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 줌⑩] 김기덕 감독의 「빈집」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스스로 불행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 자꾸만 빈집으로 숨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후회와 빈껍데기뿐입니다. 황량하고 외로운 빈집에서 날 이끌어줄 그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합니다.”

누군가 물었다, 너는 왜 그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전단지를 돌리느냐고.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남의 집 열쇠구멍에 전단지를 부착하는 이유는 빈집을 알아내기 위해서라고. 그곳이 바로 내가 머물 하룻밤의 거처라고.

   
태석(재희 분)이 선화(이승연 분)를 만난 건 예수의 초상화가 걸린 첫 번째 집에 이어 두 번째 집. 그러나 그 집에는 호화로움만 있을 뿐 그녀는 없다. 대체 뭐가 불만이야, 뭐가 부족하냐는 남편의 집착과 소유욕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뿐, 어디에도 그녀는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호화로운 집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피폐해진 몰골로 유령처럼 살아가는 공허함뿐.

선화의 멍든 얼굴과 공허한 눈빛을 떨쳐내지 못한 태석은 다음날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간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피폐해진 그녀, 그녀는 태석을 따라나선다. 두 사람의 동행에 스며오는 조수미의 ‘Be Happy 中 카니발의 아침’. 그녀와 첫 번째 찾아간 빈집에서 태석은 사진작가 집에 걸린 선화의 누드사진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드모델?

   
태석은 그녀를 향해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어질러진 빈집을 말끔히 청소해주고, 빨래를 하고, 고장 난 것들을 고쳐주고, 화초에 물을 주고, 벽에 걸린 액자 속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 찍는 걸 빠트리지 않는다. 두 번째 찾아간 빈집에서도 마찬가지. 다만 단조로움을 벗어나려는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집의 구조다. 아파트에서 펜션으로, 펜션에서 한옥으로, 한옥에서 서민아파트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동행은 우리들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수수께끼와 같은 실마리를 암묵적인 시선으로 풀어낸 곳은 세 번째 찾아간 한옥에서.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조임에도 한옥은 또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고유의 전통을 벗어나 어떤 정서를 통해 사람의 인성이 바뀌어간다고 할까? 그 한옥에서 선화는 스타킹을 신은 발로 태화의 발등을 지긋하니 누르며 첫 키스를 나눈다.

   
그러나 그녀와의 동행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네 번째 찾아든 빈집에서 태석은 우리가 버린 우리들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만다. 어찌할 것인가? 뒷걸음질치려는 그를 붙잡아 세운 건 선화. 그녀는 각혈한 채 누워있는 한 노인의 시신과 피가 흥건한 방바닥을 말끔히 닦아낸다. 아, 그리고 보니 찾아간 집마다 더러운 것은 깨끗하게 빨아주고, 고장 난 것은 고쳐주더니 마침내 그 모든 연결고리가 죽음의 종착역에 와 있다. 그것도 우리 모두가 버린 아버지가 시신으로 누워있다.

그 아버지를 안장하고 나자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그 아들이 소리를 지른다.

“당신들 지금 남의 집에서 뭐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있냐고?”

그녀와의 동행은 여기까지다. 아니다. 한곳이 더 남아있다. 선화는 경찰서에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태석은 가야 할 곳이 한곳 더 남아 있다. 이름 대신 2904번이라는 수번으로 모든 것이 통하는 그 곳, 監獄獨房. 그는 그곳에서 그림자 지우는 법을 배운다. 침묵 속에서의 실체란 얼마나 위험한 도발이던가. 그는 그것을 본 적 있다. 3-iron 중에서 다리미로 그녀의 물에 젖은 누드사진첩을 다리면서였고, 단 한번도 그린필드를 향해 날아가지 못하는 골프공을 보면서였다. 지금은 그 마지막 차례로 수갑이 놓여있다.

김기덕표 영화 중 사뭇 다른 질감으로 다가서는 것도 이 대목에 이르러서다. 독특하면서도 생소한 저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관람객들은 너나없이 그림자를 지우고자 피나는 악전고투를 진행하고 있는 태석의 행동에 약속이나 한 듯 웃고들 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반전이란 새로운 실험정신을 통해 새로운 창을 열어 보인 탓이리라. 무단침입과 불법적인 상황이 주는 긴장감 속에 김기덕은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결합해 대사가 필요 없는 마임으로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

   
감옥을 나온 태석은 사람이 살고 있되 체온이 묻어나지 않는 그 집으로 향한다. 그 집에서 그는 “사랑해요!”라는 속삭임을 들었던가? 그 한마디를 전하는 선화의 얼굴이 밝다. 목말라하던 화초가 물을 머금은 듯 촉촉하다. 그녀의 몸은 남편과 포옹을 하고 있으나 그녀의 마음과 입술은 남편의 등 너머에 서 있는 그에게로 향한 꿈과 현실의 이 모호한 경계. 어제 밤부터 우리 집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는 남편의 예민한 촉각 속에서도 공허함뿐인 빈집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태석과 선화, 두 사람이 올라간 체중계의 눈금은 0을 가리키고, 남자는 여자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 같은 존재로 돌변한다.

그래, 사람이 살고 있으되 체온이 없는 집, 사랑이 없는 집, 영혼이 없는 집, 그 집이 빈집이 아닐까?

공허로 가득한 그 집이 바로 억새꽃이 피어나 질 때면 묻어나던 우리 모두의 빈 가슴이 아닐까?

체중계에 올라서자 저울눈금이 0에서 멈추어 있음에서 보여지 듯 단 두 마디뿐인 침묵 속에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과 잔물결의 전율,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 자꾸만 빈집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던 그녀의 독백에 이어 김기덕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빈집」의 막을 내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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