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임관호 지사①]3.1투쟁위원장 전격 발탁...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발생

임관호(任琯鎬. 49세)가 제3대 도지사로 부임한 것은 4.3사건이 발발한지 50여일 지난 1948년 5월28일이었다. 임관호는 제주출신으로서 초대 도지사를 지낸 박경훈에 이어 두 번째 제주출신으로서, 박경훈 지사와 마찬가지로 해방공간에서 숱한 고초와 우여곡절을 겪었던 인물이었다.

그런지 제주도내에서도 불과 일년 전에 일어난 3.1사건때 도청 산업국장으로서 도청파업투쟁위원장을 맡았다가 구속까지 됐던 임관호의 지사 발탁은 이외로 받아들여졌다. 더구나 서열 1순위인 총무국장을 제치고 지사로 임명된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도청 총무국장은 서북청년단 테러에 의해 숨진 김두현의 후임으로 평북출신 홍순원(洪淳元)이었다.

임관호의 지사 기용에는 여러 복선이 깔려 있다고 봐야 했다. 미군정청은 당시 막강한 이북출신들의 후광을 받고 있는 타도 출신의 총무국장보다 현지출신을 지사로 임명함으로써 4.3사건으로 이반된 민심을 조기수습에 유리하다는 점과 한때 임관호가 자의든, 타의든 좌익들이 주동한 파업에 동조했던 사실들로 무장대 측과의 대화에도 용이한 점 등이 지사 발탁의 유리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또한 임관호는 제주출신 관리로서는 드물게 해방 전에 전라남도 장성군수를 역임하는 등 풍부한 행정경험도 갖고 있었다.
임관호는 제주시 용담동에서 출생, 제주북초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다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1942년에는 제주도청(濟州島廳) 권업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6.23재선거 노력 무장대에 의해 거부당해

임 지사는 부임직후 도정방침을 '치안유지 민생안정'에 두고 4.3사건으로 야기된 사회혼란을 수습하는 데에 모든 행정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행정력은 역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사회혼란으로 행정의 지휘계통은 무질서한 상태였다.

또 전임 유해진 지사 당시에 실시된 대대적인 숙정작업으로 임시 채용된 공무원들의 자질이 크게 떨어져 간단한 기안문서조차 제대로 작성하지 못해 도지사가 직접 결재하는 자리에서 수정하거나 처음부터 기안문을 작성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4.3사건과 5.10 선거로 파손됐거나 훼손된 공공건물과 민가, 절단된 전주를 복구하는 문제가 급선무였다.
이와 관련해서 최천(崔天)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은 5월27일 포고문을 발표하고 "절단된 전주 복구공사는 부락별로 출동하여 추진해줄 것과 금년도 하곡수집철폐와 하상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양민에 대해서는 관용으로 포섭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제주도비상경비사령관이 발표한 최초의 포고문으로서 하산한 양민에 대해서는 관용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에 주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임 지사는 6월23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재선거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재산 무장대에서는 재선거 역시 정면으로 거부했다.
당시 통위부(統衛部) 이형근(李亨根) 참모총장(대령)은 "제주도의 폭동은 아직까지도 진정되지 않아 경비대와 경찰이 출동, 진압에 나서고 있으나 서로 지휘명령을 받는 일이 없이 각기 작전명령을 수행하고 있고, 진압시기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앞으로 1개월후이면 현지 질서가 회복될 수 있고 재선거도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폭도들의 포로 및 귀순자의 숫자도 3126명, 사망자는 7명, 유기사체는 1구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6월5일자 조선일보 사설에서는 이 참모총장이 발표한 내용과 다른 내용을 싣고 있었다.
"통위부의 발표에 의하면 제주도의 사태는 진정되는 느낌이 있으나 포로귀순자가 3000여명이라는 숫자와 폭도측의 인원이 소문 이상으로 많다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사건 발생 후 2개월 동안에 그 많은 인원이 입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주민들의 동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제주도의 사태수습에 대해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이 전신시설복구와 하곡수매철폐, 하산자에 대한 관용포섭을 포고한 것을 보면 비상경비사령관이 행정·사법에 관한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유능한 사람으로 최고장관을 특명해야 한다."

