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60년의 시간여행] ① 집단학살속의 의로운 바람
'한국판 쉰들러' 김익렬·문형순·몰라구장·강계봉·고희준·장성순·방 경사

‘제주4.3평화기념관’이 개관됐습니다. 1948년 어느 봄날 한반도 남쪽 끝 제주에서 일어난 우리나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 2만5천~3만명이란 엄청난 목숨을 잃었으면서도, ‘빨갱이-빨갱이 자식’으로 몰려 일자리를 얻지 못해도 서슬 퍼런 군사정권이 무서워 아무 말도 못한 인고의 세월 60년이었습니다. 지난 세월 제주는 ‘붉은 섬(Red Island)’이었습니다. 제주도민을 피로 물들인 세력들이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4.3에 대해 “남로당의 무장 폭동이다.” “좌익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다”는 오명을 씌웠습니다. ‘제주평화기념관’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참혹한 죽음’의 그림자와 그 밑에 억눌린 ‘한(恨)’이 있습니다. 4.3은 60년 세월을 걷는 동안 스스로 인내를 배웠고, 화해와 상생을 알았습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평화의 산실이 될 것입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이 땅에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을 줄 것입니다. <제주의소리>가 ‘제주4.3평화기념관’을 통해 제주4.3 60년의 시간여행을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4.3 학살광풍에서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막았던 의인들의 선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4.3평화기념관을 한 바퀴를 돌고 2층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기면 아래층 전시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수천, 수만 명의 억울한 양민이, 좌(左)는 뭐고, 우(右)는 뭔지 아무것도 모른 할아버지, 할머니, 초등학생과 젖먹이까지 무차별 학살당한 역사 현장에서 머리카락이 쭈삣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충격을 받은 관람객은, 2층 전시관에서는 이와는 다른 진한 감동을 받는다. 분노가 가라앉고 화해와 상생을 배우게 된다.

‘의로운 사람들(righteous people)’이 들어서 있는 이 전시실은 제주4.3평화기념관이 후세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제주4.3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또 한국사회의 얽히고설킨 이른바 ‘과거사’는 어떻게 정리돼야 하는지 그 해법을 보여주고 있다.

김익렬 연대장, 문형순 경찰서장, 김성홍 몰라구장, 강계봉 순경, 서청단원 고희준씨, 장성순 경사, 외도지서의 방(方) 경사.

▲ 김익렬 연대장, 문형순 경찰서장 등 '의인관'에 전시된 7명은 '한국판 쉰들러'에 비견될 정도로, 제주4.3평화기념관이 평화와 인권교육의 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제주의소리

대량학살이라는 광풍 속에서 우리 가족만은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무런 죄 없는 이웃을 “산사람과 내통했다”며 서로 고자질해야 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현실에서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 온몸을 던졌던 의로운 사람들이다. 가해자로만 알려졌던 군과 경찰과 서청 중에서도 제주도민을 살리려 했고, 또 수백명의 양민을 학살에서 살려낸 7명의 의로운 사람들이 4.3평화기념관에 ‘의인’으로 들어서 평화기념관을 진정한 ‘평화교육장’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을 막기 위해 힘썼던 독일인 ‘쉰들러’가 있었다면 제주4.3에는 김익렬 연대장과 문형순 경찰서장이 있었다.

▲ 김익렬 연대장 ⓒ제주의소리
평화적 해결추진 김익렬 연대장=4.3무장봉기 초기, 김익렬 9연대장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무장대 진영으로 들어가 책임자인 김달삼과 4시간에 걸친 진땀나는 담판을 벌인 끝에 ‘4.28 평화협상’을 체결한 주인공이다.

4.3발발 이후 25일 만에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다’는 합의는, 평화협상을 파기하기 위한 경찰의 후원 아래 서북청년회 단원과 대동청년단원이 자행한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깨지고, 4.3은 ‘유혈’로 치닫게 된다.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협상이 깨진 후에도 ‘초토화작전’을 거부하다 미군정으로부터 해임당했다.

