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60년의 시간여행] ② ‘초토화작전의 진실’ 증언
당시 사용했던 안경·만년필·망원경 등 유품도 전시

▲ 김익렬 장군이 남긴 유고록 '4.3의 진실' 원고와 안경, 만년필 등 유품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제주의소리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의로운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전시돼 있는 김익렬 연대장 패널 앞에는 상당히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유품이 전시돼 있다. 다름 아닌 ‘4.28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 연대장이 쓴 4.3 유고록 ‘4.3의 진실’ 친필 원고가 공개된 것이다.

평화냐,  유혈사태냐는 갈림길에 서 있던 ‘4.28 평화협상’을 깨고 초토화 강경작전으로 내몬 미군정과 우리 군수뇌부의 행적이 담긴 유고록 친필 원본이 세상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또 김익렬 연대장이 ‘4.3의 진실’ 유고록을 쓸 때 사용했던 몽블랑 만년필과 돋보기 안경, 그리고 4.3당시 그가 사용했던 망원경도 평화기념관에 고스란히 전시돼 김익렬 연대장의 모습을 그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 연대장의 유품은 그의 가족이 제주4.3평화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다.

김익렬 연대장은 4.3 발발 직후 현지 군지휘관으로서 4.3을 직접 체험하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장대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적으로 사태해결을 모색했던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의 화평정책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거부됐고, 초토화작전을 거부한 그는 9연대장에서 해임되는 불운을 겪었다.

‘4.3의 진실’은 김익렬 장군이 196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직후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김익렬 장군은 “제주도 4‧3사건의 발생원인이 단순히 육지인과 미군에 대한 도민의 배타정신과 미군정하의 압정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민중폭동이냐, 또는 공산이데올로기적인 폭동이냐 하는 문제에 관하여 아직까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있지 않다....제주도민 중에 중년 이상의 지식인들이나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역사의 부정확과 허위성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선조의 땅 제주도가 사상 최초로 공산반란을 일으켰다는 불명예로 더럽혀지고, 미군정 경찰의 압정에 못 이겨 살기위해 일어났던 폭동이 공산폭동으로 낙인찍히고, 또 그 당시 살해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대대로 공비의 후손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불운에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후세 사가들이나 제주도민들이 정확한 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그 당시 제주도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직책에 있던 제주 제9연대장으로 재직한 역사의 증인으로서 당시 나의 직권범위 내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다.”며 유고록 집필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김 장군은 이 원고에 대한 정리 작업을 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한채 1988년 12월 작고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앞서 가족들에게 “내가 죽은 다음에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도록 하여 역사 앞에 밝히라”고 유언을 남겼다. 제민일보4.3취재반은 1990대초 유족들로부터 이 원고 복사본을 입수해 연재를 하였고, 이는 <4.3은 말한다> 제2권 부록으로 실려졌는데, 복사본이 아닌 친필 원고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장군은 4.3의 한 가운데 서 있던 군 핵심인물로, ‘4.3의 진실’은 4.3초기의 미군정과 군‧경의 대응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역사적 사료’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은 ‘4.3의 진실’ 중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린다.

▲ 4.28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 연대장. 그가 남긴 유고록 '4.3의 진실'  친필 원고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제주의소리
  ◆도민 동향과 정치활동

“4‧3사건 발생전의 군‧관‧민의 관계는 현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미묘한 관계에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돼 전 국내는 해방의 기쁨과 자주독립의 희망에 벅차고 있었으나 제주도의 실정은 그렇지 않았다. 1946년에서 1948년 4월 3일 폭동이 발생할 때까지 도민의 표정은 일제시대나 미군정시대나 별다른 감격이나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해방과 독립은 관리나 군인들이나 관심을 가질 일이지, 우리 제주도민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일제가 미군정으로 바뀌고, 제주도에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대신 미군과 경비대 군인으로 대체되었다는 그런 단순한 감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밖의 표정은 없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도민의 감정에 대한 나의 솔직한 인상이었다.

4.3사건을 계기로 하여 야기된 격앙된 인상들만이 여러가지 기록이나 역사나 논평에 보도되고 있고, 어떤 전문가들은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고도(孤島)이므로 해방 후부터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온상지였으며 자유스럽게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공산주의의 투쟁을 위한 조직과 훈련을 하여서 4.3 공산폭등을 일으켰다는 그럴싸한 이론을 전개시키고 4.3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4.3사건 발생의 원인과 그 당시의 제주도의 도민의 실정을 전연 모르는 자들이 떠도는 유언(流言)만 갖고 창작해 만들어 낸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당시 제주도민이나 우리 민족에 대하여 용납못할 민족적 죄악을 저지른 미군정 시대 집권자들의 죄악과 과오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용자들의 작품에 지나지 않다고 나는 확언한다.

