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귀리 마을②] 김만일, 제주 목축의 중흥기를 이루다

'말(馬)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에서도 드러나듯이, 제주는 말을 사육하기에 알맞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이 사육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시대 몽고 간섭기 이전부터 다른 지방보다 더 많은 수의 말을 길러서 조정의 수요를 감당해 왔음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 충렬왕 2년(1276년)에 원의 목마장이 제주에 설치되었다. 원나라 조정은 다루가치로 하여금 몽고말 160필을 가져다 제주에서 기르게 하였다. 그 말들은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서 방목되었다. 이 말들을 사육하기 위해 원에서는 사육 전문가인 목호(牧胡)들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에 제주의 말 사육규모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사육기술 또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 제주 경주마육성목장 조선시대 녹산장이었던 조천읍 교래리 일대에 제주 경주마육성목장이 들어서 있다. ⓒ 장태욱

몽고 간섭기 이후에도 제주 말 사육은 크게 성장하였다. 조선시대 제주인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말을 충당하였다. 이 역할들을 앞장서서 감당한 것이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과 그의 후손들이었다.

김만일(金萬鎰), 전후 후무한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은 경주 김씨 제주도 입도조 김검용(金儉龍)의 7세손으로 명종5년(1550년) 당시 정의현 의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목장을 운영하고, 그가 소요한 말의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 김만일 생가터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김만일 생가터, 4.3을 거치면서 99칸 대저택은 사라지고 없다. ⓒ 장태욱  

김만일의 헌마(獻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후인 선조 27년(1594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김만일은 제주의 다른 사마목장(개인소유의 말을 사육하는 목장)의 주인들과 같이 상경하여 조정에 말을 바쳤다고 한다.

그의 두 번째 헌마는 선조 33년(1600년)에 이루어 졌다. 당시는 조정이 전란의 와중에 구휼품 수송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김만일이 자발적으로 말 500필을 바쳤다. 

세 번째 말을 바친 시기는 광해군 12년(1620년)이다. 당시 조정은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만(万)여필의 말을 필요로 하여 김만일에게 1~2백 필을 징발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김만일은 500필의 말을 바쳐 국난극복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과시하였다.

인조5년(1627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조정은 다시 김만일에게 말을 요구하였고 김만일은 이에 응해 270여 필을 헌마했다.   

▲ 방아돌 김만일의 집에서 사용했던 방아돌이다. 생가터 마당에 남아있다.  ⓒ 장태욱

김만일 가계가 말을 통해 부와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김만일은 헌마공신(獻馬功臣)이란 호를 받았고,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를 제수 받아 당대 제주사회의 최고의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이 의귀리(衣貴里)인 것도 김만일이 당시 왕에게 높은 관직을 받고 귀한 관복을 입고 돌아왔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의귀리에는 지금도 김만일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의 무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김만일의 묘 의귀리 소재 김만일의 묘에서 경주김씨 후손들이 절을 하고 있는 모습  ⓒ 장태욱 

▲ 김만일 부모의 묘 김만일 묘 옆에는 그의 부모의 묘가 마련되어 있다. ⓒ 장태욱 

효종9년(1658년)에 이르러서는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金大吉)과 손자 여가 전마 208필을 중앙정부에 바쳤다. 그러자 왕은 제주목사 이회(李禬)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대길을 산마감목관에 임명했다. 이후 산마감목관직은 6년마다 김만일의 가문에서 천거하여 아뢰면 조정에서 임명하였다. 김만일 후손들의 감목관 세습은 고종32년(1895년)까지 218년 동안 이어졌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뭔가 남다를 점이 있다고 했다. 당시 김만일이 어떻게 많은 말을 얻을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그를 통해 당대 제주사회의 최고 권력을 누리게 되었을까?

