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유해진 지사②] "단독선거 절대반대...반미구국투쟁 궐기하라"

유 지사와 광복청년단체 회원들은 주간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가 어려웠다. 특히 유 지사는 도지사 관사 주변경계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밤에는 관사 창문 전체를 검은 천으로 막아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지 않아도 6척 장신에 검은 두루마기와 검은 선글라스를 애용했던 유 지사는 도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유 지사는 좌익계의 암살 위협으로 홍순봉(洪淳鳳) 경찰국장에게 권총을 빌려 낮에는 물론이며 잠을 잘 때에도 늘 끼고 다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좌익계에서는 유인물에서 "유해진이가 경찰국장에게 권총을 빌려 다니고 있지만 결코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공공연히 밝히자 유 지사는 슬며시 권총을 되돌려 주었다.

그런 가운데 남로당의 청년단체조직인 민애청(民愛靑)에서는 동맹휴업을 대대적으로 선동, 학원가는 또다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경찰은 좌익계의 색출과 제거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워낙 인원과 장비가 부족하자 서울에 있는 경무부에 직접 직원을 올려보내 무기를 요청했다.

도내 우익계 인사들은 매일 생명의 위험을 겪어야 하는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경찰국장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일이 잦았으나 경찰로서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어서 "당신 네 들이 죽으면 우리도 죽게 된다"는 말로 달랬다.

한편 도내 좌익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내려온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원 중에는 행정기관과 경찰의 힘을 등에 업고 민폐를 끼치는 자가 많아 주민들의 원성이 대단했으며, 각종 테러행위로 그야말로 치안부재 상태였다.

서북청년단 테러에 도청 총무국장 사망...도 전역 공포의 도가니

이같은 사회 분위기는 1947년 8월15일 광복절을 전후해서 절정에 달했다.
주민들의 구호는 미군정청을 타도하는 내용으로 점차 바뀌어 나갔다. 8월13일에는 북촌과 화북에서 주민과 경찰이 충돌했다. 미군정청은 주민들의 시위가 거세 지자 행정명령 제5호를 발표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개최하려는 8.15 해방 2주년 기념대회를 일체 불허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경찰은 8.15 기념대회를 앞두고 민전 간부와 회원은 물론이며 3.1 파업사건으로 풀려난 사람과 집행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을 다시 검거하고 투옥시켰다.

이를 두고 민전에서는 「8.15 기념행사를 보장하라」고 주장하면서 미군정청의 탄압을 항의했다.
8.15 기념행사는 결국 미군정청의 강력한 저지로 무산됐다. 이때를 계기로 좌익세력에 대한 미군정청의 탄압은 더욱 강화됐다. 남로당은 경찰의 단속 망을 피해 지하로 잠적, 제2폭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광복청년회 등 우익단체는 우익대로 좌익계의 준동을 규탄하는 내용의 전단과 벽보를 붙이며 주민들의 동조 움직임 차단에 주력했다.
전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도민 여러분. 우리들이 살길은 남로당의 책동을 분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량한 도민들을 선동하여 행정기관을 마비시키고 파업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들의 말에 속지 말고 대동단결로 난국을 타개합시다."

유 지사는 부임 초에 단행된 관공서에 대한 숙정으로 행정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에 달하자 비교적 혐의가 적은 사람들을 석방시켜 행정을 재개시키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분별한 경찰의 탄압으로 도청과 경찰과의 관계는 매우 껄끄러운 상태였다. 그래서 유 지사는 경찰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연회를 열었다. 연회에는 유 지사와 도청간부, 경찰에서는 김차봉(金次鳳) 경찰서장과 이호 특별수사본부 수사반장 등 경찰간부들이 참석했다.

유 지사는 술이 몇 순배 돌아간 뒤 김 서장과 이 반장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김서장, 혼란된 사회를 수습하는 데에는 경찰의 힘도 중요하지만 행정기관의 공직을 수행하는 공무원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지금의 도청은 직원들이 상당수 구속되는 바람에 행정이 마비상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 오신 김 서장과 이 반장이 힘이 되어 구속된 직원들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구속자들은 가족면허조차 허용되지 않았었다. 도청과 경찰 간부의 연회가 있은 뒤에 도청 직원들에 대한 석방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경찰로서도 사실상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도청과 관계를 개선하는 일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해 10월초 이 반장은 이인구 상공과장을 만난 자리에서 "도청이 구속자들에 대한 신원보증만 확실히 한다면 석방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며칠 후 파업 주동자 30여명을 제외한 임관호 산업국장, 김인지(金仁志) 학무과장, 임재찬(任才贊) 수산과장 등 많은 구속자를 석방했다.