제주도는 옛적부터 걸인과 도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민심은 순박하고 정부에 잘 복종하는 전통적인 도민의 기풍을 가졌다. 범법자나 치안을 문란케하는 위험성을 가진 자는 거의 전무상태였으므로 경찰이나 행정관리 또는 군대를 번거롭게 하는 사건은 거의 없었다. 사건이라고 해야 항구나 읍내에서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싸움하는 것과 교통사고 정도였다.

이런 평온한 치안상태이고 보니 경찰관은 하는 일이 없어 한가를 달래기 위하여 백주에도 근무지를 비워놓고 술마시는 것이 예사였고, 나의 9연대도 군대가 경계하여야 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전 연대가 탄환 한 발 없는 빈총을 가지고 있어도 조금도 불안을 느끼거나 탄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 당시 서울 부산 등지에서는 치안이 확보되지 못해 야간이 되면 미군 MP나 경찰의 총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는 불안한 치안상태였고, 각지에서는 민중의 시위‧폭동,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유언비어 정치밀회 등이 난무하였었다. 그러나 여기 제주도는 다른 세계와 같은 평온한 별천지였다.

▲ 김익렬 장군은 유고록을 제주4.3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쓴다고 밝혔다. '4.3의 진실'은 4.28 평화협상이 파기된 이후 미군정의 초토화작전이 강행되는 전후를 밝혀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됐다. ⓒ제주의소리
◆ 사건발생의 근본원인

현재까지 기록된 역사나 전사(戰史)에 실려있는 제주도의 4‧3사건의 발생원인은 거의 전부가 허위 또는 막연한 추리, 그렇지 않으면 거두절미하고 무조건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기술하거나 정치적인 목적에서 고의적으로 그럴싸하게 허위날조하여 기술되고 있다.

이렇게 부정확한 사료가 금일까지 수정되고 있지 않는데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런 사료를 정확히 기록하여야 할 관(官)에서 만일 4‧3사건의 발생원인과 진상이 사실 그대로 보도되면 자기들의 과오나 죄상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역사에 영원히 남을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또 당시의 사건책임자들이 그 후 정부의 상당한 고관이 됐거나 또는 정치적 지도자로서 상당한 기간 세력을 가졌던 것이 그 원인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재(在)제주 지식인들의 무능과 무기력이다. 진상을 세세히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서 보신을 위해 덮어둔 것이다. 또 그 당시 정확한 사료의 증인이 될만한 제9연대의 장교들이 대부분 6‧25전쟁시 전사하였고 사건 진압책임 부대장인 내가 현역에 장기간 복무한 관계상 언행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음으로 해서 사료제공을 꺼렸던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최초 미군정이나 내가 판단한 폭동의 원인은 제주도에 이주하여온 서북청년단원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 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써 감정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급기야 극한의 도민폭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공산주의 이념투쟁 폭동으로는 볼 수 없었고 또 경찰력에 대항할 만한 그러한 조직이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군정의 책임자나 연대장인 나의 일치된 판단이었다.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민족적 양심에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 기록이 세상에 발표될 때는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 이 글이 빛을 보게될 지 모르지마는, 이 국토에 여하한 형태의 정부가 서든지 여하한 정당이 영도하는 정권하에서든지 한국민족의 정부라면 이들로 하여금 역사의 비판을 받게 하여 이 국토에 다시는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후손들에게 유언한다.

◆ 선무공작의 진행

나는 이 무렵 또다른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미군 고위층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제주읍내에 있는 미군 CIC에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와 있다고 지시했다. 지시한 시간에 CIC에 가 보았더니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라는 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그는 국제정세와 한국장래 문제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군인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료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한마디로 ‘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 돌아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부의 명령이니 매일같이 자기와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며 나를 붙잡아 앉히고는 다시 설득을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당신도 자기의 말만 들으면 출세도 하고 부(富)도 누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올텐데 고집만 부린다고 말했다. 인간은 뭐니뭐니해도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법이며 자기가 목적하는 행복과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출세와 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여러차례 반복하여 설득하려고 했다. 내가 초토작전을 감행하여 임무를 완료한 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한국에서 살기 어렵게 된다면 나의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가 살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미국은 황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미국생활을 소개하는 각종 잡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5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가 또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얼마가 필요하냐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 듯하는 것이었다. 요점은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고 10만 달러를 챙기고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것이다. 그런 그 자도 끝끝내 내가 반대를 굽히지 않자 마지막에는 당신이야말로 애국자이며 훌륭한 군인이라고 칭찬하면서 설득을 포기했다.