장인정신, 뛰어난 처세술 그리고 강한 권력의지의 소유자

조선시대 선조의 7남인 인성군의 셋째아들인 이건은 광해군 복위모임에 가담했던 자신의 부친 인성군의 죄에 연좌되어 1628년 제주로 유배 왔는데, 이건은 김만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탐욕스러운 관리와 같은 경우는 진상을 빙자하여 수없이 거둬들여 모두 개인적 용도로 써버린다. 말 가운데 다소 뛰어난 것이 있으면, 번번이 삼읍 수령들이 다투어 빼앗고자 함으로 남아 날 수가 없었다. 김만일은 그 종자가 끊어질 것을 걱정하여 준마를 가려 종자를 취할 만한 것은, 혹 눈을 멀게 하거나, 또는 가죽과 귀를 찢어낸 연후에야, 그 말을 보존하여 종자를 취할 수 있었다. … 김만일은 본 섬의 정병이었다. 젊었을 때 암말 두 필을 얻고서는 정의현 경계에서 길렀는데, 그 말이 낳은 바가 많았다. 그 암말들은 두 해에 이르면 능히 새끼를 쳤고, 태어난 것은 모두 보통말보다 뛰어나고 달랐음으로 수년에 걸쳐 번식이 잘 되어 수백에 이르고 점차적으로 지금에 달한 것이다. 말을 바친 공으로 관이 부총관에 이르고 나이 80세에 죽었다.'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 중)

김만일이 말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사육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장인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김만일은 처세에도 매우 능한 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자발적으로 말 500필을 조정에 바친 점이나, 100~200필을 진상하라는 요구에 대해 500필을 바친 점에서 그의 남다른 처세술을 엿볼 수 있다.

당시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봉건사회였다. 정병 출신이었던 김만일이 왕의 명을 거역해 헌마를 거부하면 온전히 살아남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기왕 빼앗길 말을 적극적으로 헌마해서 김만일은 명분도 얻고 실리도 챙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입장에서는 '소실득대(小失得大)' 혹은 '최소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리는 비즈니스 전략이 주효했던 것이 아닐까?

▲ 조선시대 목장의 문포 조선시대 제주의 목장은 10소장과 산마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 김봉옥의 제주통사

그런 그의 강한 권력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김만일은 자신의 딸을 당시 제주에 유배 왔던 간옹(艮翁) 이익(李翼)에게 소실로 주었다는 점이다. 간옹(艮翁) 이익(李翼1579~1624)은 광해군 7년(1615년)에 대북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서 죽게 한 것과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것에 반대하는 극언극간의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던 인물이다(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李翼)과는 동명이인이다).

김만일은 당시제주 최고의 부귀를 누리고 있었다. 유배인인 이익의 입장에서는 부호 김만일 가계를 통해 유배생활의 불편함과 고단함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김만일의 입장에서는 중앙과의 인적 고리를 형성해서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가문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만일의 딸과 인연을 맺어 자식을 낳으매, 이익은 경주 이씨 국당공파의 입도조가 된다.  이익이 제주를 떠난 뒤에도 그가 남기고 간 소실과 그 자식들은 제주에 남아서 중앙 정객들의 후손이라는 상징성으로 김만일의 권력 기반을 더욱 든든히 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로지 말을 통해서 신분의 제약을 뛰어 넘은 김만일은 제주는 물론 조선 목축업의 선각자임에 틀림없다. 마침 의귀리에 거주하는 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김만일의 흔적들을 문화유적으로 정비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지방정부에서 이를 무관심하게 방치했던 것도 문화 마인드의 결핍을 보여주는사례라 할 수 있다.

▲ 동자석이 있던 자리 김만일의 묘에서 동자석이 도난되었다. 맨 처음 도난 당했을 때 후손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와서 제자리에 설치했는데, 최근에 또 도난당했다고 한다.  ⓒ 장태욱

지역주민들과 지방정부가 힘을 모아서 김만일을 역사적으로 복원하고 축산과 농업이 위기를 맞는 시기에 그의 가치가 재평가 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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