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 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44)

섬잔대는 한라산 능선 가까이에서 자라는 제주도 특산식물입니다. 잔대보다는 키가 작고 그 빛깔이 더 진한 것이 특징입니다.

▲ ⓒ김민수
잔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더덕을 알면서부터입니다.
청년시절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식당들마다 '더덕구이'라는 메뉴가 단골처럼 있었는데 진한 더덕의 향을 좋아했던 나는 호주머니가 풍족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함께 더덕구이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영 제 맛이 안납니다.
강원도 더덕에 길들여진 입맛이라서 그려려니 하고 여행에서 돌아와 어머님께 이 말씀을 드리니 "그건 아마 더덕이 아니라 잔대였을 것이여, 더덕이 귀하니 비싸니 아마 흔하디 흔한 잔대였으니 그렇게 맛이 맹숭맹숭하지 않았겠니?"하시는 겁니다.

   
잔대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의 대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기분나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잔대는 잔대대로의 아름다움이 있고, 특성이 있을 것이니 남과 견주어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진 않겠죠.

   
섬잔대.
그를 만난 것은 4.3항쟁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 근처에 있는 다랑쉬오름이었습니다. 오름의 맹좌라고 할 수 있는 다랑쉬오름 초입에 잃어버린마을에 대한 표석은 우리네 아픈 역사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섬잔대를 보면 '고난'이 떠오르고 제주민중들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피어난 꽃만 같아서 마음이 짜해집니다. 꽃의 색깔은 고난의 상징인 보랏빛입니다.

다랑쉬오름 중간에 이르니 하나 둘 가을꽃들 사이에서 섬잔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소곳이 수줍은 듯 억새에 숨어 피는 것도 있고, 바람이 너무 흔들어대니 작은 나무에 살포시 기대어 피는 꽃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 둘 눈을 맞추며 다랑쉬오름의 능선에 올랐을 때 그 곳에는 오르며 눈을 마주쳤던 섬잔대의 빛깔보다 더 진한 빛깔로 피어있는 섬잔대를 보았습니다.

섬잔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솔체꽃과 산부추, 쑥부쟁이, 산비장이도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것보다 더 진하게 그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색이 진한 대신 키는 작았습니다. 센 바람에 꽃향기를 제대로 맡지는 못했지만 그 향기도 더욱 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을꽃들은 향기가 진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무 크면 추워서 금방 시들어버리니 꽃은 작고, 작은 대신에 올망졸망 모여서 한 송이처럼 크게 피어나 곤충들을 유혹한다고 합니다. 위에서 소개해 드린 산비장이나 산부추, 솔체도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가을꽃들 중에는 하얀색 꽃도 있지만 보라색이 단연 우세합니다. 가을의 빛깔이 보라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꽃이라도 절벽에 핀 꽃의 색깔이 더 진하고, 향기도 더 진하다고 하니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승화시켜가는 자연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네 삶에서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네 역사에도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 좌절하고, 절망한다면 그저 그렇게 시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과 역사에 찾아오는 고난같은 것들을 부둥켜안고 그것을 통해서 더욱 아름다운 삶, 역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욕심만 부리며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고난의 정점에서도 늘 희망을 바라보면서 더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키는 사람, 그런 역사야 말로 꽃보다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의 역사를 돌아봅니다.
삼별초의 난을 위시해서 일제시대의 항일운동, 제주 4.3항쟁, 6.25 등 제주땅 전역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유배지요 변방의 섬에 살던 제주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역사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돌과 바람이 많은 것은 자연적인 요인이라고 하지만 여자가 많은 것은 그만큼 제주의 역사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척박한 땅 제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인은 유토피아 '이어도'를 꿈꾸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늘 그자리에서 피고지는 꽃들은 어쩌면 제주 역사의 산증인들일 것입니다. 다랑쉬오름에 피어있는 섬잔대는 1948년에도 피어있었을 것이요, 그 높은 곳에 피어있음으로 인해서 중산간지역에서 죽어갔던 원혼들의 한맺힌 소리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들판의 작은 꽃 한송이에도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제주의 들판 여기저기서 피는 꽃들에는 제주의 역사가 들어있고, 제주인의 삶이 들어있습니다.

   
하늘이 높은 가을 마치 금강초롱을 보는 듯한 진한 섬잔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더덕의 향보다 진하지 않아도 제주인의 삶의 향기는 더욱더 진하게 담고 있는 듯한 섬잔대의 마음이 싸하게 마음을 파고 들어옵니다.

※ 김민수님은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것을 즐겨 합니다. 자연산문집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 '을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