김익렬 연대장은 4.3과 관련된 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4.3의 진상을 밝히는 ‘4.3의 진실’이란 유고록을 남겼다. 196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쓴 그 유고록에서 그는 “4.3의 기록들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 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집필 사유를 밝혔다. 1988년 가족들에게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유고록은 1992년이 돼서야 세상에 공개된다. 김익렬 연대장이 체결한 ‘4.28평화협상’을 미군정과 우리나라 군수뇌부가 받아들였다면 2만5000명~3만명이 목숨을 잃는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한이 되는 사건이다.

▲ 문형순 경찰서장 ⓒ제주의소리
예비검속자 학살 거부 문형순 경찰서장=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은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하라는 이른바 ‘예비검속’을 전국적으로 내렸다. 제주에서도 수천명이 끌려가 대부분 집단 총살당했다. 4.3 이후 또 다시 제주사회에 불어 닥친 ‘아비규환’이었다. 모슬포 ‘백조일손’사건은 대표적 예비검속사건이었다. 당시 문형순서장이 책임지고 있는 성산포경찰서 관내 지역 주민들은 8명만 희생됐다. 독립군 출신 문형순 서장이 예비검속자를 총살할 것을 명령하는 해병대 정보참모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문 서장은 1950년 8월 30일 제주 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해군중령이 보낸 총살 독촉 명령서를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 보내며 대량학살을 거부했다.

문 서장은 이 보다 앞서 모슬포경찰서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군과 서청단원이 “식구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 산사람에게 식량이나 옷을 갖다 준 사람들에게 ‘자수하면 살려 준다”고 유도해 자수한 100여명의 주민이 끌려가 억울하게 희생당할 뻔 했으나 그의 도움으로 주민 모두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짐개동산에는 그의 공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김성홍 '몰라 구장'의 명예로운 별명=토벌대는 마을 구장(區長, 현재의 리장)들에게 주민 성향을 캐물어 학살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 김성홍 구장은 구학문을 한 유식한 분이었지만, 자신의 답변이 애꿎은 희생으로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무조건 “모른다”로 일관하며 공문조차 처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붙여진 '몰라 구장'이라는 그의 명예로운 별명은 지금도 신흥리는 물론 인근 마을에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다.

▲ 왼쪽부터 김성홍 몰라구장, 서청단원 고희준씨, 강계봉 순경. ⓒ제주의소리
강계봉 순경 공덕비 세워야"=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무차별 발포와 방화를 한 후 생존자들에게 해변마을 표선리로 소개할 것을 명령했다. 표선국민학교에 감금된 소개민들은 공포에 질린 채 생존에 몸부림쳤다. 이때 위미리 출신 강계봉 순경은 소개민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었고, 애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 가시리 주민은 "강 순경 공덕비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

무고한 희생 막은 서청 단원 고희준=서청 단원의 행패는 4.3을 발발하게 만든 한 요인일 정도로 제주도민에 대한 그들의 만행은 상상 이상이었다. ‘빨갱이 사냥(Red-Hunt)’을 한다며 제주에 내려온 그들은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 제주도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자,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서청단원 중에서도 의인은 있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평양음악학교에 다니던 고희준은 해방 후 월남해 서북청년회 단원으로서 제주도 성산포에 파견됐다. 그런데 성산포는 서청 특별중대의 가혹 행위로 연일 비명이 그치지 않은 곳이었다. 고희준은 서청 단원임에도 무고한 주민들을 살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는 후에 청주대학교 음대 교수와 한국성가작곡가 협회장을 역임했다.

