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의원, 국사교과서 변천사 자료집 펴내

제주4.3은 소위 문민정부라 하는 김영삼 정권까지 ‘무장폭동’이라는 반체제적 평가를 받아오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폭동’의 굴레를 벗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 같은 평가는 국사교과서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정권의 변화에 따라 제주4.3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전대협 의장을 지낸 열린우리당 이인영(교육위원회) 의원이 한국 근현대사 쟁점에 대한 1차~7차 국사교과서 비교 분석 자료집 ‘당신들이 지난 정권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를 펴냈다.

특히 이 자료집에는 제주4.3이 정권의 변화에 다라 어떻게 국사교과서에 서술 돼 있는지를 분석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자료집에 따르면 1948년 발생한 제주4.3에 대해 1차 교육과정(56년)과 박정희 정권당시인 70년 2차 교육과정으로 동아출판사에서 펴낸 검정교과서 모두 4.3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72년 발간된 ‘시련과 극복’에 “공산당들은 제주도 폭동, 여순반란 사건 등을 일으켜 동족 상쟁의 참극을 빚기도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당시 3차 교육과정으로 76년 문교부 발간한 국정교과서에서부터 4.3에 대한 역사에 실리기 시작했으나 짤막하게 ‘반란’으로만 서술 됐다. 

3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에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에서의 폭동과 여수·순천에서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로 기술 됐으며, 이 같은 표현은 79년 국사편찬위가 펴낸 제1종 교과서에도 똑 같은 내용으로 고스란히 실렸다.

4.3이 교과서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된 것은 전두환 정권부터였다.

82년 4차 교육과정으로 국사편찬위가 펴낸 제1종 교과서는 “남한의 공사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 폭동사건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제주도 폭동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아래 제주도에서 공산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 공산당들은 도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후 우리나라는 군경의 활약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고 서술했다.

4.3을 무장폭동으로 평가한 것은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였으나 소위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염원을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은 4.3의 북한 사주설과 함께 국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남한 교란작전으로 평가했다. 도 공산당들이 살인과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며 ‘4.3=무장폭동’의 근거를 제시했다.

노태우 정권하에서는 4.3 발발의 원인을 이전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 5.10총선 교란을 위한 폭동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마찬가지였다.

5차 교육과정으로 90년 국사편찬위에서 발간된 1종 국사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그들은 제주도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을 일으켰다.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고 명시했다.

이 같은 군사정권의 시각은 소위 문민정부라고 자처해 온 김영삼 정권에까지 계속 유지됐다.

6차 교육과정으로 96년에 국사편찬위가 펴낸 1종 교과서는 “공산주의자들은 5.10 총선거를 전후해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남한 각지에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발생한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으로서,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까지도 희생되었으며, 제주도 일부지역에서는 총선거도 실시되지 못하였다.”고 기술했다.

이 교과서가 그나마 약간이라도 다른 점은 국사교과서에서 처음으로 4.3당시 ‘무고한 주민까지 희생됐다’고 언급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시각역시 4.3은 무장폭동이었다.

이처럼 무장폭동의 사실에 묶여 있던 4.3의 멍에가 벗겨진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야당 정치인 시절 이념공세와 사상탄압을 받아왔던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우러 4.3특별법에 서명,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물꼬를 텄고 ‘국민의 정부’의 이 같은 시각은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2002년 금성출판사에서 7차 교육과정으로 펴낸 검정교과서의 서술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단독정부수립에 대해 가장 격렬한 반대투쟁이 일어난 곳은 제주도였다. 1948년 4월 3일 단독정부수립반대와 미군의 즉시 철수 등을 주장하는 제주도의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들을 무장봉기하여, 도내의 관공서와 경찰서를 습격하였다.(제주도 4.3사건) 이들은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여 경찰 및 군인들과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3개 선거구 중 두 곳에서는 총선거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들 지역의 선거는 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었다. 미군정과 새로 들어선 정부는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체들을 동원하여 유격대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 만명의 제주도민들이 함께 희생됐다”

김대중 정권 실절의 국사 교과서는 우선 제주4.3을 ‘무장폭동’이 아닌 ‘무장봉기로’ 시각을 교정했다.

또 무장봉기의 원인도 ‘국정을 무너뜨리기 이해(전두환 정권)’서나 단순히 ‘5.10 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김영삼 정권)’서가 아니라 ‘단독정부수립반대’와 ‘미군의 즉시 철수 등’이라고 적시했다.

특히 미군정과 정부는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체(서북청년단)들을 동원해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 만명의 제주도민들이 희생됐다는 사실도 함께 넣었다. 즉 제주4.3이 단독정부수립반대와 미군정 철수를 요구하며 일어난 무장봉기였으나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군·경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 쟁점에 대한 각 교육과정 단계별로 국사교과서의 변천사 자료집을 펴낸 이인영 의원은 “우리나라의 역사교과서가 정권의 성격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면서 “일부의 세력이나 국가에 의해 역사가 일방적으로 해석되고, 단일한 역사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고 학생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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