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5) 보안사 고문에 어깨 인대 끊기고 무릎뼈 부서져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
“너 하나 죽이는 건 파리 죽이는 거보다 더 쉽고, 쥐도 새도 모른다. 바른대로 얘기하라. 이북에 몇 번 건너갔다 왔냐?”
군사 독재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던 시절, 군 조직인 보안사령부가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악명높은 보안사는 제주도에도 민간 기업 형태를 띤 ‘한라기업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한라기업사는 보안사의 제주지부다. 당시 도민사회에는 사라봉 근처 ‘한라기업사에 다녀오면 반병신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 다녀온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내게 뭔 죄가 있다고 이렇게 반병신을 만듭니까? 이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부분이죠. 좌우지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문초당하고 죽어가는 일은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있어서 안 될 일이라고 보고, 앞으로는 나 같은 억울한 사람이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양의남 씨 인터뷰 중)
제주공항 확장 과정에서 강제 수용돼 사라진 마을 ‘몰레물’에 살던 양의남(80) 씨는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다. 마을이 공항 부지로 편입되자 새마을지도자를 맡았던 양씨는 새로운 마을(현 신성마을)을 만들기 위해 알아보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한라기업사 직원에게 끌려갔다.
# 서경윤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 지하실로 끌려가
사라봉 근처에 있는 한라기업사 지하실로 끌려간 양씨는 다짜고짜 “서경윤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시 서경윤은 간첩으로 몰려 재판을 받은 뒤 옥살이를 하고 있어 소문이 퍼진데다 같은 동네 출신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서경윤 역시 1984년 10월 13일 ‘6개망(網) 간첩단’ 조작 사건에 휘말린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다. 일본에서 조총련 공작지도원의 지령을 받고 귀국한 뒤 진해 해군기지 주요시설, 함정 동향, 김해공항 사정 등 각종 군사정보를 수집, 보고한 혐의를 뒤집어썼다.
독재정권은 서경윤을 포함해 서로 연관이 없는 6명을 간첩으로 만들어 한데 묶은 뒤 ‘6개 망 간첩단’이라며 사건을 키웠다. 당시 서경윤은 고문을 받은 뒤 “일본에서 고문을 받은 끝에 조총련 간부인 고모에게 포섭돼 귀국 후 간첩 활동을 했다”고 허위로 자백해 징역을 살았다.
서경윤이 포함된 6개망 간첩단 사건은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서경윤은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된 뒤 2013년 11월 28일 재심에서 ‘조작’임이 밝혀져 무죄를 선고받았다.
# “북한에 몇 번 다녀왔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양씨는 “서경윤을 알고 있다”고 답했고, 보안사 직원은 ‘몇 번 만났냐’가 아니라 “그와 함께 이북에 몇 번 건너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서경윤을 안다고 한 순간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양씨는 4H회장, 청년회장, 새마을지도자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 마을을 위해 일했다. 서경윤을 만난 건 “부모님 모시면서 고생하고 있다. 일본에 와서 구경하고 가라”는 친형님의 초청을 받아 여행차 간 일본에서였다.
당시 양씨는 귀국할 때 “아내에게 돈을 좀 가져다 달라”는 서경윤의 부탁을 받고 단순히 돈만 전달했다. 보안사는 이점을 노려 공작금을 전달하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자백할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북한에 다녀온 적이 없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날아든 건 매질이었다. 닥치는 대로 두들기니 몸은 성치 않았다. 꼬박 2박 3일 동안 맞으니 온몸은 피로 물들고 헐어버렸고, 입고 있던 옷과 상처가 달라붙어 옷을 벗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양씨는 가지도 않은 북한에 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서경윤의 고모를 만나본 적도 없었기에 계속되는 고문에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다 “서경윤에게 뭘 받았느냐”는 질문이 나왔고, 문득 서씨 아내에게 돈을 전해준 사실이 기억난 양씨는 그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보안사 직원들은 상부에 “이제야 불었다”고 보고했고, 상부에서는 “많이 다쳤으면 치료를 해서 보내라”고 답했다. 양씨는 한 시라도 한라기업사에 있기 싫었기에 치료는 알아서 할테니 내보내만 달라고 했다.
# 계속된 폭행 고문에 남은 건 ‘평생 후유증’
직원들이 돌아가며 고문을 가할 정도로 쉴새 없이 폭행당한 양씨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왼쪽 어깨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어깨 인대 대부분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받았지만 온전치 못한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무릎 관절이 손상, 쓸 수 없게 된 탓에 인조 관절을 심어야만 했다. 고문을 받고 바닥에 나뒹굴 때 끝까지 따라와 폭행한 보안사 직원에 의해 관절과 무릎뼈가 손상된 것이다. 당시 양씨는 걷다가 무릎뼈가 이탈, 손으로 집어넣어야만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양씨는 “수십 대 수준이 아니라 수백 대를 맞았다. 어쩔 땐 까무러쳐서 깨나지 못하면 물을 퍼부어 깨웠다. 일어나보면 옷이 다 젖어있었다”며 “대여섯 명이 교대로 때릴 정도로 호된 고문을 받았다. 당시 한라기업사를 다녀오면 반병신 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내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 당시에는 죄 없는 사람들도 무지하게 고문당하지 않았나. 정부 시책이라고 보려고 해도 너무 억울하다”며 “간첩 누명이라고는 아무 건수가 없는 사람인데 단지 일본에 있는 형님들의 초청으로 여행 갔다 왔다고 누명을 썼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또 동생뻘 되는 서경윤으로부터 부인에게 돈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이라며 “솔직히 말해 그런 부탁을 받으면 누구라도 전해주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내게 뭔 죄가 있다고 이렇게 반병신을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한편, 당시 서경윤과 같은 동네 출신인 양씨를 포함해 김주섭, 김치병, 김기선 등이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정작 서경윤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우리는 피해만 입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故 김주섭은 보디빌딩 제주도 메달리스트일 정도로 건강했지만,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정신적 후유증으로 매일같이 술을 마시다가 4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위암과 간암으로 사망했다.
김치병(73) 씨 역시 “각본을 그대로 받아쓰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온갖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각본대로 진술한 다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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