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화산도 작가 재일교포 김석범 선생을 만나“제주4.3은 슬픔의 자유조차 누릴수 없었던 참극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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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4.3에 대한 진실규명에 힘을 실어온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83) 선생이 60주년을 맞은 제주4.3행사에 참여키 위해 2일 재일교포.일본인 교류방문단과 함께 제주를 찾아왔다.

1960년대 소설 ‘화산도’로 4.3의 숨겨진 진실을 끊임없이 고발해온 김석범 선생은 이날 재일교포.일본인 교류방문단과 함께 제주에 도착직 후 4.3평화공원을 찾았다. 김석범 선생은 4.3영령들의 제단에 분향한 후 <제주의소리>와 만난 자리에서 “이번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슬픔의 자유’(가제)라는 글을 쓰겠다”며 “4.3은 반세기 동안 슬픔조차 울음조차 대성통곡할 자유를 주지 않았던 참극”이라고 일갈했다.

김석범(金石範) 선생의 본명은 신양근이다. 그의 부친은 제주시 삼양동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살면서 1925년 음력8월15일에 그를 낳았다. 김석범, 그는 교포2세인 셈이다.

   
▲ 제주4.3을 다룬 '화산도'의 작가 재일교포 김석범 선생이 4.3 6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제주를 찾아왔다. 그는 4.3은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의 문제라며 이명박 대통령의 위령제 불참을 두고 "대단히 섭섭하다!"는 심경을 거듭 피력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1945년 해방직후에 서울에 와서 어릴 때부터 뜻을 두었던 문학공부를 했다. 그러다 1946년 여름, 한달 후 돌아올 예정으로 잠시 일본에 밀항했다. 짐을 모두 서울에 두고 떠났으니 김석범 선생은 고국을 등질 심산이 아니었으나 그 길로 1988년 다시 고국을 방문할 수 있을 때까지 무려 40여년을 넘게 조국이 그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오사카 간사이대학 전문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교토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공부했다. 1959년 재일 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 계열의 조선고급학교 문학교과를 담당하는 교사로 부임, 교직에 몸담기도 했다. 그밖에도 조총련 기관지‘조선신보’ 기자로, 또 ‘문학예술’지의 편집자로, ‘삼천리’지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무렵 신양근은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결심하면서 자신의 필명을 김석범이라고 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까마귀의 죽음’ ‘1945년 여름’ ‘사기꾼’ ‘밤’ ‘화산도’ 등과 조국방문기 ‘고국행’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특히 1957년 동인지에 처음 발표한 소설 ‘까마귀의 죽음’에서 김석범 선생은 제주4․3을 다루기 시작했다.

1976년 ‘화산도’를 일본 문예춘추사 발행 문예지인 ‘문학계’에 처음으로 연재한 이래 20년 만인 1995년에 2백자 원고지 3만매 분량 대하소설로 탈고하기도 했다. 역시 4.3을 생생히 다뤘다. ‘화산도’는 일본 아사히신문이 주는 권위 있는 오사라기 지로상과 마이니치 예술상 등을 수상한 대작이다.

   
▲ 83세의 노구인 그의 눈가에도 참았던 눈물이 이슬처럼 조용히 맺혔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다음은 김석범 선생과 나눈 인터뷰 요지

- 건강은 어떠신지요?
= 건강은 걱정 없어요. 이렇게 일본과 제주도를 왔다갔다 할 수 있을 정도니까. (허허 웃는다. 그 어떤 젊은이보다 눈빛은 형형(炯炯)하다)

- 이번이 몇 번째 제주도 방문?
= 정확히 세어 보진 않았지만 아마 한국방문이 이번 까지 열 번쯤되는데 두어 번만 제주도를 못 다녀갔으니까 아마 한 여덟 번째 정도 되는 것 같네. 아마 그럴 거예요. 1988년 조국이 나의 방문을 허락하기 까지 약40여 년간 한국땅을 밟지 못하다가 이후 벌써 열 번째 방문이라니...

- 올해가 4.3 60주년입니다. 감회가 어떻습니까?
= 사실은 지난해 동짓달에도 정뜨르 비행장(제주국제공항) 4.3유해 발굴현장에 다녀간 적이 있어요. 유해들을 보는 순간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더군. 눈물도 안 나오더라니까.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가자마자 나는 대성통곡으로 목놓아 울부짖었고 400자 원고지로 60장이나 거침없이 보고 느낀 것들을 써내려 갔지. 60년전 땅속에 묻혀버린 역사를 체험하는 순간 너무 충격이 큽디다.

