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소리] 이호리 고두정씨의 사연

▲ 고두정씨가 부친께 보내온 우편엽서,김천 형무소의 주소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1999년 제주에서의 2년 반 교편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있었는데 옆집 아주머니가 나를 꼭 보자고 그랬다.

사연인 즉, 4.3때 아버지가 김천형무소에 복역 중 보내온 우편엽서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하면서 장농속에 고이 간직해 온 빛바랜 우편엽서 9매를 내어 놓았다.

첫 번째 집으로 온 편지는 자신의 부친(고병호)에게 보낸 1949년(단기 4282년) 3월 9일(3월 16일 소인)자 엽서였다. 그 엽서에 의하면, 김천 형무소의 위치는 경북 김천읍 평화동 245번지였다. 내용은 소와 말을 잘 거념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군검열관 박0 씨가 검열했다.

고두정씨는 김천형무소에 복역 중 7매의 우편엽서를 보내왔다.

▲ 소박한 희망, 소와 말을 잘 거념해 달라는 부탁
1950년 5월 22일 소인이 찍힌 엽서에는 4월 28일자로 김천에서 부천형무소로 이송되어 소양교육을 받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 엽서 속에는 "'비다밍' 두병하고....(검열삭제 두줄)..."라고, 비타민 두병을 보내달라는 부탁이 들어 있었다.

부천 형무소에서 보내온 마지막 엽서는 1950년 6월 12일에 쓴 것이었다. 여름에 입을 내복이 없다는 사연, 그러나 여름 것은 보내지 말고 겨울철 내복이나 준비하였다가 가을에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갇힌 자' 두정씨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그가 집으로 보내어 온 엽서들의 행간을 읽기 위해서 프린터를 통해서 9매 모두를 인쇄해 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나오던 것이 점점 핑크빛으로 변하더니만 핏빛으로 변하였다. 내 프린터상에 물론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아마도 잉크가 3원색 중 한 색이 모자란 모양이지만...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 부천형무소에서 온 엽서, 50년 4월 28일 이송되었다는 내용.50년 5월 22일자 소인이 찍혀 있다
두정씨는 '두견'의 피울음을 울다가 저 세상으로 갔나보다. 지금 그를 위한 위령제가 김천과 부천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제주의 소리'를 통해서 알고 있다.

이제 곧 형기를 마치면 고향 이호리에 돌아가서 소와 함께 쟁기를 몰고 농사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으라만...그는 그 해 땡볕이 쏟아지는 그 부천 형무소의 담벼락 속에서 다 못한 사연을 품고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최후 운명을 어떻게 되었을까?

▲ 비다밍 두병....부천형무소에서 온 엽서 내용
부천형무소의 위치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고천리였다. 서울과 인천사이다. 인민군이 인천형무소와 마포형무소등 옥문을 열어준 것으로 추정해 볼 때 부천형무소 수형인들도 무사탈출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발표를 하지 않았다.

인천 형무소에 복역중이던 미성년 수형인들은 인민군을 따라 낙동강 전선에까지 참전했다가 평양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다. 더러는 고향으로 피난민들을 따라 돌아왔다가 '예비검속'에 걸려서 총살당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었던 수형인들은 전주형무소로 150명 가량이 후송되고 전주형무소 수형인 1600명 처형때 제일 먼저 처리되었다(전주 형무소 형무관 이순기씨 증언).

이제 '가둔 자'들이 입을 열때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어주지도 않고 저 세상으로 한 둘씩 떠나가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 김천 형무소와 부천 형무소 옛터를 찾아 위령제를 올리고 있는 유족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올리며 이 글을 대신하여 동참합니다.

구천을 맴돌고 있는 영령들께도 '명복'을 빌 수밖에 없는 답답한 저희들의 심정을 토로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의 '명예'를 찾아 드릴 수 있는 그 날을 바라보기 위해서 '산 자'들의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이역만리에서 이도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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