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4) 남원읍 의귀리 김현순 어르신 이야기

“왜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는데 우리집 어른들은 나를 ‘행아’라고 불렀어. 고모부가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들었는데 우리집을 행아네 집이라고 하셨지.”

남원읍 의귀리에 살고 계신 김현순 어르신(1949년생)의 집을 방문한 날, 알려준 주소를 따라 올레길 안으로 들어가니 끝자락에 동화 속에 나올법한 집이 펼쳐졌다. 동백낭(나무)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에 목조로 지은 집이 두 채 있었고 너른 마당 한 켠에는 장독대들이 나란히 모여 있었다. 보통 이제껏 내가 만난 어르신들의 장독은 한 개 혹은 많아봤자 세 개 정도인데 어르신댁의 장독대는 개수가 꽤 많아 보였다. 나는 대부분 빈 장독이겠거니 생각하며 다가갔는데 가까이 가 보니 구수한 장 냄새가 장독 밖으로 코를 간지럽혔다. 눈으로 보니 꽤 많은 항아리에 장들이 가득 차 있었다.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 자택에 보관돼 있는 장독대.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 자택에 보관돼 있는 장독대.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 자택에 보관돼 있는 장독대. / 사진=김진경

“우리 집 장맛이 좋다고 어떻게 소문이 났나 봐. 한두명 장 퍼주게 된 것이 아예 우리집 장 담그는 날에 같이 와서 만들고 싶다 하는 사람들이 생겼어. ‘그래라’ 한 것이 연례행사처럼 지인들과 함께 집에서 장을 담그게 됐어. 이건 우리집 장독, 이건 저쪽 서쪽에 사는 분이 담근 장독이야. 서쪽에 살면서도 꼭 우리집에서 장을 해야 맛있다고 장 뜨러 와.” 

자고로 장맛이 좋은 집은 그 이유가 있다고 했다. 74세라고 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김현순 어르신은 너무 고우셨고 멋드러진 갈옷을 입고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정갈하게 깎아주신 과일과 차는 아주 오래전부터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분처럼 보였다. 집 안 여기저기 어르신이 직접 수놓은 규방공예나 자수들은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마주한 어르신과 어르신 집만 봐서는 이제껏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사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집에 집집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집에 사시는 어르신은 제주의 타샤 튜더(Tasha Tudor, 미국의 동화작가) 같았다. 지금도 현역에서 자기 일을 하고 계신 굉장히 멋진 커리어우먼 같아 보였다.

김현순 어르신이 손재주가 느껴진다.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이 손재주가 느껴진다. / 사진=김진경
정성이 느껴지는 다과. / 사진=김진경
정성이 느껴지는 다과. / 사진=김진경
고운 갈옷을 입은 김현순 어르신. / 사진=김진경
고운 갈옷을 입은 김현순 어르신. / 사진=김진경

4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난 어르신은 남원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중학교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읍내에서 점빵을 크게 하셨단다. 사람들은 그 점빵을 남원백화점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작은 점빵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신발에서 옷, 잡화, 식료품은 물론 나중에 남창건재라는 이름으로 확장하며 철물까지 사업을 확장하시기도 했다. 어르신 기억에 친정어머니는 부산에 물건을 하러 자주 올라 가셨는데 보통 2박3일 일정으로 집을 떠나면 제주항에서 배를 타고 다녀오셨다. 때때로 일본 출장도 다녀오시곤 했다. 

그런 덕에 어르신의 기억 속 친구들은 한복에 치마저고리를 입었지만 본인은 골덴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는 장녀인 김현순 어르신을  많이 아꼈다. 남들보다 이른 7살에 학교를 들어간 어르신 기억에 갑자기 날이 추워졌는데 아버지가 허둥지둥 학교로 찾아와 어르신에게 내의를 입히러 왔던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또 옛 기억에 서울에서 공부하는 의대생이 남원으로 피난을 왔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학생들한테 주사 놓는 법을 배웠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르신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으며 많이 아팠을 때 아버지가 약병을 구해 와 주사를 직접 놔주셔서 구사일생으로 산적도 있었다고 했다. 물론 다른 동생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었지만 유독 큰 딸이었던 어르신에게 쏟는 애정과 사랑은 각별하셨다.

그런 따뜻하고 다정했던 아버지는 어르신이 아홉 살이 되던 해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르신은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세상에 없다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리고 작았다. 그만큼 누구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던 김현순 어르신은 아버지와의 이른 이별이 너무나 크나큰 슬픔이었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몫까지 더해 가장의 짐을 짊어지게 된 친정어머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바쁘시기 때문에 어르신의 기억에는 어머니가 해주는 밥은 거의 먹어본 적 없다고 하셨다. 일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야 했기 때문에 밥을 해주시는 분이 따로 계셨고 작은 이모가 와서 동생들을 봐주셨다. 아버지의 부재와 워킹맘인 어머니 아래 자랐지만 어르신을 비롯한 동생들 모두 불평불만 하지 않았단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도 했고 가풍 자체도 어렸을 때부터 누구도 불평불만 하며 자랐던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어르신은 남원중학교까지 다니고 신성여고에 진학하기 위해 동생들과 제주시로 유학을 갔다. 그 당시 제주에 정구부가 애월상고와 제주여고, 신성여고 이렇게 세 학교에 있었는데 어르신은 도 대표선수로 발탁될 정도로 운동 신경이 좋았다. 운동을 끝까지 할 줄 알았지만 원하는 대로 삶은 흘러가지 않았단다. 숙명여자대학교 가정학과를 갈 것인지 체육학과를 갈 것인지 고민까지 했지만 제주에 홀로 계신 어머니 때문에 결국 서울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포기했다.

