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의 교육春秋] (34) 시험능력주의와 보살핌의 가치

언젠가 우연히 <지식채널 e>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제주도 해녀할머니들이 나와요. 이제 해녀아가씨라는 말은 성립이 안돼요. 일은 고되고 벌이는 적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해녀를 안 한대요. 그래서 사십 대도 거의 없고, 육칠십 대, 심지어 팔십 대까지 있어요. 인터뷰어가 그중 연세가 많아 보이는 팔십 대 할머니에게 물어요.
“할머니,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훨씬 편하시잖아요?”
“그럼 편하지, 혼자서 100명 몫은 하지.”
“그런데 왜 안 쓰세요? 힘드신데.”
그러니까 할머니가 대답하길 “내가 그걸 쓰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김규항·지승호, 알마, 2010, p.220~221.

99명의 다른 해녀들을 걱정하는 해녀할머니의 대답은 묘한 감동과 함께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유화와 세계화의 가치로 무한 확장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능력’이 있다면 부를 축적하는 것은 칭송받아 마땅한 세상이다. 나머지 99명의 삶에 대한 ‘걱정’보다 자유주의 시장 경제에 반하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이 결과적으로 약탈일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 말이다. 

코인이나 주식에 투자하던지, 부동산에 영끌을 하던지 각종 최신 정보를 조합해 투자하고 자산을 늘리는 것이 지상최대 과제인 시대에, 자산을 늘릴 방법을 알려주는 유료 채널들에 수많은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투자의 손실은 막고 수익은 극대화하기 위함일 것이다. 전기자동차나 풍력발전, 게임개발, 아파트건설계획, 탄소배출, 정부의 정책 방향 등이 투자를 결정하기 위한 소중한 정보로 활용된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시장정보나 개발정보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는 이들에게 해당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었다는 것은 시험지 사전유출만큼 끔찍한 사고다. 잘나가던 정치인이 낙마하거나 정권의 방향을 뒤흔들게 되는 사고들은 이러한 ‘공정함’이 훼손되었을 때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공정함의 심판관으로 검경과 언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규칙만 공정하다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지상과제인 시대에 ‘99명에 대한 염려’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해녀할머니의 99명에 대한 걱정 역시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해녀할머니는 함께 물질을 하는 이들이 어느 집에 살고 있는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시기인지, 얼마 전 아들이 사기를 당해 밭을 팔았는지, 아픈 곳은 어디인지. 그들은 서로의 삶을 너무나 세세히 알고 있는 동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위험하고 힘든 물질에서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이웃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해녀할머니의 비현실적인 말이 해녀할머니의 삶으로 들어가면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인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금까지 죽은 바다에서 물질을 해온 피해 당사자들을 공사 방해의 가해자로 탈바꿈하는 일을 멈추고, 해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독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경쟁의 이면에는 살아남아야만 된다는 절박함이 깔려있다. 2000년대 들어와 한국사회가 자산 투자에 모든 것을 걸게 된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은 높아지고, 국가나 사회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에 조기 퇴직과 수명연장이라는 생물학적 불안감까지 더해져 삶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 되는 사회는 어딘가 잘못된 사회다. 게임의 규칙이 공정한지 심판을 잘 보고 있을 테니 각자 알아서 살 궁리를 하라는 것이 정말 공정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나서서 미래의 불안함을 해소하도록 정책을 마련하고 보살핌을 강화하는 것이 공정할까? 공정한 시험이 아니라 공정한 삶이 필요하다. 그 자리에 국가와 정치가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사라진다면 교실이나 학교의 풍경도 바뀌지 않을까. 아이들을 통제하는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온 알피 콘이 《경쟁에 반대한다》에서 언급한 어느 미국인 교사의 얘기는 행복한 학교로 가는 방향을 알려준다. 그(미국인 교사)는 아이들에게 누가 가장 영리하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 아이들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중략)” 

그 학교엔 낙제, 등수, 그리고 우등생 도장도 없었으며, 아이들이 쓴 글이나 그림은 모두 평등하게 벽에 전시되어 있었다. 누구에게 진다거나, 남들보다 무엇인가를 꼭 잘 해야 된다거나, 매주 반복되는 등급별 받아쓰기 시험 같은 것은 그곳에 없었다. 알피 콘은 학교와 교사가 바뀌면 ‘경쟁’의 공간에서 ‘협력’의 학교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교육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길 원한다면 우리 사회가 미래의 불안함에 대한 보험이 되어주는 제도 마련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책의 부제처럼 “우리는 이기는 일에 삶을 낭비하지 않을 수”있다.

끝으로 최근 월정리 해녀분들이 하수처리장 증설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보탠다. 월정리 해녀분들은 누구보다 바다를 지키고 싶어하는 분들일텐데 넘쳐나는 하수를 처리하기 위한 시설 증설에는 반대하고 있다. 행정과 해녀, 양쪽 다 바다를 지키기 위해 서로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공사를 강행하는 쪽은 법적 절차를 다 밟았으니 문제없다고 하지만 해녀분들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 

짐작컨대 문제를 바라보는 해녀와 행정 사이의 견해차는 형식적 공정과 실질적 공정 사이의 거리만큼 큰 것으로 보인다. 해녀분들의 언론 인터뷰 내용들을 살펴보면, 월정에서 하수 처리를 둘러싼 행정이 해녀분들에게 보여준 불신의 세월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죽은 바다에서 물질을 해온 피해 당사자들을 공사 방해의 가해자로 탈바꿈하는 일을 멈추고, 해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독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신뢰가 없는 말은 공허하다.


#안재홍

안재홍은 간디학교를 비롯한 대안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제주에서 탈학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잠시 운영하기도 했다.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을 학교 밖에서 학교 내로 옮겨와 다양성이 존중받고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교육이 자리잡길 바라고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라도 시작해보자는 고민으로 2016년 10월 애월교육협동조합 이음을 설립해 애월지역 마을교육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두 딸의 삶을 앗아가지 않게 하려면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며 환경과 평화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20년부터 애월중학교에서 기후위기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귤 농사지으며 휴학 중이다. 제주의소리 '교육春秋' 칼럼을 통해 독자들과 격주로 만난다. KBS제주 TV 시사프로 '집중진단' 진행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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