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4.3’ 정명논쟁...60주년 국제학술회의 최대 백미
양정심 “항쟁역사 기억” vs 김종민 “아직은 시기상조”

▲ 제주4.3평화기념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이름이 없는' 백비(白碑). 4.3 60년을 맞는 오늘의 주소를 말해준다. ⓒ제주의소리
제주4.3평화기념관 출발점인 ‘역사의 동굴’을 따라 들어가면 맨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는 게 ‘백비(白碑)’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이 아무런 이름도 없이 누워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아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4.3’의 현 주소다.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이름이 그 사건의 성격을 말해준다. 그러나 1948년 4월3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만 1947년 3.1절 발포사건부터 한라산 금족령이 풀린 1954년 9월21일까지 7년7개월 사이에 제주도민 2만5천~3만명이 죽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이 사건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름’이 없다.

그동안 정치적 상황과 4.3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소요사건’ ‘무장봉기’ ‘폭동’ ‘반란’ ‘사태’ ‘사건’ ‘항쟁’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특히 그동안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을 벌여온 이른바 ‘4.3진영’에서조차 4.3이름 짓기는 평화기념관 ‘백비(白碑)’가 말하는 것처럼 ‘미완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사)제주4.3연구소가 4.3 60주년을 맞아 마련한 국제학술회의 마지막 날인 5일 제주4.3 정명(正名) 토론회가 열렸다. 정명토론회는 이미 지난 3월 39일 서울에서 4.3범국민위 주관으로 한 차례 마련된 바 있고, 이날 학술회의도 ‘4.3연구’에 대한 섹션이었으나 그동안 4.3에 대해 연구해온 전문가들이 주제발표와 토론자로 나서면서 참석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논쟁의 촉발은 3.29토론회에 이어 이날 주제발표자로 나선 양정심 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이 <‘제주4.3’에서 ‘제주4.3항쟁’>이란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이에 대해 제민일보에서 ‘4.3은 말한다’를 취재해 4.3대중화에 불을 지핀 김종민 4.3중앙위 전문위원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참석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양 연구원은 “4.3특별법은 그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진상규명운동의 성과였지만, 한편으로는 현실 정치와의 타협물이기 때문에 ‘학살’과 ‘희생’이라는 인식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고, 항쟁의 역사는 배제됐다”며 4.3진상규명운동에서 ‘항쟁’을 간과했음을 지적했다.

▲ 양정심 연구원 ⓒ제주의소리
“지금까지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의 성과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서두를 밝힌 양 연구원은 “그러나 제주4.3에는 ‘학살’과 ‘희생’ 뿐만 아니라 ‘항쟁’의 역사가 분명 존재한다”며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제주도민의 꿈이 해방 3년사와 4.3항쟁에 녹아 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지금은 빛바랜 이름이 된 어느 좌익 세력과 제주도민의 연대 속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해방 직후부터 1947년 3.1사건까지 인민위원회가 제주의 유일한 정부라고 할 정도로 제주도는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에 놓여 있었다”는 말로 제주도민과 인민위원회의 연대를 부각시켰다. 인민위원회가 해방직후 치안활동에서부터 적산관리, 자치행정기능, 교육활동을 펼치면서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대정중학원과 조천중학원 등에서는 정치경제학, 유물론 등 사회주의 이론이 교육되었고, 교사 대부분이 4.3항쟁이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양 연구원은 4.3이 항쟁이었다는 사실은 1948년 4월 3일 인민자위대(이후 인민유격대)가 기습공격과 더불어 살포한 호소문과 삐라에서 잘 나타나 있다고 강조했다. 항쟁세력은 항쟁이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는 자위적 투쟁임을 밝히는 동시에 단선저지를 통한 조국의 통일독립쟁취, 그리고 반미구국투쟁이라는 항쟁의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것은 경찰과 서청의 횡포에 맞서 싸우겠다는 도민적 울분의 토로에서 더 나아가 보다 정치적인 색채를 띤 것으로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단선단정반대투쟁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양 연구원이 ‘4.3은 항쟁이다’라고 보는 이유다.