선무공작이 진전되어감에 따라 제주도는 일시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폭도들도 만행을 삼갔다. 경찰지서 습격은 계속되었지만 그것도 산발적이었다. 그들은 군대와의 교전은 극도로 회피하여 군 정찰지역내에서는 완전히 철수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귀순‧화평을 위한 회담의 교섭을 적극 진행시켜 나갔다.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을 전부 수락하고 홀로 적지에서 회담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①교전시 이외에 발생한 살인‧방화범을 제외하고는 전원 범죄 일체를 불문에 부칠 것이고 군에 귀순하면 군에서 책임지고 생명‧재산의 안전과 자유활동을 보장하겠다 ②살인‧방화자들과 기타 사람들을 구별하고 책임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살인‧방화를 저지른 장소와 일시를 기입한 명단을 작성하고, 범인들이 자진 귀순하면 관대한 처분을 할 것이며 절대로 사형이나 종신형 같은 중형에 처하지 않도록 보장한다고 했다. 김달삼은 귀순과 무장해제가 끝나고 모든 약속이 준수 이행되면 자기는 당당히 자수하여 폭동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겠으며 법정에서 폭동참가자들의 행동은 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였음을 밝히고 경찰의 압정과 만행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나는 부녀자들의 애원과 폭도들의 칭송이 뒤범벅된 환송을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하산하여 연대본부에 귀대하였다. 귀대 즉시 회담 성공을 알리고 무장을 해제시킨뒤 수용소 설치를 명령하고는 급거 제주읍으로 향하였다.

밤늦게 제주읍에 도착한 나는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일체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맨스필드 대령은 나의 성공을 대단히 기뻐하며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나의 요청에 의하여 전 경찰은 지서만 수비 방어하고 외부에서의 행동을 일절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폭도들은 약속대로 대정‧중문면 일대에서는 그 날로 즉각 전투 중지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한림‧제주읍에 이르는 일대에서도 전투를 완전히 중지해 나갔다. 다만 조천면 관내 몇 곳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으나 그것도 곧 중지되어 오래간만에 제주도는 총소리가 그치고 평온을 되찾았다.

▲ 김익렬 장군은 미군정의 초토화작전을 거부하다 9연대장에서 해임되고, 박진경 대령이 초토화작전을 시작한다. ⓒ제주의소리
◆ 귀순 방해공작

휴전 4일째 되는 5월 1일은 노동기념일인 ‘메이 데이’ 날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중산간 부락 오라리(吾羅里)에 정체불명의 일단(一團)이 습격하여 부락민을 죽이고 부락을 방화하는 난동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두고 경찰은 공산폭도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폭도들은 경찰이 서북청년들을 시켜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군정장관과 나는 경찰의 소행으로 심증을 굳혔다.

맨스필드 대령은 이 모든 것들을 경찰들에 의한 귀순방해 공작으로 판단하고 나에게 “경찰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하고 특히 나의 신변안전에 유념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경찰의 방해공작이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자기도 확실히 모른다며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용의 요점은 수일내에 귀순작업이 종료되어 폭도진압이 끝나게 되면 경찰과 경무부장 조병옥씨와 그 추종자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약 1개월 전 호언장담하고 제주도폭동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공안국장 김정호씨가 진두지휘하여 토벌을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폭도진압은 고사하고 경찰은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패전의 연속으로 육지에서 파견되어 온 대부분의 경찰관들은 무기를 버리고 흩어져 제주도 각지 항구에서 밀선(密船)을 타고 육지 자기 고향으로 달아나 버린 반면에 폭도는 수천인지 수만인지 모를 숫자로 증가되고 토벌나간 토벌대가 폭도들에 무기공급원이 되고 말았음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완전히 전의를 잃은 경찰은 토벌을 포기하고 제 2선으로 후퇴하고 경비대가 폭동진압의 책임을 지게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서울의 정계에 알려지고 미군정청에 상세히 알려지면 조병옥씨의 입장이 난처하여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제주도 현지 경찰의 허위 보고만 듣다가 대세의 판단을 그르쳤고 그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였을 적엔 때는 이미 늦어버렸던 것이다. 폭동이 신속하게 진압되어 뒤처리 문제로 들어가 폭동발생의 원인이 밝혀지고 초토작전의 진상이 탄로되면 그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하여지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조병옥씨 일파는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서는 화평‧귀순공작을 방해하고 폭동을 재연시켜 자기들이 주장해온 공산폭동으로 조작하는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방해공작을 극비리에 제주도 현지 경찰에 내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귀순공작의 성공으로 제주도 전역에 전투가 종식되고 완전진압이 눈 앞에 보이던 중 경찰의 방해공작과 귀순 폭도들의 잇단 피살로 폭동이 재연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만다. 당황한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은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현지에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제주읍에 비래(飛來)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나와 함께 회의 준비를 하였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사전에 나에게 자기들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고(딘 장군이 자기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강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차후 대책과 작전을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3인은 회의에 내놓을 일체의 증거물과 사진첩을 준비하였다(당시 9연대는 사진자료와 그런 자료를 만들 시설이 없었으나 미군정에서 수집 작성한 앨범이 있었다).