4.3의 현실은 요즘 젊은 친구들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꿈같은 일(4.3특별법 제정, 4.3진상보고서 발행 등)들이 기적처럼 일어났고, 이제 60년을 맞았습니다. 4.3은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60년을 맞은 4.3은 국가적인 문제이자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제 이명박 정부가 4.3을 이어받아야죠. 내일 위령제에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해서 그런 뜻을 이어받아야 할 겁니다. (김석범 선생은 이 대통령이 4.3 60주년 위령제에 참석하는 줄 알고 있었다)

   
4.3위령들을 모신 위패봉안소에서 김석범 선생은 숨져간 넋들을 위로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아쉽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4.3위령제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온다고 했었잖아요. 이 대통령이 안온다니 그게 말이 돼요? (그의 눈이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못 온단 말이요. 일국의 대통령이 약속을 그리 쉽게 바꾼다니 무엇 때문이오? (계속해서 그는 기자를 잡아먹을 듯 다그쳤다) 이번에 대통령이 제주4.3위령제에 방문하지 않는다면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제주도 후보들은 다 떨어질 걸! 이 늙은이도 한국에 올땐 전날밤이면 늘 밤잠을 설치는데... 어젯밤도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다 한시간쯤 눈을 겨우 부쳤는데 정말 대단히 섭섭하오. 섭섭해!

   
▲ 4.3희생자 위패앞에서 김석범 선생은 팔짱을 낀채 가만히 상념에 젖었다.ⓒ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4.3 60주년은 제주4.3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바로잡는 의미가 있어요. 노무현 대통령도 ‘과거청산’을 중요시했는데 조금 지나친점이 있더라도 그건 수정해가면서 진척시켜나가야지요. 우리가 해방직후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들을 많이 했오. 한국전쟁은 좀 차원이 다른 문제이고, 4.3은 제주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요, 동아시아 국제적인 문제인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등 지난 정부의 지나친 점은 지나친대로 수정하면 되고 다만 그 근본정신은 훼손하면 그건 안되지요. 이명박 대통령이 최소한 4.3영령들과 유족들앞에서 묵념이라도 올려야 하는 것 아니오? 대단히 섭섭하오 (김석범 선생은 진노한 듯 정제된 표현으로서 ‘섭섭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 제주4.3을 소재로한 대작 ‘화산도’를 집필하셨는데.
= 제주도에서 4.3이 일어나자 난리판을 피해 밀항해 온 제주도 출신 일가에게서 대학생 시절에 들었던 4.3의 참상을 들었어요. 그래서 1957년 발표한 ‘까마귀의 죽음’ 이래 ‘4·3’은 나의 문학적 화두가 된 셈이오. 이어 화산도로 이어지면서 작품에서 그렸던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지켜본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2003년 4·3특별법을 통해 희생자들의 명예가 일부 회복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단히 기뻤습니다.  민족운동사적 의미를 평가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1948년 당시 절해고도의 섬은 사람을 죽여도, 아무리 나쁜짓을 해도 탄로가 안났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은 그래도 전두환 정권이 장갑차 몰고 광주로 들어가는 것을 외신이 생생히 전세계에 고발할수 있는 시대였고, 제주4.3은 국가공권력이 아무리 극악한 짓을 해도 외부에선 알수가 없었습니다. 탄로가 안났습니다.

- 4.3은 어떤 과제가 남았을까요?
생각해보시오. 4.3은 반세기동안 기억조자 죽이고 말말하고 역사를 죽여왔습니다. 이번 위령제에서 유족들은 대성통곡하고 맘껏 눈물을 흘릴수 있습니다. 이것은 슬픔의 자유이고 슬픔이 곧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4.3을 말할 자유도, 부모형제를 4.3에 잃었어도 슬퍼할 자유도 갖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지배자들은 백성들의 기억을 지우려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4.3을 기억해서도, 말해서도, 보아서도 안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죽은채, 모른채 해야 했습니다. 너무 권력이 강대해서 무서워서 도민들 스스로 기억의 자살을 시도한겁니다. 4.3의 기억은 자살이기도 하고 기억의 타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면 역사가 없어져버립니다. 기억이 없는데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까? 4.3특별법 제정이나 4.3진상보고서의 탄생은 이 때문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4.3보고서 결과 4.3학살의 가장 큰 책임은 이승만 정권과 당시 미국정부에 있다는 것이 반세기만에 밝혀졌습니다. 반세기만에 역사가 되살아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역사를 완성해야 합니다. 4.3유족들의 멍에를 우리가 완전히 치료해줘야 합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저작권자ⓒ 제주 대표뉴스 '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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