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유해진지사③] 평화협상 결렬...이승만 "반란분자 소탕하라!"

남로당제주도당부는 4월15일 5.10단독선거 저지를 위한 도당부대회를 열고 각 지역별로 인민유격대를 조직, 경찰과 행정관서 등을 습격했다. 미군정청은 제주도경찰중 상당수가 무장대와 친·인척 관계로 토벌업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고 있다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중앙에 타도 출신 경찰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대들의 육지부 연락망을 끊기 위해 제주도령(濟州道令)을 공포하고 외지와의 해상교통을 차단시켜 버렸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5.10 선거인 등록이 4월9일까지 열 하루 동안 전국 일원에서 실시됐다. 그러나 선거인 등록마감 결과 전국 총유권자 877만9009명 가운데 91.7%인 805만5798명이 등록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물론 이 같은 결과에는 행정기관의 반강제적인 독려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선거인 등록 후에는 「강제등록」과 「대리등록」의 시비가 그치지 않았으며 이 무렵 선거보조기능을 가진 「향보단(鄕保團)」조직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5.10단독선거, 남군 오용국 선출...북군 갑 을 선거구 '무효' 선언

선거인 등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도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유혈사태도 일어났다.
제주도의 선거인 등록율은 64.9%(총 유권자 12만7715명. 등록자 8만2812명)로서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제주도는 북제주군 갑구·을구, 남제주군 등 3개 선거구에서 북군 갑구에서는 양귀진(梁貴珍) 김시학(金時學) 김충희(金忠熙) 문대유(文大有), 북군 을구에서는 양병직(梁秉直) 박창희(朴彰禧) 김덕준, 남군에서는 오용국(吳龍國) 김도현 등이 각각 출마했다.

선거는 예상했던 대로 순탄하지 않았다. 재산(在山) 무장대들은 4월18일 토평리 투표소를 습격한데 이어 4월20일에는 신촌·이호·동일·북촌리 선거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선거저지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또한 제주시내에는 「모든 공무원은 사임하라. 아니면 죽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삐라가 연일 뿌려지는 등 선거관계 공무원들을 위협하는 각종 유인물들이 나돌았다. 4월27일에는 한림에서 선거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공무원들이 신엄리에서 습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해 공무원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김익렬-김달삼 평화협상, '오라리 방화협상'으로 결렬

이러한 가운데 4월28일 토벌대의 제9연대장 김익렬(金益烈) 중령과 이윤락(李允洛) 중위, 무장대의 김달삼(金達三)과의 협상이 안덕면 구억국민학교에서 이뤄져 사태는 일시 진정되는 듯 싶었다.

김달삼은 미군의 철수와 악질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추방, 제주도민에 의한 경찰 편성 전까지 경비대의 치안 수행. 4.3의거 참여자에 대한 신분보장 등을 요구했으며 김 중령은 무장대의 무장해제와 귀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흘 뒤인 5월1일 오라리 연미부락에서 10여채의 민간 가옥에 대한 방화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청년단과 무장대가 서로 상대방의 방화사건으로 몰아붙임으로써 모처럼 진정국면을 보였던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선거를 닷새 앞둔 5월5일 오후 5시 제주도의 비상한 움직임을 더 이상 좌시 할 수 없었는지 미군정장관인 윌리엄·F·딘 소장이 급거 내도했다. 안재홍 민정장관과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宋虎聲) 국방경비대 사령관이 수행했다.