회의는 5월 5일 12시에 개최되었다. 장소는 제주중학교의 미군정청 회의실이었다. 참가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이었다. 이상 9명이 참가한 회의는 극비에 부쳐졌다.

경찰을 대표하여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씨가 상황설명과 건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송호성 장군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은 연대장이 자기보다 잘 아니 연대장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송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 내용과 건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간의 마찰이다.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실제 무장한 인원은 3백명 이내로 보며 나머지는 여러가지 불가항력으로 인한 동조자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①적의(敵意)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②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며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③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 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고와 건의가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물을 제시하겠다 하면서 준비하였던 물적 자료와 사진첩을 제시하였다. 사진첩을 보자 (사진첩에는 맨스필드 대령이 영문으로 상세한 설명을 기입해 놓았다) 딘 장군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어지며 즉석에서 나의 건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경찰을 나에게 배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첩을 조병옥씨에게 던져주면서 불쾌한 어조로 “닥터 조, 이 것 어떻게 된 일이요, 당신의 보고 내용과 전연 다르지 않소”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병옥씨는 사진첩을 두루 살피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니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우리말로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은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조병옥씨는 처음에는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우리말을 치워버리고 영어로만 떠들었다. 영어를 모르는 안재홍씨‧송호성 장군‧유해진 도지사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조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더구나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 보았다. 맨스필드 대령까지도 의외라는듯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씨에게 달려들었다.

▲ 김익렬 장군 가족이 제주4.3평화기념관에 기증한 유품. ⓒ제주의소리
◆ 최고수뇌회의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 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에도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모두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딘 장군은 “콰이엇, 콰이엇(조용히 하라)”하면서 진정하라고 명령하였다. 2~3분간의 침묵이 있은 후 딘 장군은 조병옥 씨에게 단상에 올라가 설명을 계속하라고 하였다. 조 박사는 이번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다. 딘 장군은 다시 “콰이엇”을 연발한다. 안재홍씨도 “연대장! 조용히 하시오”하고 말렸다. 송호성 장군도 고함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연대장인지 조병옥 씨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병옥 씨를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안재홍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하면서 방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음을 한참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내는 순식간에 숙연해지고 안재홍 씨의 통곡소리만 들렸다. 조병옥 씨도 연설을 중지하고 나도 욕설을 멈췄다. 딘 장군은 안재홍 씨와 조병옥 씨의 안색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영문인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이오”하고 고함을 지르듯 선언하고는 문을 열고 총총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조병옥씨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회의장에는 안재홍씨와 송호성 장군 그리고 나 3인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재홍씨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비극이오”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비행장으로 직행한 딘 장군이 두 사람에게 속히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일행은 제주에서 1박할 당초의 예정을 바꿔 딘 장군을 따라서 상경하고 말았다. 회의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못내린 채 난장판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 연대장의 교체

미군정 최고수뇌회의가 아무런 결론없이 유회된 다음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소재 연대 임시본부 겸 연락소(일제 때 금융조합 건물)에 난데없이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朴珍景) 중령이 도착하였다. 나는 최고참모의 방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후임 연대장으로 오늘 아침에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어떤 밀명 - 그것도 내가 염려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그런 밀명을 받고 왔구나 하는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출세와 보신을 위해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나는 즉각 본부 장병들을 집합시켜 연대장의 이취임식을 끝내고 나자 서둘러 상경준비를 하였다. 그런 나에게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을 통해 뜻밖의 상부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으로서 명령권을 가지고, 김익렬은 연대장의 고문이 됨과 동시에 작전지휘를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작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된다고 하였다. 참으로 비정상적인 지휘계통과 책임한계였다.