6월12일자 서울신문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제주도 사건의 재판을 위해 내도했던 서울의 모(某) 변호사는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대개가 아무 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이었으며, 폭도와 경찰의 중간에서 희생되고 있었다고 했다. 사건해결의 근본책은 되지 못하나 제주도 출신중에서 신명있는 사람을 책임부서에 등용해야 하며, 그래야만 폭도들에게 정치적 구실을 제공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선관위원회 은신...선거인명부 탈취 방화로 절반이상 소실

이처럼 주민들은 경찰과 무장대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아무런 죄도 없이 학살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한 공공연한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행정기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으며 끼니를 제대로 잇는 주민들이 드물었다.

토벌대와 무장대간의 충돌은 계속됐다.
제주도선거위원회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재선거를 치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6월10일에 중앙선거위원회에 재선거를 다시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2郡1邑12面의 선거위원 1206명 가운데에 15명이 살해됐고 4명이 중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남제주군선거위원들은 아예 업무를 피해 은신해버리거나 후환이 두려워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또 북제주군에서는 133개 투표소에 보관중인 선거인명부의 절반 이상이 탈취됐거나 방화 등으로 소실돼 새로 작성하기가 매우 어려워 재선거의 연기가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미군정장관 딘 소장은 행정명령 제22호를 통해 "제주도의 북제주군 갑구 및 을구의 선거인들이 그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진실히 대표할 수 있는 평화롭고 혼란이 없는 선거가 되기 위해서 제주도의 재선거의 실시 시기를 무기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재선거가 유독 제주도에서만 무기연기되자 중앙에서는 진상조사반의 내도가 부쩍 늘어났다.
이인(李仁) 검찰총장은 제주도에 파견된 검찰관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제주도의 사태는 신축성이 부족한 시정방침과 관공리들의 부정부패가 주요원인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 시급한 것은 관공리의 인사개편을 단행해서 민심수습이 우선이므로, 우선 사법 행정 경찰의 3수뇌부를 바꾸되 가장 양심적이고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는 것이 한 방안이라고 생각되며, 그러면 폭도들도 구실을 만들어 하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도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가혹행위가 도민의 원성을 샀다

또한 일부에서도 이인 검찰총장이 사태의 원인을 제대로 짚은 것으로 본다는 입장이었다.
양원일(梁元一) 서울지방심리원 판사는 6월17일 보름여간의 제주시찰을 마치고 그 소요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해방 후에 사실상 정부행세를 해온 인민위원회를 도민들이 너무 과대 평가한 것.

둘째, 경찰의 가혹행위로 주민들의 인심을 잃은 것.

셋째, 우익 청년단체들이 경찰 이상의 경찰권을 행사함으로써 혹독한 짓을 자행하여 도민들의 원성을 산 것.

넷째. 관공리들이 정치를 등한히 하고 모리에만 열중함으로써 도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해온 것.

다섯째, 도민들이 타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경향이 있어서 강대한 세력에 아부하고 지위와 재산을 보전하려 한 것.

여섯째, 남북협상을 과대평가하고 이에 많이 의지해왔다는 것 등.

그러면서 양 판사는 제주도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미군정청이 제주도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여 경찰에 대한 압력을 줄이고 국방경비대를 좀더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제주도내 관공리를 재편성하고 정당·단체들을 잘 지도편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또다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하여 정국을 긴장시켰다. 6월18일 새벽 3시께 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29세)이 연대본부 숙소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 연대장은 전날 제주시내 요정 옥성정(玉成亭. 현 제주KAL호텔 앞에 위치)에서 열린 자신의 대령 진급축하연에 참석한 뒤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에 총으로 사살됐다.

이 사건은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또한 모처럼 달라졌던 제주도에 대한 중앙정부의 시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와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딘 미군정장관은 이같은 사실을 보고받자 총포연구의 권위자들을 데리고 진상조사차 직접 제주에 내려왔다. 검사결과 M1총탄이 심장과 두개골을 정확히 관통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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