5.10단선을 저지하기 위해 선거 실시 전부터 마을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산에 오르는 등 유격대와 일반 대중들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마을에 남아 있는 조직을 중심으로 유격대들을 여러 방면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양 연구원은 “당시 제주도민은 항쟁에 조직적으로 가담은 못했다 하더라고 따라갔다고는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따라간 것은 무조건적이 아니라, 그동안 인민위의 활동과 3.1사건 이후 과정에서 이뤄진 제주도민과 남로당의 연대라는 기초위에 이뤄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후 제주도민의 피해의식은 내면화 되었고 저항정신은 사라진 채 체제에 순응하거나 무관심한 인간형으로 바뀌었으며, 4.3진상규명도 운동세력은 현실적인 조건의 타협 속에서 학살의 측면만을 드러냈다”며 “제주4.3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학살의 초점에 맞춘 채 제주도민이 역사 속에서 항쟁의 주체로 존재했던 가정을 배제하는 것은 절반의 기억투쟁에 머무르는 것으로 ‘학살’과 ‘항쟁의 역사가 같은 무게로 등장하는 게 나머지 절반을 메우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4.3 중앙위 김종민 전문위원은 “4.3은 4.19나 5.18처럼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1947년 3.1절 발포사건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기까지 7년 7개월 동안 장기간에 걸쳐 벌어졌던 사건으로 이 기간동안 탄압과 항쟁, 그리고 대학살이라는 여러 국면들이 시기마다 펼쳐졌다”면서 “지금의 시점에서 4.3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용어는 찾지 못했다”면서 성급한 정명(正名)에 반론을 제기했다.

김 위원은 양 연구원이 인민위원회와 제주도민과의 ‘연대’를 강조한 부분에 대해 세밀한 부분까지 문제를 제기했다.

▲ 김종민 전문위원 ⓒ제주의소리

김 위원은 우선 8월 15일 해방된 후 미군은 9월 8일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제주에 미군이 상륙해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한 것은 9월 28일, 그리고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에 온 것은 11월 9일 이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김 위원은 “종전이 되고 미군 제59군정중대가 들어와 제주에 미군정이 실시될 때까지 86일간의 공백기에 제주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면서 해방 당시 도청  공무원, 경찰, 주정공장 직원, 교사, 신문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내용을 토대로 “인민위가 치안 확보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기관은 어정쩡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경찰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전까지 인민위원회가 유일한 정부였다'는 표현은 마치 인민위원회가 도청이나 읍면사무소, 경찰서 등을 접수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하는 부적절한 표현이다”고 지적했다.

또 조천중학원 교사였던 이덕구 선생도 속독법 등 일반 교육에만 전념했을 뿐 사회주의 교육은 전혀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시 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학생들의 증언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에서 오류가 있음을 밝혔다.

실제로 당시 조천중학원 중학생으로서 산에 올랐던 김민주 선생은 산에서 만난 이덕구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는커녕 “공부해야 할 놈이 왜 이런데 왔느냐”고 오히려 꾸지람만 들었다는 증언도 덧붙였다.

김 위원은 이날 학술회의 최대 쟁점인 ‘항쟁’에 대해 “항쟁은 체제변혁을 도모하는 혁명과는 다른 개념이다. 항쟁은, 예를 들자면 폭력배가 나와 내 가족에게 위해를 가할 때 처음에는 힘이 없어 맞다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뻗은 게 항쟁”이라고 표현했다. ‘항쟁’은 ‘자위적 정당방위’ 수준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또 지금까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물론 4.3의 배경에 관한 연구 성과가 많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즉, 해방 이후 제주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높은 위상과 영향력을 갖고 있음에도, 1946년 대구 10월 사건에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후 "3.1발포사건과 이에 항거한 3.10총파업, 그리고 그 후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는 검거선풍, 1948년 무장봉기 직전 발생한 3건의 고문치사사건, 4월 3일 무장봉기, 5.10선거 보이콧 등 ‘항쟁’이라는 표현만 안했을 뿐 항쟁에 관한 연구성과는 충분히 있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은 이어 “4.3당시 희생자 비율을 보면,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10명 중 9명이지만,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1명이 있다”면서 “그 무장대에 의한 희생 중에는 ‘정당방위’라고 할 수 없는 희생이 있기 때문에 ‘항쟁’이라는 표현을 하기에는 아직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에 대한 논거로 무장대에 의한 희생을 세 가지 종류로 분류했다.

