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60주년] 박찬식 4.3연구소장, ‘4.3 正名대토론회’

‘4.3’ 봉기가 일어난 지 올해가 60주년이다. 1954년 저항이 완전히 궤멸된 후 4.3은 오랜 세월 동안 침묵을 지켰다. 4.19직후 잠깐 진상규명운동이 벌어졌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4.3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87년 6월 민주화항쟁과 함께 발발 40여년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됐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흘러 2008년. 4.3이 발발한지 정확히 60년이 됐다. 4.3을 직접 체험한 1세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투쟁을 벌여온 2세대에 이어 이제 4.3을 역사와 교훈, 기념대상으로 인식하는 3세대까지 이어져 왔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목전에 둔 4.3. 그러나 4.3은 아직도 ‘이름’이 없다. 우익세력은 4.3을 반란이라 폭동이라고 하고, 진보세력에선 항쟁이라고 성격을 규정한다. 예전에는 좌도 우도 아닌 중립적 입장에서 ‘사태’라고도 했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건’이라고도 했다. 보는 이에 따라 4.3 이름은 달랐다. 국가가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조사보고서를 펴내고, 4.3으로 죽어간 이들을 ‘희생자’로 인정하고, 또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건만 4.3의 성격을 명확히 말해주는 이름은 없다.

‘4.3 정명(正名)을 위한 대토론회’가 28일 오후2시 서울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제주4.3 60주년추진위와 4.3범국민회 공동주관으로 열려 4.3 성격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제주대 연구교수)는 ‘제주민중사로 본 4.3의 성격-공동체 존립을 위한 항쟁’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제주의 독립·자치·자율의 전통과 연대, 그리고 공동체가 외부의 힘에 억눌리고 파괴되어 갈 때 이에 맞서 제주의 존립(存立)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저항했던 게 4.3”이라고 정의했다. 제주4.을 민중사적으로 해석했다.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 ⓒ 제주의소리DB
◆제주4.3이 남긴 것, 그 이름의 궤적=박 소장 연구에 따르면 1948년 4.3발발직후 미군정 당국은 “폭도들의 총선거 반대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중순 이후 무장대와 미군정이 심하게 대립되자 우익언론은 ‘폭동’ 기조를 유지한 반면, 중도좌익계 신문들은 ‘소요사건’, ‘무장봉기’, ‘제주도의 항쟁’, ‘제주도 인민봉기’ 등으로 보도했다.

1948년 6~7월에 긴박했던 제주 상황이 느슨해지자, 신문과 잡지 지면에는 4.3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려는 기사들이 늘어났고, 제주 현지를 다녀간 기자들은 미군정 당국, 경찰의 입장과는 매우 다르게 4.3을 인식했다. ‘4·3사건’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붙여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또 이 시기 4. 3 관련 재판을 치렀던 법조인들은 ‘불행한 사건’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4.3을 ‘진압해야 할 반란’으로 봤다. 전쟁과 이승만 집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폭동·반란’으로 억압되었던 4·3 인식은 1960년 4.19 혁명을 거치며 다시 ‘사건’으로 환원되고, 일부에서는 ‘항쟁’을 주장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5.16 쿠데타로 좌절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4.3을 ‘항쟁’으로 보려는 의식들이 늘었지만 우익에서는 아직도 4.3을 ‘폭동’이라고 본다.

박찬식 소장은 제주4.3의 역사적 의미를 ▲저항과 순응 ▲공동체와 자존 ▲인권과 평화 ▲통일과 화합의 차원에서 재해석했다.

◆ 저항과 순응=박 교수는 제주인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고대 탐라국의 독립 경험에서부터 비롯된 ‘자율성’이 내면화됐다”고 말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자립적, 자강적 정체성으로 지속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고려이후 중앙정치에 복속되면서 중앙에 대한 순응과 함께 반발하는 사례도 빈발했으며, 반발의 정체성은 민란으로 표출되는 저항정신, 저항을 초월한 別國 의식으로 승화됐다. 박 소장은 “저항과 순응은 기존의 질서를 평화롭게 유지하려는 내재화된 제주사람의 외부에 대한 태도였다”고 해석했다.

