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예총 아카데미, 여홍규 교수 특강…거점지역에 수백개의 성 존재

   

귀신같은 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 을지문덕 증수장우중문시(贈隋將于仲文詩)

을지문덕은 한국 역사상 ‘살수대첩’이라는 단일전투에서 수나라 군대 30만명을 몰살시키는 등 최대의 승리를 거두고, 고구려를 수나라의 마수에서 구해낸 명장이다. 위의 시는 수나라 별동대 대장인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의 전문이다.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백만 대군을 이끌고 온 수.당나라의 침략에 고구려가 수십년간 대항할 수 있었던 원인은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이라는 대단한 장수가 있기도 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고구려가 ‘성(城)의 나라’ 때문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제주민예총 역사문화아카데미 ‘21세기 한중 역사전쟁의 현장, 고구려를 생각한다’의 4번째 강좌를 맡은 한국외국어대 여호규 교수도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22일 오후 7시 중소기업지원센터 2층에서 열린 역사문화아카데미 강좌에서 여호규 교수는 ‘성의 나라, 고구려’ 주제로 1시간 30분 동안 주제강연을 펼쳤다.

여호규 교수는 700여년간 존속했던 고구려는 영토내에 수백개의 성(城)의 존재했던 ‘성의 나라’라고 규정했다.

안시성.백암성.국내성.환도산성.요동성.평양성.오녀산성.천리장성 등 고구려에는 도성뿐만 아니라 지역의 거점지역에 산성과 평지성을 쌓아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군사.방어적 용도로 사용했다.

여 교수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시절부터 성을 쌓기 시작해 초기수도인 졸본지역의 오녀산성, 후에 국내성과 환도산성, 대성산성과 안악궁, 평양성에 이르기까지 군사방어용 성을 쌓아 왔다고 밝혔다.

   
고구려 성의 특징으로는 군사적 요지와 거점지역에 성을 쌓았고, 치성과 옹성구조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자연지형물을 이용해 쌓았다.

또한 성벽도 들여쌓기를 했고, 성문 주변에도 직각으로 쌓은 게 아니라 둥글게 돌을 쌓아 적병의 감시를 용이하게 했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수도인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평지성과 산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특징도 있다. 도읍지였던 국내성과 환도산성, 안악궁과 대성산성, 그리고 마지막 평양성도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된 형태였다.

도성에 평지성과 산성을 갖춘 이유는 다분히 군사방어용이다.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장기간 농성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산성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성에서 환도산성의 거리가 불과 2.3㎞에 불과하고, 안악궁과 대성산성은 바로 붙어있다.

582년에 완성된 평양성의 경우는 둘레가 무려 23㎞에 달하는 거대한 성으로 대동강과 보통강, 모란봉 등의 자연적 요새를 활용한 성으로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것으로 고구려의 성과 관련된 지혜가 농축됐다고 평가받는다.

여 교수는 지역거점마다 축조된 산성을 시기별로 분석해 고구려 초기에는 산꼭대기에 성을 쌓은 ‘산정식 산성’, 4세기 이후 중앙국가체계를 갖추고 주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후에는 산등성이에 쌓은 ‘산속식 산성’, 5세기에는 평지와 계곡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포곡식 산성’을 쌓았다고 밝혔다.

산정식 산성의 대표적인 것들이 오녀산성과 환도산성이며, 산속식 산성은 백암성, 포곡식 산성은 안시성, 변우산성 등이 있다.

산성이 자리잡은 곳은 전략적 거점지역이고, 산지지형이기 때문에 수원(水源)이 풍부한 곳에 위치했다. 오녀산성과 환도산성에서 발견된 유적들에서는 가옥터와 온돌, 그리고 수백개의 자연발생 연못이 발견됐다.

여 교수는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졸본지역의 오녀산성과 집안지역의 국내성.환도산성의 유적들을 동북공정이 시작된 이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작업을 엄청나게 잘해 놓았다고 말했다.

여 교수는 “오녀산성의 경우 우리나라의 유적 발굴과 복원에 비해 정말 얄미울 정도로 복원을 잘 해 놓았다”며 “국내성이 있던 집안지역도 ‘중국역사문화명승’이라고 입구에 써 놓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 교수는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평양성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미군의 폭격에 의해 고구려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여 교수는 “왕과 귀족은 도성, 지방의 거점지역과 방어지역에 산성과 평지성을 쌓은 고구려는 성(城)을 예술로 끌어올린 고대국갚라며 “이런 성이 있었기에 고구려가 수많은 왕조가 들어섰다 사라졌던 만주지역의 패자로 군림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왜 수당이 수백만 대군을 이끌고 산성을 정복하려 했느냐는 질문에 여 교수는 “거점 요충지역에 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나라의 황제 양제가 직접 백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점령에 나서 실패한 이유는 고구려의 성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여 교수는 “수양제가 고구려의 관문인 요동성과 백암성을 쳐부수지 못하자 우중문.우중술 형제에게 별동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치기 위해 직접 나섰지만 을지문덕이 퇴각전술로 보급로를 끊긴 채 평양근처까지 왔다가 요충지역에 있던 주변 성으로부터 반격을 우려해 퇴각하다 살수에서 대패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당나라의 태종은 수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요동지방에 있던 성을 각개격파하는 작전을 쓰다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 의해 저지당해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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