4월 3일 무장봉기 초기에는 지목 살해로서 제주도민들을 탄압한 경찰과 서청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까지 살해한 경우. 두번째는 초토화작전 시기 무장대를 지원하지 않고 토벌대 편에 기울었다고 판단한 마을, 즉 표선면 성읍리, 구좌면 세화리, 남원면 남원리와 위미리 등을 습격해 무차별 학살한 경우. 그리고 세번째로는 무장대가 궤멸되는 시기로 식량을 얻기 위해 마을에 갔다가 성을 쌓고 보초를 서던 주민들을 죽였던 경우로 분류했다.

김 위원은 “첫번째 지목 살해 때, 탄압을 가한 경찰과 서청에 그치지 않고 그 가족까지 해친 것은 정당방위의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무장대의 과오”라고 지적했다.

또 두번째 무장대가 특정 마을 전체를 쓸어버린 경우와 관련  “일부 희생자는 토벌대나 경찰 앞잡이도 아니었으며, 그 중에는 오히려 무장대 지지자들도 있었는데, 단지 토벌대를 편드는 마을이라고 지목해 가리지 않고 쓸어버렸다"면서 "이러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와 유족들의 심정을 감안할 때 항쟁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은 “4.3은 7년 7개월이란 긴 기간동안 탄압과 항쟁의 국면도 있고, 또 엄청난 학살을 당한 수난의 국면도 있는데, 이를 복합적으로 하나로 뭉뚱그리는 용어는 아직까지는 못 찾았다”고 밝혔다. 그는 항쟁이란 용어에 대해 "앞으로 더 40년이 흘러 사건 발발 100년쯤 된 후, 4.3 체험자들의 개인적 기억이 아닌, 객관적 사실과 커다란 역사의 눈으로 볼 때 정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유족이 살아 있는 지금 항쟁이란 용어는 삼가 해야 한다”며 4.3을 정명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 토론회에는 참석자들의 토론도 활발히 전개됐다.

▲ 4.3 60주년 학술회의 마지막 토론회에 참석한 연구자들. 왼쪽부터 무라카미 나오코(추다주크대), 허호준 (4.3연구소) 김종민(4.3중앙위 전문위원) 박찬식(4.3연구소장) 김무용(진실화해위원) 장윤식(4.3연구소) 양정심(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 ⓒ제주의소리
양문흠 제주4.3연구소 이사는 “4.3을 항쟁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쟁’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야 하나, 이에 대한 정의는 없다”면서 “항쟁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개념으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4월 3일 뿌려진 삐라에 적혀 있는 ‘탄압이면 항쟁’이라는 표현에 대해 “이는 경찰과 서청의 횡포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단선단정에 대한 싸움은 2차적인 문제였다”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그는 “항쟁은 단선 단정, 반미운동을 의미하지만, 서청과 경찰의 횡포에 맞선 것은 지도부와 거기에 참여한 민중들이 공통적으로 나눠가졌던 것으로 4.3은 항쟁이 아니라 ‘봉기’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양정심 연구원은 “항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4.3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면을 드러내 보이자는 것으로 지금 당장 항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안 바뀌는 것은 알지만 보완적 측면도 있는 것”이라며 “이는 혼자서 4.3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게 아니라, 역사연구적으로 해석을 가하려는 부분이 있음을 이해해 달라”는 답변으로 이날 뜨거운 토론을 끝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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