이 정체성은 이후 외부의 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1960년대 국가독점자본 위주의 개발에 말없이 순응해 간 반면,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 정서도 느꼈다.

이와는 반대로 “저항과 순응의 의사를 표출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기회주의적 성향도 상당히 보편화됐으며, 한때 제주도 선거의 특성이었던 무소속 선호 경향은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며 “결국 4·3은 제주인의 정체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밝혔다.

◆ 공동체와 자존=박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4.3이 제주라는 작은 갇혀진 공간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으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반문했다. 박 교수는 제주4.3을 평가절하하려는 게 이념대립때문이 아니라, 제주를 변방으로만 취급해 온 한국인의 심성때문“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4·3을 ‘지역민의 정의로운 저항’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육지인에 대한 배타성으로만 해석하는 그릇된 편견에서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절하되고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타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동체적 연대감, 어려운 자연 조건을 개척해 나가는 강인함이 해방공간 한반도에서 가장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었다”며 “이런 공동체가 친일파와 우익청년단에 의해 파괴되어 나가는 지점에서 4.3이 발발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모른 채, 토벌대의 대학살이 한 공동체의 붕괴와 멸종으로 보였을 때, 오직 침략당한 공동체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거기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라며 “이런 점에서 4.3은 제주도의 특수성과 제주도민의 자존심이 담긴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 당위성이 성립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 ‘산사람’이 내걸었던 ‘반제’ 슬로건도 ‘우리끼리 잘 살아보려는 삶’을 차단시키는 외부의 규정력을 거부하는 데서 온 것”이라는 게 박 소장의 견해다.

당시 민중들은 미국의 간섭이 아니라면 자연적으로 이 땅에서 민중들의 힘에 의해 자주적인 정부을 수립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4.3기본적 대립구도는 제주민중과 미군정을 정점으로 한 외부세력”이라고 강조했다.

◆ 인권과 평화= 20세기 냉전체제하에서 제주사람들은 ‘4.3’이라는 작은 저항을 시도하다가 거대한 힘에 의해 압살되는 뼈저린 아픔을 체험한다. 4.은 단순한 인명살상이 아니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의 표현처럼 “제주도민은 다 죽여도 좋다”는 식으로 한 지역의 인간집단을 학살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박 소장은 “(조병옥 경무부장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성찰, 민족공동체로서의 동질감이 있었다면 민간인 대량 학살의 사태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신생 대한민국이 4.3을 ‘반란’으로만 여기지 않았어도 민간인 대량 학살을 가져온 초토화 작전은 실시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4.3은 국가가 국민에 대한 기본 인식이 천박함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더구나 50여 년 간,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오늘날까지 무고한 양민이 범죄자·살인약탈자·폭도·빨갱이로 기록돼야 하는 현실은 이제 그쳐져야 한다”며 “혹 실제 현실정치범이든 무장폭도이건 간에 당시 희생되었던 자들은 시대의 희생자로서 구원적 입장에서 넋을 달래주어야 할 의무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다”며 화해와 상생을 강조했다.

◆ 통일과 화합= 박 소장은 또 4.3은 통일운동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석했다. “왜곡된 분단체제로 나아가던 남북한 정치권력 및 미·소군정에 대해 민중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며 “당시 통일의 주장은 우선 5.10 단선 반대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곧 북한체제로의 통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제주민중들의 통일논리는 오히려 김구·김규식의 중도파 통일논리와 맥을 같이하며, 평화협상이 위로부터의 움직임이었다면, 4.3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박찬식 소장은 “4.3은 결국 세계 냉전구도와 한국의 분단체제가 빚어낸 사생아였으며, 미·소와 한반도의 남·북이 관련을 맺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제주섬사람들에게만 상처를 남겨 놓았다”며 “제주사람들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이념과 공권력에 휘둘린 채 국민·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4·3은 조선시대 이래 변방으로 취급되던 제주섬에 가해진 외적 폭력의 최종 결정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4.3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했던 과거 전통시대 제주민란의 전형을 그대로 드러낸다”며 “제주의 독립·자치·자율의 전통과 연대와 공동체성이 외부의 힘에 의해 억눌려 파괴되어 갈 때 제주공동체가 存立을 위해 저항했던 것이 4.3”이라고 해석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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