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연구소ㆍ탐라연구회 공동 심포지엄…김민주 회장 기념강연

   
한국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와 군사독재가 판을 쳐 암울했던 50~70년대. 4.3이란 말을 입밖에 꺼낼 수도 없던 그 시절, 나라밖에서는 4.3과 한국사회의 어두웠던 근현대사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4.3 연구가 가장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제주도에서의 그 처절하고, 원통했던 4.3의 아픔과 실패를 간직하고 떠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4.3을 몸으로 체험하고, 연구해왔던 선배 연구가들의 모임인 탐라연구회(회장 김민주)와 제주4.3연구소(소장 이규배)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모아 ‘제주역사와 주변지역과의 교류’란 주제로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공동 개최했다.

   
15일 오후 5시 제주 오리엔탈호텔에서 개막된 심포지엄에는 4.3연구소 전 이사장인 강창일 의원과 이규배 소장, 제주도의회 양우철 의장, 탐라연구회 김민주 회장과 재일역사학자 강재언 선생, 신간사 고이삼 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 개막식에는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저술한 김민주 회장이 개인적 소견을 담은 ‘북한과 제주4.3’에 대해 강연했다.

김민주 회장은 “4.3은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며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이 4.3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 탐라연구소 김민주 회장
김 회장은 “남한과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에 대해서는 공부를 많이 했지만 한국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 친일세력들을 다시 등용하는 우를 범했다”며 “또 북에서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겨 내려온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행위가 제주도민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4.3의 원인을 진단했다.

이어 김 회장은 “미군이 우리나라에 대해 좀 더 인식을 가졌고, 서북청년단만 제주도에 내려오지 않았으면 4.3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북한에 대해서도 "4.3과 관련해 제대로 평가를 내리지 않았고, 북으로 간 동포들에게도 사상검증을 하였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 회장은 “4.3을 일으킨 이덕구나 김달삼 등 주동자들은 진보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서 “하지만 이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된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저술시 4.3 관련 인터뷰만 3000여명 이상 한 김 회장은 “오사카 10만여명의 제주도 출신 중 3분의 1은 북한으로 갔다”며 “하지만 북한은 귀국동포들을 믿지 않아서 1년에 두 번 사상 심사를 하고, 특히 4.3에 관련됐던 사람들은 절대 믿어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 이유에 대해 김 회장은 4.3이 김일성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 남로당 계열이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김 회장은 “박헌영 등 남로당계는 대부분 미제의 간첩으로 처단되거나 숙청됐다”며 “북한에서는 4.3을 남로당이 일으킨 ‘좌경 모험주의’란 딱지를 씌어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 회장은 “조총련계에서도 김일성의 무장 항일투쟁은 가르치지만 4.3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나의 아들도 조선대학을 나왔지만 4.3에 대해 잘 모른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 회장은 “4.3 당시 죽어간 선배들을 생각할 때 나 혼자 살아남아서 높은 단상에서 주제넘게 얘기하는 이 순간에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국제학술 심포지엄은 16일에 △ 지도에 새겨진 제주인의 세계관(타카하시 고메이 교수·나고야대) △일본식민지하 제주도의 수산가공업과 사람들의 이동(河原典史 교수·리츠메이칸대) △제주도 항일운동과 ‘4ㆍ3’과의 연관성(박찬식·4ㆍ3연구소 연구실장) △ 제주도와 일본에서의 제주인의 생활(이지치 노리코 교수·애이메대), 그리고 강재언 교수(하나노조대) 가 ‘제주도 항일민족운동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하여’를 강연한다.

또한 17일에는 제주도 일본군 전적지와 4.3 유적지를 탐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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