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하연합회, 열매솎기 대상 1번과 ‘가공용 수매’ 결정…감귤 정책 또 다시 ‘휘청’

“행정과 농·감협만 믿고 착실하게 열매따기를 해 온 감귤농가만 또 다시 속았습니다. 앞에서는 열매솎기 해야만 감귤을 살릴 수 있다고 외치면서 뒤에서는 따지 않은 채 남겨 둔 비상품을 가공용으로 수매하겠다고 하면 어느 누가 행정과 생산자단체를 믿겠습니까. 말 잘 듣고 성실히 일해 온 농가는 바보입니까”

제주도 감귤정책이 또 다시 흔들리고 있다.
감귤원 폐원과 열매솎기, 비상품 감귤 유통차단을 위한 조례 제정과 유통조절명령제 발동 등 엄청난 예산과 인력, 시간을 쏟아 부으면서 감귤경쟁력 확보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 왔으나 지금까지의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제주도감귤출하연합회는 12일 오전 11시 제주도농업기술원 대강당에서 제주도와 시·군, 그리고 농·감협 조합장과 독농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04년산 가공용 감귤 규격결정을 위한 전체회의를 열고 비상품 감귤 중 1번과와 9번과를 가공용으로 수매키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조합장과 독농가들은 가공용 수매대상으로 ▲1번와 9번과를 포함시키는 안 ▲1번과를 제외한 9번과만 가공용으로 수매하는 방안 등을 놓고 난상토론을 벌인 끝에 조합장 다수의 요구로 비상품 감귤이자 행정과 농·감협에서 생산농가들에게 열매솎기를 해 줄 것을 간절히 요구했던 1번과도 수매대상으로 결정해 그동안 열매솎기에 참여해 온 생산농가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특히 이날 회의에서는 감귤 주산단지 농·감협 조합장과 일부 자치단체에서도 “1번과도 가공용으로 수매해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쳐 감귤산업 회생에 대한 의지를 의심케 했다.

농·감협 조합장과 독농가들은 “정책의 일관성도 좋지만 1번과를 수매하지 않으면 상품 가격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1·9번과 수매주장과 “1번과까지 수매하면 지금까지 펴 온 감귤정책이 또 다시 후퇴하게 된다”는 1번과 제외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안덕과 표선, 중문, 대정농협 조합장 등은 “9번과만 수매하고 1번과를 제외할 경우 유통명령제에도 불구하고 중간상인들에 의해 1번과가 시장으로 출하돼 결국 상품의 가격을 교란시키게 된다”면서 “상품의 가격 지지를 위해서라도 1번과와 9번과를 수매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의 주장에 일부 독농가와 조합장들이 “감귤을 다시 죽이는 결정”이라며 반대의사를 피력하자 오홍식 감협조합장은 “이론적으로는 1번과를 빼는 게 맞다. 지금까지 상당한 노력과 경비를 들여 적과사업을 했다”며 1번과 제외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현실적으로 1번과가 시장에 나가게 되면 상품가격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포함시키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또 고봉수 서귀포농협조합장도 “농업은 이상과 현실이 상충된다”고 말한 후 “비상품을 제외해야 한다면 1번과는 물론 9번과도 빼 2~8번과에서만 가공용을 수매해야 한다”면서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1번과를 안 딴 농가의 잘못이지만 여러 가지를 감안할 때 1번과도 포함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조합장 외에 심지어는 1번과 열매솎기 정책을 추진해 왔던 서귀포시 김성현 부시장 조차 1번과 수매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김성현 부시장은 “열매솎기를 아무리 잘 해도 비상품은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1번과가 가공용으로 처리 안되면 상품으로 다시 나가 시장유통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독농가와 조합장들은 1번과를 포함시키자는 주장에 대해 “이게 과연 제주감귤을 살리려는 정책이냐”며 강력히 반발했다.

고영찬 고산농협 조합장은 “비상품을 차단하기 위해 제주도와 농·감협은 조례도 만들고 폐원과 열매솎기를 강력히 추진해 왔으면서 지금에 와서 ‘1번과를 안 딴 농가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수매해 준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조례나 유통명령으로 비상품 출하를 막하 놓고는 상품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면 감귤은 어렵다. 농가와 지켜야 할 약속이다”라며 1번과 제외를 강력히 주장했다.

고영찬 조합장은 “일반 농작물은 가격이 떨어지면 밭에서 폐기하는데 감귤은 과연 (열리기만 하면) 다 돈인지를 한번 생각해야 한다. 감귤은 왜 폐기가 없느냐를 반성해야 한다”면서 “농가의 어려움도 이해하지만 1번과를 수매하는 게 과연 농가와 감귤산업을 위한 길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시 농협 관계자도 “지금까지 엄청난 예산과 인원을 들여 감귤원을 폐원시키고, 농가들에게는 ‘열매솎기를 해야만 감귤이 살 수 있다’고 말해 놓고는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 1번과도 수매하다’고 한다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된다”면서 “1번과를 수매하게 된다면 제주도 감귤정책이 심각히 흔들리게 된다”고 말했다.

진창희 농협제주지역본부장도 “0번과와 10번과는 물론이고 1·9번과도 따내기 위해 조례를 만들었다. ‘감귤이 다 죽는다’며 열매솎기도 해 오지 않았으냐”면서 “감귤 정책은 끝까지 한 방향으로 가야하며, 1번과 시장 유출 우려는 유통명령으로 과감히 단속하면 된다”며 1번과 제외 필요성을 역설했다.

독농가의 양용창씨는 “1번과를 수매한다면 금년에 열매따기 안한 사람만 덕 보는 게 아니냐”면서 “어떤 문제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모든 힘을 합쳐서 제주감귤이 살 길이 뭐냐를 고민해야지 항상 회의 때마다 욕 안 먹고, 좋은 말로 ‘신축적, 탄력적’이라고 치부하면서 어물어물 넘기다 보니 항상 감귤이 제자리가 아니냐”며 1번과 수매를 요구하는 농·감협 조합장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양용창씨는 이어 “앞으로 행정당국이나 농·감협 조합장들은 이보다 어려운 일들을 행해야 감귤이 살 수 있다”면서 “1번과를 수매하고도 앞으로 열매솎기를 하라고 말할 수 있느냐. 앞에서는 열매솎기를 하라고 하고, 뒤에서는 껴안기로 가는 게 과연 제주감귤이 사는 길이냐”면 분명한 반대입장을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는 발언자 14명 중 9명이 1·9번과 수매찬성, 4명이 1번과 제외 주장을 펼쳐 결국 다수의 의결로 1번과와 9번과, 그리고 2~8번과 중 결점과를 가공용으로 수매키로 했다.

한편 이날 회의에서는 출하연합회가 회의시작 전부터 1·9번과를 가공용으로 포함시키려 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출하연합회는 이날 회의자료를 통해 1·9번과를 수매하지 않았을 경우 ▲가공용 수매 물량이 부족하고 ▲비상품을 버린다는 농가들로부터의 원성 ▲소비지 시장으로의 유입우려 등이 예상된다면서 부정적 의견만 내 놓았다.

반면 1번과와 9번과를 수매했을 경우에는 시장유통을 방지해 상품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고, 감귤 가공공장의 물량확보도 가능하다며 사실상 1·9번과를 수매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자료를 제출했다.

결국 제주도와 농·감협 조합장, 그리고 행정과 생산자단체들로 구성된 출하연합회 모두 감귤농가로부터 제기될 한 순간의 원성을 듣지 않겠다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자신들이 주장해 온 감귤살리기 정책을 외면했다는 비난에서 비켜나가기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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