딘 장군은 박진경 중령에게 극비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제주도 전역에 대한 초토작전 명령이었다. 현지 연대장인 나와 맨스필드 대령은 절대 반대해 온 작전이었다. 초토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처형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전후(戰後) 평화시에 자기가 군정하는 영토 내의 국민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 결과는 엄청날 수 밖에 없다.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해도 그는 인도적으로 처형될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과 내가 한사코 초토작전을 반대하므로 명령으로 강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딘 장군은 자기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여줄 연대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딘 장군은 미국정부로부터 제주도 폭동의 조속한 진압을 독촉받고 있었다.

박진경 연대장은 취임식 인사 중 연대장의 통솔과 작전방침을 밝히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 실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자신의 혈통에 관한 소개가 우선 실수였다. 자기 부친은 친일파들의 정치집단이었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간부였다고 소개했다. 이 필요없는 소개를 왜 해야만 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자기는 절대로 공산주의자와는 적대관계라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②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래서라도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 다시 말해서 초토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발표였다.

어쨌든 박진경 중령과 나는 다음 날부터 토벌에 관한 상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작전에 관한 개념이 서로 달랐다. 그러니까 의견이 상통할 리가 없었다. 불과 1시간도 못되어 의견충돌이 생겼다. 박중령은 자기의 임무수행에 방해가 되니 제주도를 떠나 달라고 하였다. 나도 화가 나서 떠나달라면 떠나겠다고 내뱉고는 그 길로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마침 대기 중이던 비행기를 타고 상경하여 나는 총사령부로 직행하였다. 이것이 나와 제주도의 이별이었다. 나는 그 후 5년간을 제주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악몽같은 제주도 사건의 기억때문에‧‧‧.

◆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서울에 도착, 총사령부로 들어간 나는 송호성 사령관에게 그 후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는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하면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걱정하였다.

내가 제주도를 떠난 후 박진경 연대장은 ‘소신껏’ 폭도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토벌방법은 과거 일본군이 만주‧중국 등지의 점령지에서 유격대를 토벌했던 것처럼 양민과 폭도를 구분치 않고 폭도 출현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은 무차별 토벌하는 것이었다.

약 1개월이 경과된 후 군정장관 딘 장군은 박진경 연대장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하여 몸소 제주도에 내려가 연대장을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진급 당일 제주도 관‧민 유지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진급축하연을 열었다. 박진경 대령은 만취하여 밤늦게 연대본부의 자기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만취하여 취침 중인 그를 연대장 숙소 근무병(당번병)이 M-1소총으로 사살하고 자수하였다. 박대령은 말 한마디 못하고 즉사하고 아까운 청춘을 이렇게 끝내고 만 것이다.

◆ ‘4.3’에 대한 나의 소견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 씨나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사건 처리에 임하여 군정장관 딘 장군 이하 미국인들은 언어불통으로 정보를 오판해 결과적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실책을 저질렀고,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 씨 이하 경찰은 사건해결 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거기에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박진경 대령까지 끼어들어 사건을 원인으로부터 살펴 풀어가려고 생각지 않고 각자가 사건처리와는 거리가 먼 자기의 목적달성에만 전념하다가 대폭동화한 것이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 만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후세 국민들은 이 기록을 보고 소수의 악인들이 저지른 죄가 수만명 국민의 불행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삼기 바란다.

제주도 4.3사건에 관하여 사심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이 사건에 관련되었던 자들 중에 사건의 내막을 소상히 알 수 있었던 자는 거의 전부가 제주도민에 대하여 크건 작건 범죄적 과실을 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상을 정직하게 역사에 기록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쓰여진 4.3사건 기록을 훑어보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시 천하가 알다시피 민족적으로나 제주도민에 대하여 무죄하다. 오히려 도민들을 구출하려다 갖은 박해를 당한 사람이다. 또 사건을 정직하게 기록함으로써 이득이나 손해 볼 것도 없다. 역사는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만 후세에 참고가 되는 법이다. 허위조작된 것은 역사의 가치가 없다. 나는 이러한 정신에서 이 기록을 남긴다. 그런데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부족에서 생긴 편견일 것이다.<제주의소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