)들이 ‘쓴나물 데운 물이 고기보다 맛이 있네. 초가집 좁은 것이 더욱이 내 분수라’ 한 옛 시구가 있으나, 그건 선비가 지녔던 높은 품격에서 나온 달관의 생활일지언정 범상한 사람으로서는 가능한 삶이 아니었다.

삼시 세끼 때우기에 전전긍긍하던 서민의 삶은 평생을 굶주림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비록 가진 것은 개뿔 없지만, 용기마저 잃어버린다면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고루거각에 비단옷 입고 호사하는 허황한 꿈을 꾸라는 말이 아니다. 

비록 겉으로라도 힘을 잃지 말고 꼿꼿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게 아니냐는 이야기다. 가난이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잘못 없이 깨끗하게 살아가는 떳떳한 인생 또한 가치 있는 삶이 아니겠느냐 함이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는 무언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혹 가난이 삶을 힘들고 괴롭게 하더라도 힘껏 일한다면 언제가 신수가 펴질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일지도 모른다. ‘쥐구멍도 볕들 날 있다’든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다’고 하지 않나.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 함이다.

‘엇노랭 기죽지 말라’

뒤집어 말하면, ‘싯노랭 치세허지 말라(있노라 공치사하지 말라)’이다. 

두 말을 묶어 ‘싯노랭 치세허지 말곡, 엇노래 기죽지 말라’다. 인생, 빈부라는 것, 생각하기에 달린 것 아닐까.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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