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취재] 김달삼이 사망한 정선 고양리 반론산을 찾아

▲ 안개가 반론산을 에워싸고 있다. 산은 알까. 그날의 일을.  ⓒ 강기희

김달삼.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고 제주 대정 사람이다. 그는 4.3 무장 투쟁 때 유격대 총사령관을 맡았다. 제주 4.3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4.3항쟁이 일어나던 1948년, 그의 나이는 22살(1925년 생)이었고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항일운동가였던 장인 가명 이어 받아

4.3항쟁이 일어나던 해 그는 제주 대정읍에 있는 대정중학원 사회과 교사였으며 남로당 대정면당 조직부장이었다. 그랬던 그가 4.3항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로당 제주 총책이자 군사총책이 된다. 

그가 '김달삼'이라는 가명을 쓴데에는 그의 장인 강문석이 영향을 줬다. 강문석은 항일운동가였으며 해방 직후엔 남로당 선전부장을 지냈다. 김달삼이라는 이름을 먼저 사용한 사람은 이승진의 장인 강문석이었다. 

이승진은 4.3항쟁을 앞두고 항일운동을 하던 강문석이 사용하던 김달삼을 가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본명인 이승진보다 김달삼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의 또 다른 가명은 이상길이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3년 여 남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달삼이 죽은 것은 1950년 3월 22일이다. 그는 잔설이 깔려 있던 정선군 북면에 있는 반론산에서 25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김달삼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반론산으로 갔다. 정선아라리 가락이 흐르는 아우라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며, 역사의 현장이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해가 쨍하고 떴으나 북면으로 가는 도중엔 비가 내리더니 갑작스럽게 주먹만한 우박이 쏟아졌다. 북면에 도착했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안개가 반론산의 산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1069m의 높이를 자랑하는 반론산은 빨치산의 퇴로였고, 침투로 중의 하나였다. 반론산 일대는 고양산(1151m)을 비롯해 각희산(1083m), 상정바위(1006m), 남전산(942m) 등의 높은 산들이 이어지고 있으며 북으로는 오대산, 남으로는 함백산과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 김달삼이 최후를 맞이한 반론산 가는 길. 멀리 눈이 쌓인 반론산이 보인다.ⓒ 강기희  

제주 사람인 김달삼, 정선의 반론산에서 사망

안개에 휩싸인 반론산은 엄숙해보였다. 숱한 전흔의 역사를 간직한 반론산. 아직도 탄피를 발견할 정도로 격전이 있었던 곳이 고양산과 반론산이다. 봄이 한창이라지만 반론산의 정상은 아직 눈으로 덮여 있다. 김달삼의 죽음을 확인한 것이 3월 22일이었으니 당시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제주 4.3항쟁을 이끌던 김달삼이 강원도 정선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3항쟁이 일어났던 1948년 김달삼은 이덕구에게 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그해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로당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를 탈출했다.

남한에서 1002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해주대회는 제주에서 김달삼을 비롯해 6명이 참가했다. 김달삼은 이 대회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고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그해 9월엔 김일성 등 49인으로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해주 대회에 참가한 김달삼은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미제국주의는 우리 제주도에서도 남조선 다른 지역에서와 똑같이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파친미분자 등 매국도배들에 의거하야 가진 란폭한 분활식민지 침략정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일반 인민들은 까닭없이 불법체포. 고문. 투옥 당하였습니다. 일반농민과 어민들은 강제공출과 혹독한 착취에 신음하고 있으며 일반 인민들은 무권리와 가렴주구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 김달삼의 '해주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 중에서 (1948년 8월 25일)

그는 이후 강동정치학원을 나와 1949년 인민 유격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사령관 자격으로 남한으로 오게된다. 제3병단은 병력이 증강되면서 제3군단으로 확대 개편했으며, 이른 바 '김달삼부대'로 불리워졌다. 김달삼부대는 영양 일월산의 봉화재에 지휘본부를 두고 영덕, 봉화, 태백, 울진, 청송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시기 정선을 비롯한 백두대간 지역에서는 빨치산 토벌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퇴로에 오른 김달삼부대 100여명은 1950년 3월 20일 정선군 북면 여량리에서 18km 떨어진 삼운리에서 국군 제185부대의 수색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당시 부대장은 이형근 준장이었으며, 토벌대가 반론산을 포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 제주에서 체포된 무장대원의 모습(1948.5)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사진이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사진을 찍었다. ⓒ 강기희

김달삼의 잘려진 목은 헬기를 이용해 미군정으로 공수 돼

김달삼과 전투를 벌인 부대는 제185부대 예하 336부대 2중대. 3월 21일 오후 1시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6시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어둠이 내리면서 전투는 종료되었고, 김달삼부대는 전멸했다. 

토벌대는 다음 날인 22일 새벽부터 부터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달삼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22일 오전 9시 30분. 반론산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지경리 마을에서 였다. 토벌대는 그가 소지하고 있던 권총인 모젤1호와 러시아어로 작성된 작전수첩 등을 회수하면서 그가 김달삼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정리하면 이러하다. 김달삼부대를 전멸시킨 토벌대는 김달삼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김달삼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의 증언으로는 그 무렵 강릉경찰서에 김달삼의 얼굴을 아는 이가 있었다고 한다. 즉시 그를 정선으로 오게한 토벌대는 김달삼의 시신을 찾아냈다.

김달삼임을 확인한 토벌대는 즉석에서 김달삼의 목을 쳤다고 한다. 그렇게 잘려진 김달삼의 목은 헬기를 타고 미군정으로 올라갔단다. 그때 목을 친 사람은 북면 사람. 그는 3개월 후 터진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부터 보복을 당했다고 한다.

