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합장묘, 위령제 및 묘비제막식

▲ 추념하는 유족들.ⓒ제주의 소리

유난히 매섭고 시렸던 무자.기축년 그 겨울 곰도 범도 무서워 잔뜩 웅크려 지내면서도 따뜻한 봄날이 오려니 했더이다. 아, 그랬는데…….
거동 불편한 하르방 할망, 꽃다운 젊은이들 이름조차 호적부에 올리지 못한 물애기까지 악독한 총칼 앞에 원통하게 스러져 갔나이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간다는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월이여! ‘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 삼아 버틴 세월이여!
앙상한 어웍밭 방엣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손 돋지 않던가요. 참혹한 시절일랑 제발 다시 오지 말라 빌고 빌며 뒤틀린 모진 역사 부채로 물려줄 수는 없다며 봉분 다지고 잔디 입혀 해원의 빗돌 세우나니.
여기 발걸음한 이들이여! 잠시 옷깃을 여미머 한 가닥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 보듬고 가신다면 헛된 죽음 아니라 부활하는 새 생명이겠나이다.
                           -  현의합장묘 비문에서(시인 강덕환)

10월 억새가 흐드러지게 핀 중산간. 4.3의 아픔, 고통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바람결에 흩날리며 현의합장묘 주변에서 춤을 춘다. 아마 그 당시에도 억새는 변함없었을 것이다.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힌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가 새로 단장된 지 1년이 넘은 7일 영령위령제와 묘비제막식이 열렸다.

▲ 현의합장묘 제막식.ⓒ제주의 소리
의귀초등학교에 수용 중이던 의귀.수망.한남리 주민 80여명은 4.3 당시 무장대와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49년 1월12일 젓먹이 어린애부터 60대 노인까지 군경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집단 학살당했었다.

학살당한 주민들은 의귀리 개탄물 동쪽 세 개의 구덩이에 매장당했고, 그후 반세기가 훨씬 넘은 작년 9월16일 파묘해 20일 남원읍 수망리 893번지에 현의합장묘 위령공원에 안장됐다.

▲ 현의합장묘 내력비 제막식.ⓒ제주의 소리
현의합장묘 4.3유족회(회장 양봉천)의 주관으로 열린 이날 오전 10시에 위령제와 묘비제막식에는 김태환 지사, 양성언 교육감, 강기권 남군수, 제주4.3사건희생자유족회, 4.3연구소 및 유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현의합장묘는

4.3 당시 군경 토벌대가 의귀.수망.한남리 중간간 지역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학살을 서슴지 않는 등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자 마을 주민들은 산이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당시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는 수색중 발견되는 사람들을 학교안에 임시로 수용했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과 학살을 일삼았다.

이에 무장대는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년 12일 의귀국민학교를 습격했지만 실패하고, 이 사건을 빌미로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명을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인들이 학살했다.

양봉천 회장은 주제사에서 “작년 9월16일 이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옛무덤을 파묘하면서 ‘의로운 넋’ 39구의 겹겹이 뒤엉켜 쌓인 유골영령들을 만나면서 억울하게 세상과 하직하고 저승길도 못 걸은 채로 가신 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겨졌다”며 “이제 저희 유족들은 이곳 현의합장공원이 제주도 남부지역의 4.3 구심공간으로서,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추도사에 나선 김태환 지사는 “지난해 우리 손으로 영령들을 화장하고 양지바른 이곳에 모실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앞으로 4.3의 보다 완전한 해결을 위해 국가추념일 지정, 4.3평화공원을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곳으로 조성하고 유물과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민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 깔끔히 단장된 현의합장묘.ⓒ제주의 소리
4.3 관련 행사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 양성언 교육감도 “영령들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죄는 용서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다시는 이 땅에 그 어떠한 희생도 없는 곳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주제사와 추도사가 마무리된 후 묘비와 현의합장묘 내력비 제막식, 그리고 유족들과 기관단체장들의 추념식으로 정리됐다.

▲ 내력비를 보고 있는 김태환 지사.ⓒ제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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