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미의 제주여행(5)] "아직 단풍은 이르지만 삶의 여유 즐길 수 있습니다"

가을이다.
중산간에는 지금 가을꽃 억새가 한창이다.
그러나 가을하면 먼저 떠 오르는 것은 역시 단풍이 아닌가.
이 가을 남보다 먼저 단풍을 맛보러 떠나는 것은 어떨지.

한라산을 가로질러 산 남북을 연결하는 2개의 도로 중 1100도로를 향한다.
한라산 해발 1100고지를 통과한다는 데서 이름 붙여진 도로이다.

신제주 노형5거리를 거쳐 관광산업고를 지나면 한라수목원 입구와 만난다.
한라수목원의 푸른 숲과 온갖 꽃, 곱게 깔아 놓은 잔디를 밟고 광이오름을 오르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치자.

   

노형오거리에서 제주축산진흥원까지의 길을 요즘은 신비로라 한다.
신비의 도로가 있는 길이란 뜻이다.
사람의 착시현상 때문에 차를 세워두면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신비의 도로이다.
신비의 도로에 잠시 내려 남들처럼 패트병에 물을 넣어 굴려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신비의 도로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일방통행길이 나온다.
처음 만들때는 왕복 2차로였는데 굴곡이 심하여, 후에 내려오는 길을 따로 만들고 일방통행길이 되었다.
꼬불꼬불 길을 따라 피어 있는 억새의 숲을 지나며 길다운 길의 정취를 느끼기에 안성마춤인 곳이다.

   

이 길이 끝나고 조금 더 오르면 산록도로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길 옆 공터에 차를 잠시 세워 앞에 보이는 오름을 바라본다.
바로 아흔아홉골이라는 오름이다.

이 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에는 이 곳에 100골이 있었는데, 그 한 골이 없어지게 된 경위가 바로 이곳에 얽힌 이야기이다.

어느 옛날 아주 아득한 옛날이었다.
중국에서 스님 한 사람이 들어와서 섬 안 곳곳을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다 여기로 모이시요!"
그는 마을마을을 다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다.
"어서 모이시오. 이 산에 살고 있는 맹수들을 모두 없이해 줄테니 다들 모이시오."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그만 귀가 솔깃했다. 맹수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해치고, 곡식밭을 망쳐 놓아서 걱정이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여러분들, 이제 다들, '대국동물대왕 입도'라고 외치시오."
사람들은 호랑이나 사자 등 맹수들을 없이해 준다니까, 좋아서 시키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한라산에 있던 맹수들이 다 이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스님은 불경을 오랫동안 외우고 나서 모여든 맹수들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이제, 살기 좋은 곳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지금 모여있는 이 골짜기는 없어질 것이고, 너희 종족은 멸종하게 될 것이다."
스님이 고함을 쳤다.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짐승들이 모여있던 골짜기가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물론 거기에 있던 맹수들도 간 곳이 없었다.
그 후로부터 제주에는 맹수도 나지 않게 되었고, 큰 인물도 날 수 없게 되었다.
왕이 날 수 없으니까, 계속 육지부 사람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아흔아홉골을 지나고 천왕사 입구를 지나면 어승생저수지가 나온다. 그 이름이 한밝저수지라던가.
계속 가면 다시 산록도로와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고 좌회전하면 본격적인 1100도로로 접어든다.
조금 가면 서쪽으로 도로가 하나 나 있다.
천아오름 양수장으로 가는 길이며, 길 좌우로 넓은 목장이 조성되어 있다.
잠시 내려 요즘 한창인 억새와 함께 기념촬영이라도 하면 어떨까.

   

주시에서 허위허위 이곳까지 오다보면 목도 마를 것이다.
목도 축이고 한라산의 단풍이 어디까지 왔는지 잠시 확인하기 좋은 곳이 있다.
바로 어리목휴게소이다.
들어가려면 입장료와 주차료를 내라고 한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주차료와 입장료를 내고 오래 머물기는 좀 그렇다.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샘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한라산을 쳐다본 뒤 발길을 돌린다.