도청 직원들의 석방을 계기로 각계에서 정상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중에도 3.1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내도한 서북청년단원들의 횡포가 심해 주민들의 불만을 여전했다. 서북청년단은 관공서의 인사는 물론이며 보급문제에까지 개입하는 등 하급 직원들을 마치 자신들의 부하처럼 다루는 등 월권이 심했다.

그들의 안하무인적인 행동은 유해진 지사의 후광과 경찰의 막강한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더구나 그들의 파견 배경에는 미군정청 경무부가 개입되고 있어서 「좌익척결」이라는 명목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김두현 도청 총무국장이 서북청년단원들의 테러에 의해 숨진 사건이 발생하여 도민들을 더욱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서북청년단은 도민들의 구호용으로 나온 광목 옷감을 서북청년단에게 많이 배정해주지 않고 인사청탁을 들어주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고 김 국장을 납치한 후 집단구타로 숨지게 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온갖 투서들이 난무하여 애매한 주민을 좌익으로 고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3.1 사건으로 옷을 벗은 강동효의 후임으로 제주경찰의 수장으로 부임한 김차봉 경찰서장도 좌익과 내통한다는 투서로 사직하는 사태마저 벌어졌을 정도였다.

1948년이 되면서 한라산과 지하로 잠적했던 남로당 조직은 유엔의 감시하에 실시할 예정인 남한 단독선거 반대운동을 벌이며 서서히 활동을 시작했다. 남로당제주도당부는 1948년에 들어서자 「UN위원단은 물러가라」「남한단독선거 절대반대」 등을 외치며 반미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또 지역별로 자위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지역의 소요 정도에 그쳤다.

이와 함께 2월7일부터 나흘간 운수업체에서 파업사태가 다시 벌어졌으나 동조자가 적어 운행정지에 그쳤을 뿐이었다. 남로당제주도당부는 그해 3월에 접어들면서 일부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미구국투쟁에 궐기하라"...경찰지서 습격으로 4.3 발발

1948년 4월3일.
제주경찰서 관내의 화북·삼양·조천·세화·외도·신엄·애월·한림지서와 서귀포경찰서 관내의 성산·남원·대정지서 등 모두 11개의 경찰지서가 무장대에 의해 일제히 습격당했다는 급보가 경찰서를 통해 유 지사에게 보고됐다. 일제시대의 구식용 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이날 새벽을 기해 무장행동을 개시하고 5.10 남한단독선거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시민 동포들에게! 경애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독선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美帝)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해, 오늘 당신네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도민은 반미구국투쟁에 모두 호응 궐기하여 주기 바랍니다."

당시 치안업무는 도청과는 별개로 완전히 독립된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경찰은 무장대의 급습에 총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무장대의 습격행위는 경찰의 방어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유 지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읍면에서 올라오는 동정보고에 온 신경을 모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사 부임 때에 안재홍 민정장관이 자신에게 특명처럼 내렸던 것이 좌익척결이었는데 그것이 달성되기는커녕 오히려 무장대의 총궐기 사태로 확산돼버렸기 때문이었다.

경무부는 사태가 발생한지 이틀만인 4월5일 「제주지방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총지휘관에 경무부 김정호(金正浩) 공안국장을 임명하는 동시에 육지부의 각도 경찰국에서 차출한 경찰병력을 급히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4월5일 서울시내 공관에서 개최된 5.10 총선거촉진 대강연회에서 제주도의 사태를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지금 제주도에서는 총선거를 반대하는 좌익분자의 파괴행동이 있어났으나 피해는 경찰관서 습격 11개소, 경찰관 사망 4명, 일반인 사상 8명, 경찰지서 피습 5개소에 이렀을 뿐이다."고 밝혔다.

조 부장은 이어 4월6일에는 제주도사태에 대한 진압발표를 통해 "민족 전체의 사활을 결정할 총선거의 중대한 시기에 애국적인 동포들의 열렬한 협조가 있어서 훌륭한 선거의 결과를 가져오게 해야 할 것이다"고 서두를 꺼내고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경무부에서는 4월5일 밤 김정호 공안국장과 수산 약간명, 응원경찰대 등을 제주도에 급파했으며 치안유지와 도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강구 중에 있고 반민족적인 폭력행위자들의 소굴을 반드시 발본색원하여 소탕할 것이다."고 밝혔다.(동아일보·조선일보·서울신문 4월7일자 보도)

그러나 이튿날의 발표문에는 행방불명 4명, 경찰관 가족사망 1명, 공무원 사망 1명과 부상 30명, 전화절단 4개소, 일반가옥방화 6개소 등이 추가됐다.
경찰은 4월10일부터 제주도 전역에 대한 통행증제도를 실시하고 주민들의 이동을 엄격히 제한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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