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나들이에 나선 위안부 할머니들 "다른 아픔도 보기위해 제주에 왔어"

"지금의 젊은이들은 알아야 해. 나라가 힘이 없어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힘을 키워야 나라가 힘이 강해지는 거야!"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제5회 인권캠프에 참여해 7일 제주를 찾은 윤순만 할머니가 한 얘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상임대표 신혜수·이하 정대협)는 여성부의 후원으로 행복한 노후만들기 사업의 하나인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인권캠프"를 지난 2000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 제주를 찾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탐라문화제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제주의소리
올해는 다섯 번째 인권캠프로 제주4.3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종군위안부라는 아픔 외에 4.3이라는 우리 역사의 다른 아픔에도 눈을 돌리자는 취지에서 두 번째 제주 나들이에 나서게 됐다고. 지난해 인권캠프는 금강산으로 다녀왔다.

인권캠프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같은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이 서로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심리치료사업의 일환이다.

7일 낮 12시30분께 제주공항에 도착한 할머니들은 우선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2시를 조금 넘겨 제주자연사박물관에 도착했다.

마침 제43회 탐라문화제 제주시의 날 행사가 제주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어 할머니들의 흥을 돋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풍물소리에 어깨춤을 절로 추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여느 할머니들과 다르지 않았다.

▲ 윤순만 할머니.ⓒ제주의소리
유관순과 한 동네에 살았었다는 윤순만 할머니(78·충남 예산)는 13살 나던 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모와 함께 서대문 경찰서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윤 할머니는 "콩밥이라도 주면 좋지. 굶기는 것은 예사고 발가벗겨놓고 때리고 고문하고 그 때 이후로는 웬만하게 맞은 것은 아프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할머니는 그 때의 고문으로 오른쪽 팔꿈치 부분이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할머니는 그 후 일본의 하카다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해방을 맞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3살의 나이에 끌려가 4년만에 해방을 맞았지만 고향을 찾아가는 데만도 2년이 더 걸렸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이 항복하니까 수감돼 있던 한국사람들을 미군이 다 한국으로 보내줬는데 한국에 도착해서 고향을 찾아서 하염없이 걸었지. 그렇게 2년동안 길에서 살면서 이 집 저 집 밥이든 장이든 많이 훔쳐먹었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 고문으로 완전히 뒤틀려 굳어버린 윤순만 할머니의 오른 팔.ⓒ제주의소리
윤 할머니는 말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알아야 해.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생겨났지.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몸 뺏기고 명이 길어 지금까지 살아있지 먼저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젊은이들이 이런 아픔을 알고 힘을 길러야 돼. 그게 나라가 강해지는 거야. 나라가 강해져야 다신 우리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 안 생기지."

변변한 의약품도 없던 시절, 똥물을 많이 먹어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건강하다고 믿는 순수한 윤순만 할머니였다.

이번 인권캠프에는 당초 48명의 할머니들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 등의 이유로 40명의 할머니와 20여명의 자원활동가들이 함께 제주를 찾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 나들이가 힘에 부치셨는지 내내 힘들어했던 정윤홍 할머니(86·서울 관악구).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생활 당시 탈출을 시도했다 붙잡혀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지금도 다리가 많이 불편하다.

▲ 정윤홍 할머니(오른쪽)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어머니처럼 여기며 도와주고 있는 송도자씨.ⓒ제주의소리
일본에서 종군위안부로 여자들을 소집한다는 소식에 부모는 15살 어린 윤 할머니를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그 후 남편과 아이 둘을 낳고 살던 윤 할머니는 종군위안부로 끌려가는 운명을 피하는 듯했지만 24살 되던 해, 밤에 자다가 끌려간 남편이 사망하고 그에 대한 보상문제로 서울역으로 나오라는 얘기에 나간 것이 아이들과도 마지막이었다고.

그 길로 중국의 목단강으로 끌려갔고 동안성 등지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됐다.

위안부 생활도중 탈출을 시도했다 붙잡혀 고문당해 다리에 철심을 박아야 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은 마음의 상처와 함께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다.

2년 후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 할머니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아이들을 찾으려고 시집으로 갔지. 근데 시집에서는 보상금 받아서 어느 놈이랑 살다가 이제 와서 돌아왔냐고 나를 받아주지 않더라고. 그렇게 내침을 당하고 아이들도 볼 수가 없었지. 그 후로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어"

▲ 정윤홍 할머니.ⓒ제주의소리
정 할머니는 지금도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 힘들기만 하다고. 그나마 같은 아픔을 겪은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정대협이 마련한 쉼터에서의 시간이 제일 편하다고.

정 할머니는 자신들을 종군 위안부로 만든 일본보다도 조국인 한국이 더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힘없어서 주권 빼앗기고 국민들 남자나 여자나 다 공출하더니 이제 와서는 나 몰라라 하는 정부가 한없이 원망스러워. 일본보다 더 나쁘지. 제 나라 국민을 그렇게 해 놓고 자기들은 책임 없다고 하니. 이게 말이나 돼?" 내내 힘겨워 하시던 정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공통된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에 정부로부터 법적 배상을 받는 것이다.

윤미향 정대협 사무총장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음에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제대로 된 가정도 꾸리지 못한 채 혼자서 고통 받으며 살아오셨다. 지금은 같은 아픔을 겪은 할머니들과 함께 하고 주위의 인식도 많이 개선되고 있어 할머니들의 표정이 처음보다 사뭇 밝아졌다"고 말했다.

▲ 제주 나들이 기념사진 한 컷!ⓒ제주의소리
윤 사무총장은 "지금도 위안부라고 하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다는 등 피해의식이 있지만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할머니들끼리도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사랑 받고 있다는 걸 알아가면서 변화되고 있다"며 "할머니들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죽기 전에 자신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피해자로써 정부로부터 정당한 배상을 받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죽고 나면 누가 이것을 기억하고 바로 잡아줄 수 있겠냐고 늘 안타까워하신다"고 밝혔다.

현재 128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대협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국회결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번 위안부 할머니들의 제주도 역사·문화 유적지 나들이는 2박3일의 일정으로 도내 일제시대 군사 전적지, 4.3항생 유적지 등을 돌아보며 과거의 역사로 인해 겪은 고통과 아픔을 넘어 희망을 꿈꾼다는 취지로 진행됐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