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출신 군간부, ‘中·日전략’ 이용...민간인 학살전략 채택

▲ 진실화해위 김무용 위원 ⓒ제주의소리
제주4.3에서 2만5천명~3만명이라는 대량학살이 자행된 것은 군이 이른바 ‘게릴라’는 물론 ‘민간인’까지 의도적인 공격목표로 설정해 대량 학살하는 ‘민간인 희생화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특히 국방경비대는 중국 공산당의 게릴라 전술을 분석한 유격전술을 제주4.3 ‘토벌’에 직접 사용했다는 자료가 새롭게 발굴됐다.

지금까지 군이 제주도민을 상대로 ‘초토화작전’을 감행해 대량학살을 불러온 것으로 일반화 되기는 했으나, 구체적으로 군이 어떤 전투전략을 채택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향후 ‘초토화작전’ 연구에 새지평을 넓혀줄 연구로 평가된다.

(사)제주4,3연구소 주관으로 5일 제주오리엔탈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4.3 6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마지막 날 섹션에서 진실화해위원회 김무용 위원은 ‘제주4.3토벌작전의 민간인 희생화 전략과 대량학살’이란 연구를 통해 4.3의 대량학살이 ‘작전을 펼치다 보니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 군이 게릴라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모든 지역을 섬멸하는 전술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미군정과 국방경비대는 1948년 4.3 발발 이후인 10월에 ‘제주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9연대장 송요찬이 군·경을 통합하는 작전을 지휘하면서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시작된다. 1949년 2월까지 진행되는 ‘초토화작전’에서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됐다.

미군정과 국방경비대가 제주4.3에 사용한 군사전략과 전통적인 게릴라 토벌전략을 연구한 김 위원은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서 게릴라를 상대로 펼쳐졌던 대부분의 군사작전이 제주4.3에 채택됐다”고 밝혔다.

1899~1902 보어전쟁 당시 對게릴라 작전, 이탈리아와 소련, 미국이 필리핀에서 적용했던 작전, 그리고 일본이 1940년대 북중국지역에서 채택한 이른바 ‘삼광작전’이 제주4.3 군사작전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들 작전은 게릴라와 주민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협력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으로, 게릴라가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특정지역을 포위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재산을 물리적으로 파괴하여 그 지역은 미래에도 거주 할 수 없게 하는 작전이었다.

일본군 출신 군간부, 중국공산당 유격전술 역이용, 4.3 대량학살에 적용

김 위원은 이와 관련해 당시 국방경비대가 조선사관학교 군사학교 등 초급간부들을 대상으로 군사교육교재로 발간된 ‘중공군의 유격전법 및 경비와 토벌’을 발굴, 그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중국 공산군의 유격전법을 검토 분석해 1948년 8월 발간된 이 책은 “‘제주도 소요사건’과 같이 향후 ‘불순분자’들이 절대로 시행할 유격전을 지실(知悉)하고, 실제적 행동에 대비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하는 차원에서 발간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또 “불순분자들이 ‘남조선 비적지화(匪赤化地)’의 첫 출발로 유격전을 제주도에 전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위원은 이와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도 덧붙였다.

“4.3토벌작전에 참여한 국방경비대 간부 상당수가 식민지 시대 일제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광복군과 중국군을 학살해 왔는데, 이들이 해방 후 한국군으로 들어오면서 중국공산당의 게리랄작전과 일본의 삼광작전은 익숙한 개념이었고, 결국 그들에게서 배운 중국 공산당 게릴라 전술경험을 4.3에 역이용한 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즉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군 학살에 이용했던 전술을, 이번에는 한국군으로 변신해 제주도민을 대량 학살하는 데 이용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은 또 “미군이나 군경은 그들의 작전에 ‘초토화자전’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은 초토화작전을 펼친 적이 없다고 하지만, 보어전쟁이나 필리핀 전쟁 때도 토벌부대 입장에서 자신들의 펼치는 작전을 비인간적인 작전 용어인 ‘초토화작전’이라고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다”면서 “용어의 사용여부를 떠나 방화 강제이주, 집단수용소 등 종합적으로 판단할때 제주에서 펼쳐진 작전은 ‘초토화작전’”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 김무용 위원은 미군정과 국방경비대가 제주4.3을 진압하면서 미국과 일본, 중국 등이 게릴라작전을 토벌할 때 게릴라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대량학살한 초토화전략을 그대로 적용했다고 밝혔다. ⓒ제주의소리
김 위원은 그렇다면 미군정과 군경은 왜 대량학살을 목표로 한 초토화작전, 민간인 희생화전략을 채택했을지에 대해서도 다사섰다.

