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서 4.3소재 연극…연희단거리패 '초혼' 14일까지 공연

▲ 제주4.3을 소재로 한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초혼'이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14일까지 공연된다.
서울의 한복판, 그것도 일반 소극장이 아닌 국립극장 무대에서 제주4·3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이 공연된다는 소식에 지난 12일 저녁 설레는 마음으로 국립극장을 찾았다.

지난 9일부터 오는 14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초혼(招魂)'은 제주출신 희곡작가 장일홍의 '이어도로 간 비바리'가 원제로, 2003년 문화관광부 전통연희개발공모 당선작으로 국립극단 예술감독인 이윤택씨의 연출로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 작품은 지난해 12월 수원에서 초연됐으며, 이번 서울공연은 ‘2004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참가작으로 올려진 것이다.

국립극장 하늘극장은 말 그대로 하늘이 보이는 야외공연장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관객이 적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날 공연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초혼'은 굿형식의 연극이다. 제주도의 근현대 수난의 역사를 제주지역의 독특한 무혼굿인 요왕맞이굿(바다에서 익사한 망자의 시체를 찾지 못했을 때 하는 굿)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무대 세트는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초가집이 있고 뒷편엔 대나무숲, 마당 앞으론 바다가, 무대 왼쪽으로 굿판이 차려져 있다. 시대는 제주관광 개발이 한창이었던 80년대. 가뭄과 양식장 폐사로 인해 굿을 준비하는 성산리 해녀회장 ‘에미’의 가족이 작품의 중심이며, 숙명적인 악연으로 이어지는 이장집이 갈등의 반대축을 이룬다.

일제치하의 해녀항쟁과 제주4·3사건, 그리고 관광개발로 이어지면서 골프장 건설, 호텔을 짓기 위해 집단학살 피해자들이 묻혀 있는 땅을 사들이려는 재벌들의 행태가 갈등구조로 나타난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연출가는 한판의 굿을 중심으로 풀어냈다. 연극의 일부로서 굿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굿이 이어지는 굿거리 마다 이야기가 전개된다. 때문에 이 공연을 보고 나면 제주의 요왕맞이굿 한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한 셈이 된다.

여러가지 이야기 속에서도 감동적인 것은 4·3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해원(解寃)이었다. 바다에 수장되고 집단학살로 매장돼 구천을 떠돌던 원혼들의 억울함이 굿이 진행되는 동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굿을 주도하는 심방은 간절한 사설로 원혼들의 해원왕생(解寃往生)을 빈다.

이 공연에서 심방역을 맡은 정공철씨는 제주의 굿을 중앙무대에서 하나의 예술적 행위로 잘 소화시켰다. 원혼들의 해원을 비는 간절한 사설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정공철씨는 놀이패 ‘한라산’ 활동을 통해 다져진 노련함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역할을 톡톡히 했다. 학사출신 심방으로 세인의 이목을 끄는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71호 제주칠머리당굿 전수생인 ‘진짜’ 심방이기도 하다.

첨단조명과 특수분장, 무대설치 등이 세련됐다는 점도 이 공연을 돋보이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과거의 전통굿이 현대 연극에서 하나의 공연기법으로 대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윤택의 연출력은 신선했다. 언제 배웠는지 배우들의 제주사투리도 자연스러웠다. 지난 89년 '오구'를 선보이면서 굿판에 익숙한 연희단거리패의 실력을 인정하게끔 한 공연이었다.

공연 말미에 “55년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문이 자막을 통해 펼쳐졌을 때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현기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은 “제주도민들이 지금까지도 앓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고 억울한 원혼들을 위령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제주도 특유의 굿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극을 이끌어 갔는데 극형식으로도 상당히 성공했다고 본다. 특히 정공철 심방의 구성진 사설과 읊조림이 돋보였고, 떼죽음당한 원혼들을 형상화한 것이라든가 군무, 현무암과 대나무숲 등 제주도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무대설치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작가 장일홍씨는 “요왕맞이 굿은 바다에 빠져죽은 망자의 넋을 건져 올려 저승 시왕길을 닦아 망자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해원굿이다. 4·3사건의 원혼들을 해원하기 위한 틀거리로써 요왕맞이 굿을 빌려왔는데, 우리 전통문화인 굿이 현대 예술작품과 만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도록 구성한 이윤택씨의 연출은 한국연극의 새로운 전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1년전 어렵사리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통과되고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까지 있었으나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해원이 모두 이뤄지기엔 아직도 걸림돌이 많다. 명예회복이 됐다고 하나 아직도 극우보수단체에서는 여전히 ‘폭도’니 ‘빨갱이’니 하는 색깔 씌우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진정한 해원은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권’이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히 여겨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연희단거리패는 이 작품으로 외국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영어·독일어 등으로 준비해놓고 내년 해외공연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자금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오는 12월1~2일 오후 4시, 7시 제주도문예회관대극장, 4~5일 오후 4시, 7시 서귀포학생문화원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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