제주시로 들어오게 되면서 생전 밥 한번 해보지 않았던 어르신도 밥을 짓기 시작하셨단다. 오현중학교에 다녔던 동생의 도시락을 챙기는 것은 어르신의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친정어머니께서 밥해 먹을 돈과 쌀은 넉넉하게 주셨던 터라 도시락 반찬은 동생이 좋아하는 멸치볶음을 원없이 싸줄 수 있을 정도였다. 된장은 남원에서 늘 어머니가 보내주셨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동생에게 해줬던 반찬 중 가장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 여쭸더니 ‘옛날 돈가스’라는 음식이었는데 고기를 다진 후 뭉쳐 삶은 달걀 겉에 싸서 익힌 음식이 가장 생각난다 하셨다. 어르신 젊었을 때 이 음식은 최고의 날 먹는 음식이라고 하셨다. 아마 최근까지 제주 잔칫날 신부상에 등장했던 계란 돈가스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49년생이신 어르신이 중학교 3학년 때 제주에도 곤로가 등장했다. 곤로의 등장은 획기적이었다고 한다. 밥을 하는 것도, 음식을 만드는 것도 옛날 부엌보다 훨씬 수월했다. 

김현순 어르신의 결혼식 사진.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의 결혼식 사진. / 사진=김진경

시내에서 어르신의 방과 후 일과는 동문시장에서 장을 보고 도시락 반찬을 만들고 주전부리로 곤로 위에서 고구마를 삶으면서 동생들의 밥을 챙기는 것이었다. 그 당시 기억에 동문시장은 지금처럼 시멘트 바닥으로 깔끔하게 구획 정리가 된 시장은 아니었고 바닥은 흙바닥이었고 시장을 가로지르는 물이 졸졸졸 흐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바로 상인들은 좌판을 깔았다. 어르신 기억에 정육점도 어물전도 옛날 모습이 더 정겨웠다. 남원에 있을 때는 밥 한번 한 적 없었던 어르신이 제주시에 들어오게 되면서 밥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어르신은 불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맏이로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교 졸업 후 더 넓은 세상으로 가기 전 동생들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께 집으로 잠깐 와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집에 가보니 어머니가 울면서 어르신에게 말씀하셨다. 남원읍에 있는 막냇동생이 아직 어리니 현숙이 네가 남원으로 들어와 막내를 봐주면서 가게 점원일도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진학하고 싶었고 동생들과 함께 제주시에 있는 지금의 생활도 너무 좋았는데 다시 시골로 돌아가는 것이 십대인 그 시절 어찌나 서럽게 들렸는지 모르겠단다. 하지만 아버지 없이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르신은 그렇게 다시 남원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20대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막냇동생을 돌봐주면서 엄마의 일에 손을 보탰다. 어느 날 남원초에 노총각 한명이 전근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그 노총각 선생은 어르신이 일하는 곳에 연신 기웃거리며 어르신에게 관심을 보냈단다. 어르신은 그런 노총각의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스물 두 살이 되던 해, 어르신은 스물 아홉 남편과 결혼을 한다. 어렸을 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오랜 부재에 대한 그리움이 교사였던 남편을 통해 위로받았던 어르신에 비해, 되레 남동생들은 ‘하나밖에 없는 우리 누나가 깡촌 위미로 시집을 간다’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어르신이 시집을 간 그 해는 마을에 공동수도가 들어온 해이기도 해서 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하셨다. 물론 공동수도가 들어오고 바로 마을에 물이 콸콸 잘 나왔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성판악에서부터 시작된 흙탕물이 내려오기도 했기에 여전히 냇가에 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을 반복했어야 했다고 했다. 여러모로 1970년은 어르신에게 잊지 못할 해라고 하셨다.

결혼 후 바로 첫 애를 임신하고는 입덧으로 무척 고생하셨다.

“나 입덧할 때 나스미깡으로 배 채웠다고 할 정도로 나스미깡 아니었으면 못 견뎠을 거라. 새콤하게 무친것만 생각나고 자리테우에 내려가서 자리 해 왕 자리회 먹으면 속이 시원해져서 살 것 같았어. 나 입덧에는 나스미깡과 자리회가 최고였지.” 

문득 나도 첫 애를 임신했을 때 입덧으로 무척 고생했을 때가 생각났다. 어르신과 비슷한 계절에 입덧을 겪었던 것 같다. 더운 여름 친정엄마가 해 주신 마농지로 겨우 까끌까끌한 입을 적시며 입덧을 버텨냈던 기억이 문득 들었다.

꿈 많고 운동도 곧잘 했던 소녀 김현순은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이제껏 해오지 않았던 또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농사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어르신은 시어머니를 따라 밭농사를 하게 되었고 자식들 학비를 보태기 위해 감귤농사도 시작하게 된다. 장 한번 담가보지 않았던 어르신은 매년 장을 담그고 미국에 있는 딸도, 제주에 있는 손녀들도 할머니의 된장만 찾는다. 장맛이 단 집에 복이 많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어르신의 중년 이후의 삶 속에 어떤 행복을 꾸리며 사시는 지 궁금해졌다.

풋감을 이용해 감물을 들이고 정성스레 지어 입은 어르신의 갈옷은 우아한 미소와 찰떡이었습니다. 자연에게서 얻은 감사한 것들을 설명해 주시던 단단한 미소를 그리고 싶었습니다.&nbsp;/&nbsp;ⓒ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풋감을 이용해 감물을 들이고 정성스레 지어 입은 어르신의 갈옷은 우아한 미소와 찰떡이었습니다. 자연에게서 얻은 감사한 것들을 설명해 주시던 단단한 미소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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