"내가 어릴 적인데, 이 동네에서 총 싸움이 엄청났어요. 군인도 죽고 빨갱이들도 많이 죽었어요. 한참 후에야 김달삼이라는 거물이 반론산 전투에서 사살되었다는 얘길 들었어요."

어린 시절을 반론산 아래 마을인 고양리에 살았던 방아무개(70)씨의 말이다. 그의 옆집에 토벌대가 머물렀는데 빨치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와 실탄이 마당에 즐비했다고 한다.  

▲ 모습을 감춘 반론산. 마을에서 반론산으로 올라가는 길. 산은 안개를 품어 자신을 감춘다.  ⓒ 강기희

북한에서는 '영웅', 남한에서는 치를 떨게 한 빨치산 '거물'

그러나 당시 북한의 상황은 달랐다. 국제정치학자인 A.V 토르쿠노프가 지은<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구종서 역. 에디터 펴냄)에 "남한의 신문 라디오는 김달삼의 사망을 보도했으나 그는 현재 빨치산 활동을 위해 북한을 방문중"이라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가 모스크바로 보낸 전보(1950.4.10)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김달삼의 사망 사실을 인민들에게 숨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었고, 북한측으로서는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들의 사기를 고려해 김달삼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당시 제주시사는 평양 근교에 있는 애국열사릉에서 김달삼의 가묘를 확인했는데, 그의 묘비엔 '남조선혁명가'라는 비문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일을 두고 정선군지에서는 '제주 4.3사건 이래 남한 각처에서 폭동야기의 주모자로서 많은 민중을 괴롭히고 치안을 소란하게 하였던 공비 게릴라 책임자 김달삼을 정선에서 사살하고 그가 이끌던 김달삼부대는 전멸되고 말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념 전쟁이 극에 달하던 시기.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빨치산의 최고 영광이었던가. 25살의 김달삼은 토벌대의 총탄을 맞고 그렇게 죽어갔다. 북한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는 김달삼이 남한에서는 치를 떨게 했던 거물로 남았다. 

반론산은 안개에 갇혀 당시의 증언을 거부하지만 아직도 그날의 총성은 남아 있는 듯, 새 떼가 하늘로 급히 날아 오른다.  

▲ 제주 4.3 산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주민들(1948.5).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사진이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사진을 찍었다.  ⓒ 강기희

평화협정 이끌었던 김달삼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하면서 촉발된 제주 4.3사건. 수만명의 민간인이 숨져간 제주 4.3사건은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 6개월간 진행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22살의 나이에 제주 4.3항쟁의 선봉에 섰던 김달삼. 그가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외세가 판치던 대한민국의 자주를 회복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공산혁명이었을까. 60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가 꿈꾸었던 역사는 묻혀있다.

김달삼의 월북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을 두고 제주 4.3항쟁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공산 반란 사건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김달삼은 그해 4월 28일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평화협상'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이 당시 나눈 대화를 보자.

김달삼은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고 의문을 표했다. 이에 김익렬은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라고 밝혔고, 김달삼도 "나도 제주도의 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라고 밝힘에 따라 협상이 진행됐다. -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중에서

이때 합의를 본 내용은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행위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등이었다.

해방된 나라가 있되 대한민국은 없고 미군정만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 군 지프차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중인 이승만 대통령. 뒷줄은 미8군 사령관 뱉폴리트 대장과 제1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 정부기록보존소 소장 사진이며,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사진을 찍었다.  ⓒ 강기희  

제주의 아픔을 위무해야 하는 자 미국인가, 김달삼인가

김달삼과 김익렬이 합의한 평화협정을 깬 것은 제주의 우익청년단체다. 협상이 이루어진지 사흘 만인 5월 1일 우익단체는 제주시 오라리의 민가에 방화를 했던 것이다. 이른 바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방화 사건이 일어난 후 이틀 후인 5월 3일에는 미군이 총 공격을 명령함으로서 김달삼과 김익렬이 맺었던 평화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제주가 피의 섬이 된 것은 김달삼과 김익렬의 협상이 깨지면서부터이다. 그해 8월 중순 제주를 몰래 빠져나간 이가 있었으니 그가 김달삼이다. 그는 해주 대회에 참가했다가 1년 후에는 인민유격대장이 되어 남한으로 내려왔다. 제주 사람인 김달삼이 첩첩산중인 정선의 반론산에서 사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 4.3항쟁 60돌을 맞는 2008년. 제주는 여전히 잠들지 않는 섬이다. 세월이 좋아진 탓에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 덧칠하지만 제주는 아직 피 냄새가 진동한다. 한라산 자락엔 안장되지 못한 시신들의 영혼이 떠돈다.

누가 그들의 영혼을 위무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주의 검붉은 땅에 무릎꿇어 잠들지 못하고 있는 영령들에게, 힘겹게 살아남은 이들에게 사과해야 할 자 누구일까. 미국인가 아니면 김달삼인가. 

김달삼이 죽어가던 그날의 비명을 기억하고 있을 반론산은 말이 없다. 산자락에 흩뿌려졌던 피의 울음들도, 수백년 풍상을 겪었던 반론산 철쭉도, 그날의 일에 대해 증언을 거부한다. 아픈 4월이다. 

▲ 등산로 표지판. 반론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알리는 표지판. 반론산에는 천년기념물인 철쭉이 있고, 산호동굴도 있다. 가을엔 억새가 군락을 이루어 산객들이 제법 찾는다.  ⓒ 강기희 

덧붙이는 글 | <제주 4.3진상 보고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기> 등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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