딘 소장은 다음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어제 일행과 함께 제주도를 시찰하고 폭동사태를 여러 각도에서 검토 조사해본 결과 제주도이외의 지역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 위협에 의해 잘못 인도된 일부 청년들이 선거담당 공무원과 경찰관, 선량한 애국적 도민들을 살해하고 방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불원간 완전히 평정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익렬 중령 "폭동은 경찰의 과잉진압이 원인...연대장 돌연 교체

그러나 딘 소장은 제주도 순시 중에 국방경비대와 경찰이 토벌과정에서 보이고 있는 갈등관계로 마음이 크게 언짢았다.
딘 소장은 수행하고 있는 관계관과 현지 지휘관들을 소집한 긴급대책회의를 제주농업학교에서 열었다. 이 자리에는 딘 소장을 비롯하여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대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9연대장, 최천(崔天 ) 제주감찰청장 등이 참석했다. 사회는 맨스필드가 맡았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경비대와 경찰 간부간에 서로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여 회의는 제대로 열어보지도 못한 채 양측의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처음 상황설명에 나선 최 감찰청장에 이어 등단한 김 연대장은 "폭동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에서 비롯됐다고 보이며 입산자들이 많은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경찰의 실책에 있다"고 말하고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서는 일반 민간인 가운데에 단순한 동조자를 폭도와 격리시키는 것이 우선돼야 하되, 무력진압과 선무 귀순공작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강경 진압으로 치닫고 있는 제주경찰권의 지휘권을 군대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찰의 잘못된 진압방법과 실책 등을 밝히는 증거물과 사진들을 내보임으로써 경찰을 자극시켰다.

조 경무부장은 김 연대장의 상황설명이 끝나자 바로 단상에 올라가 영어로 "김 연대장의 설명은 사실이 아니며 증거물이나 사진은 전부 허위 조작된 것으로서, 김 연대장은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주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자."라고 몰아 붙였다.

이에 격분한 김 연대장은 조 부장의 멱살을 잡는 등 회의장은 삽시간에 고함과 욕설이 오가는 난장판으로 돌변했다.

이를 지켜보던 안 민정장관은 "이게 모두 남의 힘을 빌어 해방된 때문이다."고 흐느껴 울자 딘 소장은 얼굴을 찡그린 채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자."며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이튿날 9연대장은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朴珍景) 중령으로 돌연 교체됐다.
남조선단선단정반대투쟁총파업위원회는 총선을 이틀 앞둔 5월8일 「야만적 폭압과 테러와 지옥에서 신음하기를 싫어한다면 매국노들만이 가는 투표장에 절대 가지 말라」는 내용의 호소문과 함께 남한만의 단선을 중단하라는 전단을 뿌렸다.

유해진 지사는 전 공무원을 동원하여 선거를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선거관리업무에 만전을 기울이라는 특별지시를 내리면서 투표소 관리와 경비를 철저히 설 것을 촉구했다.

5월10일 투표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투표가 실시된 당일에는 지역 향보단원들과 경찰, 우익청년단원들이 투표소마다 배치됐다. 그러나 여러 곳의 투표인 명부와 투표함이 무장대에 의해 불에 탔으며 선거담당 공무원들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전화선이 끊기거나 교량이 파괴되는 바람에 경비대가 투표함 수송을 맡기도 했다.

선거결과 북군 갑구와 을구에서는 투표인수가 모자라 선거가 무효 처리되는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으며, 남제주군 선거구에서는 입법의원 출신의 오용국(44세)이 가까스로 당선됐다.

5월20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군 갑구는 선거구 73개소중 31개소에서 투표가 실시됐으며 등록인 2만7560중 1만1912명이 투표했고, 북군 을구는 선거구 61개소중 32개소에서 투표가 실시돼 등록인 2만917명 가운데 9724명만이 투표에 참가했다. 남군은 전체 87개 선거구 중 86개소에서 투표가 실시돼 오용국이 1만6000여표로 당선됐다.

이에 따라 중앙선거위원회는 5월19일 딘 미군정장관에게 북군 갑구와 을구에 대한 선서무효선포를 건의하고 5월24일 행정명령 제22호를 발표하여 폭동으로 유권자의 과반수가 참가하지 못한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를 무효로 하고 선거법 제44조에 의해 6월23일 국회선거위원장의 지휘감독아래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재선거 역시 계속된 사회혼란으로 다시 무기 연기됐다가 5.10 선거가 실시된 후 무려 일년만인 1949년 5월10일에야 겨우 실시 될 수 있었다.

