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편지(1)] 가을이 아름다운 건...

▲ 붉게 물든 영실 오백장군의 단풍나무
홍자색 억새꽃이 들판을 물들이기 시작하면
한라산엔 고운 단풍이 백록담에서 山 아래로 남하를 시작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르기만 하던 숲에는
점점이 빨간 물감을 찍어놓은 자국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침에는 한둘이던 점들이 저녁에는 어느새 서넛으로 늘고,
다음날 아침이면 그 점들이 새끼를 치듯이 늘어나 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두 손으로 눈을 감고 주문을 외는 사이
어느 새 등 뒤로 다가선 손님처럼
가을은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 지난 여름 신록의 바다에 울긋불긋 단풍 물들며 가을 깊어갑니다.
나무와 풀들은 가을이 오면 잎새들을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메마른 대지와 건조한 대기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가지의 잎새들을 모두 떨궈내야 합니다.
뿌리의 수분과 태양빛을 마시며 나무의 자양분을 생산해내던
자신의 분신들을 내쳐야만 하는 나무의 심정인들 오죽하겠습니까.
그 아픈 가슴만큼 속줄기엔 나이테 한 줄 더 긋고
알뿌리 한 줄씩 늘이는 것이겠지요.
그러면서 가을이면 스스로 고개를 숙이며 열매를 맺는
겸손을 체득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 어리목코스의 만세동산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와이계곡의 짙어가는 단풍숲 너머로 백록담의 장엄한 화구벽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줄기와 잎자루 사이엔 ‘이층’이란게 있더군요.
나뭇잎과 줄기를 이어주는 일종의 고리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해져오고 메마른 날씨가 계속되면
줄기들은 잎으로 전송하던 수분의 통로인 이층에 장벽을 칩니다.
겨울 수면을 위해 꼭 필요한 수분을 줄기에 저장해 놓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혹독한 겨울 추위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새잎을 틔울 부활의 봄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요.

▲ 노을빛에 물드는 호장근 잎새
수분 공급이 끊어진 잎새들은 가을 따사로운 햇살에 자신의 몸을 태웁니다.
나무에 따라서 붉게도 태우고 노랗게도 태우고 갈색으로도 타오릅니다.
어쩌면 색깔들의 경계를 허물며 세상의 모든 빛으로 물드는지 모릅니다.
이런 잎새들이 모이고 모여 만산홍엽을 이루는 것이겠지요.

   
단절된 이층은 서서히 말라갑니다.
줄기에 들러붙은 이층이 한 장의 나뭇잎 조차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면
줄기는 과감히 잎새를 떨구어 냅니다. 해서 이층을 ‘떨켜’라고도 합니다.
아니 줄기가 떨구기 전, 단풍잎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를 버려야만 살아남을 줄기의 마음을.
차라리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버림받기 전에 떠나는 비장한 심정으로.
떨켜를 떠난 잎은 낙하합니다. 낙엽이지요.
줄기를 원망하지도 스스로 서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바람 따라 흘러다니다가 자신을 키워준 나무 그늘에 앉았다가
생명의 흙속으로 아름답게 소멸해 가겠지요.
먼 훗날 흙속에서 또 다시 나무를 살찌우는 부엽토가 되어 환생하겠지요.

▲ 가을이 아름다운 건 단풍이 곱게 물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초연하게 소멸하는 낙엽이 있기 때문입니다.
낙엽의 이별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고향을 떠난 연어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장엄은 아닐지라도
누구라도 낙엽의 장렬함을 비웃지는 못할 테지요.
낙엽의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스스로 제 몸을 사르는 초연(超然)입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단풍이 곱게 물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초연하게 소멸하는 낙엽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오면 유독 계절 타는 이들이 많아지는 건
부활을 예비하며 고결하게 소멸해가는
낙엽의 마음 때문입니다.

▲ 쥐손이의 낙엽

흩날리는 나뭇잎 한 떨기에도 가슴이 젖고
구름 한 점 없이 시퍼런 하늘만 봐도
심장이 울렁거리지는 않은지요.
가슴 한켠에
곰삭힌 설움 한꺼번에 차올라
눈물로 솟아난 적은 없으신지요
가을은 그렇게 소리없이 왔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는
시작도 끝도 경계도 없는 신기루만 같습니다.

한라산엔 오늘도 단풍 붉게 물들며
낙엽들이 한잎 한잎 바람에 날립니다.

오희삼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좋은 글과 사진 보내주셔서 감사하구요.  이어질 주옥같은 한라산 편지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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