   

올 가을 한라산 단풍은 오는 15일쯤 시작돼 30일쯤에 절정에 이르며, 예년에 비해 고울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첫 단풍일은 한라산 전체가 20% 물들었을 때를 말하며, 절정은 산의 80%가 단풍으로 뒤덮인 상태라고 한다.

   

역시, 아직 이른가?
계곡의 색깔은 단풍이 20%를 채우지 못한 것 같다.
너무 서둘러 나온 것은 아닌지...

   

어리목을 지나 해발 1,000m 표지석이 서 있는 도로변에 영송(靈松)이라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소나무는 나이가 100년이 넘었다는데도 키는 1m 남짓 밖에 안되며 그 대신 둘레는 20여m로 퍼져 있다.
'오름나그네(김종철)'에 보면 이 소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 한라산신이 타고 다니던 사슴이 이 자리에 죽은 뒤, 이 나무가 자라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죽은 사슴을 대하듯 쓰다듬는 산신령의 손길로 하여 키가 크지 않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이를 사슴이 환생하여 누운 모습이라 하여 원래는 눈사슴소낭(누운 사슴 소나무)이라고 불렀다 한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오르다 보면 드디어 도로의 정상인 1100고지에 다다른다.

   

1100고지에서 쳇망오름과 볼래오름 사이로 보이는 영실은 또 하나의 절경이다.

1100고지에는 고산습지가 발달되어 있다.
1100고지 습지는 한라산 고산습지로서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생물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습지는 육지와 수생생태계의 전이지대로서 각종 곤충이나 어류 및 조류의 산란장인 동시에 다양한 야생 동 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며, 오염물질 정화, 용수공급원 기능 등 환경적 또는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자연자원이다.
1100고지 습지는 넓게 분포되어 있지만, 지형적인 특성으로 소규모의 습지가 부분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지금은 계절적으로, 또 물이 말라 습지의 특성을 볼 수 없지만, 이 곳에는 제주달구지풀 등 9종의 특산식물과 금방망이 등 13종류의 희귀식물, 14종류의 습지식물 등 106과 165속 207종류의 식물이 분포하고 있고, 56과 149종류의 곤충이 서식하는 등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 1100도로에 지금 피어있는 꽃들.ⓒ양영태

▲ 1100도로에서 볼 수 있는 열매들.ⓒ양영태

   

1100고지를 지나 계속 가면 영실 입구에 닿는다.
잠시 들러 보자.

한라산의 단풍감상 포인트는 영실코스의 해발 1,280m 휴게소에서 병풍바위 위쪽까지이며, 관음사 코스의 왕관능 단풍을 볼 수 있는 용진각 지점이다.
이밖에 본토에 있는 산의 단풍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어리목과 성판악 등반로 곳곳에서도 단풍나무, 졸참나무, 서나무 등의 단풍색과 구상나무의 푸른 잎이 어우러진 가을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영실진입로의 존자암 입구에 잠시 들러 샘물로 목을 축이고 영실 한 번 바라보고 다시 길을 떠난다.
이 곳 역시 아직 단풍은 이른 것 같다.

   

영실을 지나 중문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이제는 내려가는 길이다) 자연휴양림이 있다.
한여름 주말에 가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지금은 찾는 이 뜸하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그래도 잠시 들러 삼림욕이라도 하고 가자.
삶의 여유란 그런 것이 아닐까.

   

휴양림을 나와 조금 가면 거린사슴이라는 오름이 있고, 그 기슭에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이 곳은 날이 좋으면 서귀포시 고근산에서 대정읍 송악산까지 보이는 시야가 탁 트인 곳이다.
또한 1100도로를 따라 중문으로 가는 도중 잠시 들러 쉬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이라도 하면 그 곳이 무릉도원이다.

   

발길을 돌렸다.
오늘의 여행은 이것으로 마무리를 하려 한다.
비록 단풍다운 단풍은 볼 수 없었지만..

돌아 가는 길에 잠시 물허벅 진 여인상이 있는 소공원에서 쉬기도 하고...

   
돌아 가는 길 가에는 낙엽(?)이 뒹굴고 있다.

※ 양영태님은 '오름오름회' 총무, 'KUSA동우회 오름기행대' 회원입니다. 이 글은 양영태님의 개인 홈페이지  '오름나들이(ormstory.com) 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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