이승만 "반동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반란분자들을 소탕하라"

정부는 4.3 사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1948년 12월31일자로 계엄령을 해제했다.
이와 관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했다.
"종래 제주도 주민들은 독자적인 도민성을 보존하고 있었고, 또한 남로당 조직이 잘 돼있어서 과거에는 국군과 경찰에 적대행위를 했으나 현재는 도민의 심경의 변화가 현저하여 대체로 극히 우호적이며 도민들은 자유스럽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군경을 돕고 최근에는 국군이나 경찰에나 절대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따라서 제주도는 착착 평온리에 원상을 회복 중에 있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선거 후에도 제주도 사태가 좀체 가라앉지 않자 국방경비대와 경찰응원대를 제주에 증파하고 적극적인 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4.3 사건이 일어난지 거의 일년만인 1949년 3월10일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는 신성모 내무부장관 등을 대동하고 순시차 제주를 방문하고 육군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군인들을 위문한 후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환영대회에서 "군대는 강력한 토벌작전을 강행하고 있으니 경찰은 전력을 다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고 관공리는 물질적 정신적 모든 애로를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그 창건기에 모든 악조건을 극복한 결정(結晶)으로서 목적을 완수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발전시켜 국가의 자유를 찾고 세계평화건설을 위하여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주의 식량부족에 대해서는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곧 적절한 대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이어 李承晩 대통령의 제주방문이 그해 4월9일에 있었다.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제주를 찾은 이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 이윤영 사회부장관을 대동하고 유해진 지사 등의 영접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포로수용소를 들러 본 뒤에 도청 앞에서 열린 대통령환영대회에 참석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한라산을 구경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제일 남단인 제주도민을 보러 온 것이다. 여기에는 아직도 반도들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섭섭하다. 그러기 때문에 국방과 사회부 장관을 맞이한 군경민은 합의하여 하루속히 제주의 평화를 건설할 것을 바란다.

정부나 미국은 항상 제주에 대해 많이 근심하고 있으며 구호물자도 곧 공급할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중 제일 좋은 곳이 이곳이요, 유람지 역시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반동분자들이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또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고 있다. 순천 여수 사건 때에도 학생들이 자기 부모형제를 죽창으로 찔러 죽인 일이 있었는데 외국인은 이것을 보고 마치 귀신이나 동물과 같다고 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난립분자들이 귀순하도록 하자."

이 대통령은 귀경 후 가진 담화에서 "관민 합작으로 반란분자를 다 소탕시키고 구제책을 힘껏 준비하는 중이나 한번 숙청하고 또다시 반란분자들의 공작을 막기 어려울 것이므로 차후로는 다시 이런 분자들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니 경비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 무렵 정부에서는 4.3 사건으로 피폐된 제주지방을 재건하고 도민들에게 정부 소식을 제때에 알려 재산 무장대에 현혹되는 없도록 하는 문화계몽운동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제주읍에 방송국 설립을 계획 중에 있다고 발표하면서 국회통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일단 4.3 사건의 수습과 민생이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선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자 5월27일 유해진 지사를 해임하고 산업국장 임관호를 후임 지사로 기용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유 지사는 부임 1년1개월만에 도백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군정청이 한때 도청파업투쟁위원장을 맡아 구속된 전력을 갖고 있던 터라 매우 이외로 받아들여졌으나 미군정청은 날로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좌익에서도 호의를 가질 수 있는 중도적이면서도 제주출신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발탁한 것으로 보여졌다.

유해진 지사는 퇴임후 서울로 올라가 한독당에 관여하다가 6.25동란을 고향 삼례로 하향한 뒤에 부산 피난 중에 북한군에 붙들려 1950년 8월15일 전주형무소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