장성순 경사와 외도지사 '방(方)'경사'=4.3당시 경찰이라면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게’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특히 '자수'하러 온 청년 70여명이 ‘홀치기사건’으로 총살당한 신흥리 주민들에게 경찰은 공포 대상이었다. 남원읍 하예리 출신 장성순 경사는 ‘홀치기사건’으로 신흥리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던 1949년초 남원지서 신흥리파견소 파견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 산에 갔다 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문에 부치겠다. 누가 어떻다는 식의 말을 내게 하지 말라. 나는 이제부터 일로써 모든 걸 판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차별 학살극에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북한에서 월남한 외도지서 '방 경사'는 지서주임이 주민들을 총살 할 것을 명령하자 “총이 고장 나 발사되지 않습니다.”라며 학살극을 피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참혹했던 제주4.3,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 쫒고 쫒기는 학살의 수렁에서 김익렬 연대장, 문형순 경찰서장 등의 선한 행동은 제주4.3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주의 소리'는 지난 2005년 4.3 57주년 특집으로 '화해와 상생으로' 라는 주제로 이들의 선행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특히 나치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 전당의 모범 답안으로 불리는 이스라엘 ‘야드 바셈(Yad Vashem)’ 기념관처럼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피어난 꽃’처럼 의인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함으로써 후세들에게 또 다른 교훈을 남겨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제주4.3이 가고자 하는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대인이 집단학살 당한 폴란드 ‘아우슈비츠’가 학살의 참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평화교육의 장’으로서는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제주4.3평화기념관으로서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인 셈이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국내에서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를 연구하고 있는 최호근 고려대 역사연구소 교수는 역사공원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스라엘 학생들은 아우슈비츠를 보고난 후 끝없는 적개심과 조국애에 대한 표현으로 눈물을 쏟아냅니다. 모든 학생들은 부둥켜안고 울다가, 교사의 선창에 따라 다윗왕의 별이 그려진 하늘색의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힘차게 부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단순한 여행객으로 이스라엘을 출발했던 학생들은 용사가 되어 귀환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과잉진압과 학살입니다. 이스라엘의 아우슈비츠 교육은 평화를 심어주는데 정반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인들도 아우슈비츠에서 어린 유대인 희생자들의 사진과 유품을 보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도덕적으로 정화되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념관을 나섭니다.”

▲ 7명의 의인들이 전시된 의인관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의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아우슈비츠에 대한 교훈에서 이스라엘이 새롭게 만든 게 바로 ‘야드 바셈(Yad Vashem)’ 기념관이다. 여기에는 ‘의인의 길’과 ‘의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길과 나무는 모두 유대인 학살기간 동안 아무런 조건 없이 유대인들을 도왔던 비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마련한 것이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그들의 목숨을 구했던 사람들을 추천받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열방의 의인’으로 추대하고 그들에게 기념메달을 수여한다. 야드 바셈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외국귀빈은 꼭 방문해야 하는 곳이며, 그 가운데서도 ‘의인의 길’은 모든 방문객이 우선적으로 찾는 곳이다.

일본인들이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기면서까지 유대인들에게 일본 비자를 발급해 주었던 코브노 영사 스기하라를 자랑하고, 스웨덴 사람들이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구출에 헌신했던 왈렌버그를 의인의 표상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제주4.3도 그 참혹했던 학살의 현장에서 인간의 도를 지켰던 ‘선한 이웃’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한 ‘의인관’을 마련했다는 게 평화와 인권의 교육장으로서 4.3평화기념관이 돋보이는 이유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현재 7명의 의인만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의인들을 위한 빈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 빈공간이 새로운 의인들로 가득 채워질 때 제주4.3평화기념관은 세계적인 평화기념관으로 기억될 것이다.

“만약에 죽인 사람과 죽은 사람만 기념한다면, 그곳은 결코 평화를 위한 공원이 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삶의 태도와 방향을 가르쳐준 어린시절 은사처럼, 올바른 가치기준을 몸소 보여준 의인들이 4.3기간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일입니까.(최호근 고려대 역사연구소 교수)”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을 찾고 있습니다." 

4.3평화기념관은 도민들로부터 새로운 ‘의인’을 알려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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