그는 1948년 10월 들어 군․경의 강압적인 작전은 기존 소모전의 한계에 따른 전쟁비용 증가와 정치적 위기에 대응하는 대안 전략으로 등장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승만 체제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데 주목했다.

이승만, 체제 정당성에 흠집 낸 제주4.3 '정치적 판단'으로 대량학살 채택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사건을 유혈진압하는 과정에서 언론통제를 실시하고, 토벌작전 자체도 국회를 비롯한 정치집단의 압력을 거의 받지 않아 자연히 군사전략이나 전술적 측면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을 수반하는 군․경 토벌작전의 적합성이나 정당성 여부가 논의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측면에서 체제 수립의 정당성에 상처를 낸 제주 4.3사건의 신속한 종결을 원했으며, 이게 강압적인 군사전략의 채택으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봤다. 즉 “제주 4.3사건에 대한 군경의 강압적인 토벌작전은 정치적 수준에서 선택되고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군사작전의 정치화는 전장에서 군사적 수단과 선택에 따른 합리성을 저해하고 작전과정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이 가능케 한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에게 제주 4.3은 분열과 이념대립의 표현이었지만, 이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긴장감을 제고시켜 권력을 강화하고, 체제의 이념적 동질성과 순수성을 극대화시키는 무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여기에다 제주인이 게릴라와 연계되어 있거나 ‘제주인=적국의 국민=게릴라’라는 왜곡된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특히 4.3 진압작전 과정에서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내륙 중산간 지역은 적성지역으로 선포되었고, 여기에서 통행금지를 위반한 사람이나 거주하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되어 총살 또는 토벌의 대상이 되었는데, 대게릴라전에서 발포지구는 영토를 ‘청소’하고, 적을 파괴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이 내재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적성지역, 비적성지역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표적살인'도 감행

또 적성지역으로 선포된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지역에는 주민 밀집지역인 중산간 마을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어 한라산을 중심으로 자연부락이 자리잡고 생활공간이 형성된 제주지형에 적합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인 작전개념이었다는 게 김 위원의 분석이다.

실제로 군․경당국은 이런 문제점 때문에 실제로는 적성지역·비적성지역의 구분 없이 토벌작전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적성지역이지만 주민 거주지역인 중산간 마을만이 아니라 비적성지역, 곧 비작전지구인 해안마을에서도 학살이 발생했다는 점을 밝혔다.

강압적인 진압작전이 실시된 1948년 10월~1949년 2월 사이, 비적성지역인 해안마을(함덕리․삼양리․행원리․태흥리 1구·강정리1구·온평리·토산리·토평리·대포리·도순리·상예리·하예리·중문리·회수리·세화리·표선리)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군·경의 토벌로 희생당한 게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위원은 “일반적으로 무차별적 폭력의 희생자는 보통 장소나 주거지를 근거로 선택되기도 하고, 또는 반대편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단체의 소속 여부에 따라 표적이 되기도 한다”면서 일군은 1944년 3월 그리스에서 점령정책을 실시하면서, 파괴활동을 벌인 게릴라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거나 그가 48시간 이내에 체포되지 않을 경우, 가장 가까운 마을의 주민 3명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4.3사건 토벌작전에서도 어떤 지역이 한라산 무장대가 출현한 곳이거나 무장대 또는 ‘폭도’마을이라는 이유로 보복학살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위원은 “미군정과 군경의 이 같은 무차별적 폭력은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당국에 대한 순응을 증가시키기도 하지만, 역효과를 지니고 있다”며 무차별 폭력의 이중성을 지적했다.

폭력이 무차별적이기 때문에 어느 편을 지지하더라도 보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정부군에 협력하지도 못하고 빨치산에 합류하거나 도피하는 현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오히려 '저항·도피' 만들어...토벌전쟁 장기화 조건 만들어

1940년대 독일의 소련 점령정책 과정에서도 게릴라와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 무차별적인 보복학살 정책이 민간인들을 저항운동이나 빨치산에 합류하게 했으며, 4.3 토벌과정에서도 무차별 폭력이 협력이나 순응에 근거한 개인의 선택을 무효화시키고, 결국은 개인들이 저항이나 도피를 통하여 스스로 생존의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을 김 위원은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무차별적인 폭력은 결국 4.3 토벌 과정에서 사회적 생활공간이 적성지역과 비적성지역으로 분할되자, 입산자나 ‘폭도’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집이나 생활터전을 상실하여 돌아갈 곳이 없게 만들었으며, 이는 초토화 정책으로 갈 곳 없는 무장대나 전사들을 한라산이나 적성지역에 계속 고정시키면서 토벌전쟁이 장기화되고 게릴라 활동이 계속 유지되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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