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는 ‘제주 3.1 대학살’과 ‘제주 4.3 항쟁’ (1)

‘제주 4.3 항쟁’ 60주년을 맞이 하면서 <제주 4.3사건 연구소> 주최로 개최되는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다 보니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큰 사건 두 건을 대비하여 보여 주는 판화/그림을 들춰 보게 되었다.

그 하나는 미국의 ‘보스톤 대학살’이요 또 다른 하나는 ‘제주 3.1 대학살’이다.

보스톤 대학살 (Boston Massacre)이라고 불려지는 1770년 3월 5일 사건을 묘사한 Paul Revere [1735–1818, 미국의 애국자, 은가공장 (silversmith)]의 판화이다. ⓒ http://www.earlyamerica.com/review/winter96/massacre.html

리비어는 그 어느 누구 보다도 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판화를 칼라로 찍어서 보스톤 마을 사람들에게 잽싸게 팔았다. 절세의 장사꾼이요 ‘폭동 선동꾼’이었다. 그는, 대영제국의 법에 의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자인 셈이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열정적인 ‘애국자’라 불려진다.

▲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가 그린 “한국 대학살 ” (Massacre in Korea) 이다. ⓒ http://www.earlyamerica.com/paul_revere.htm

두개의 판화/그림은 구성면에서 상당히 흡사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피카소가 리비어의 판화를 보고 재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의 영감 (천재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민중을 향해 총을 겨냥하고 있는 군인들은 오른 쪽 (우파)에 서 있고

힘없는 ‘인민’들은 왼쪽 (좌파)에 서 있다. (이때 부터도 ‘우파’는 강자이고, ‘좌파’는 약자였음을 였볼 수가 있었다, 참 신기하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대목은 그 좌파가 힘이 생기면 곧 우파가 되고 또 다른 좌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는 것, 역사적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우리의 속담에 “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더 무섭다” 처럼.

이 두 판화/그림의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위에 판화에서는 영국군에 의해서 미국인들이 총격을 당하는 것이고

이제 그들의 후손들이 성장하여 세계 최강국이 되고 약소국인 한국/제주섬에 와서 정반대의 입장에서 이제 약자를 향해서 총질을 해대고 있음을 아랫 그림은 보여 주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스톤 대학살은 죠지 워싱턴과 그 동지들 (영국 입장에서 보면 ‘폭도’, 미국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요 ‘위대한 혁명가’) 을 규합하고 무장항쟁을 시작했다. ‘보스톤 대학살’에서 학살당한 총 인원은 도대체 몇 명이었나?

엄청난 민간인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 5명!. 그리고 소수의 부상자. 우발적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 5명은 또한 ‘순교자’ (martyr)라고 불리운다. 단순한 희생자 (victim)들이 아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벌어진 ‘제주 대학살’의 피학살자 숫자 6명에서 1명이 모자란다. 다수의 부상자 발생. (1947년 3월 1일 미군정하에서 제주 인민위원회 주최로 3.1절 독립운동 기념식을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약 3만명의 섬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기념식이 끝나고 각자 흩으러져 가던 군중과 군중들을 감시하던 기마 경찰관 사이에 돌발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기마 경찰이 타고 있던 말발굽에 한 어린 아이가 부상을 입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들이 어린 아이를 먼저 돌봐야 할 것 아니냐고 고함을 질렀다. 놀란 경찰은 가까운 경찰서로 향해 달렸다. 군중들은 쫓아 가면서 더 큰 소리를 질러댔다. 경찰서를 지키던 경찰들이 군중을 향해서 발포를 했다. 당시 경찰들은 미군정이 고용한 공무원들이었다. 제주에 배치된 미군정 요원들은 바로 5개월 전 ‘대구 10월 농민 항쟁’만을 기억하고 제주에서도 3.1절 기념식을 가장하여 군중이 모이면 또 다른 불가항력의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단하고 기념식 집회허가를 불허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민심이 험악해지자 미군정은 마지 못해서 집회허가를 내 주었다. 대구 10월 농민 항쟁은 1천 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진압되었다.)

보스톤 대학살에서는 상부의 명령없이 총질을 한 소수의 경비병들이 재판에서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제주 대학살에서는 미군정에 의해서 가해자들에 대한 재판도 물론 없었지만, ‘자기 방어/정당 방위’ (Self-defense)로 유야 무야 넘기려 했다. 3월 10일 제주도 내 모든 관공서, 학교, 사업체 등이 총파업에 돌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총파업은 3월 말까지 계속되어 제주도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그래도 미군정은 강경일변도로 치달았다. 수천 명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형을 받았다.

왜 당시 미군정은 ‘제주 대학살’을 재빨리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 책임자 (미군정이 고용한 한국인 경찰)를 문책하거나 처벌하여 사태를 진정시키지 않았는가?

자신들의 과거 조상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그리고 제주섬 주민들에 대한 고압적 권위주의/백인 우월주의에시 기인하였다고 필자는 본다. 그리고 제주 섬사람들의 불의에 대한 저항/투쟁 정신을 과소 평가했다. (1902년, 조선조 말기,  통칭 ‘이재수 난’이 발생했다. 당시 천주교 신도들이 권력과 유착하여 제주 섬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를 참다 못한 섬사람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재수는 대정고을 관청의 문서 배달부였는데, 섬사람들이 원성을 높았지만 아무도 앞장서서 항의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자칫 잘 못되면 ‘대역죄’로 목숨을 잃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천주교 신부는 고종의 칙령에 의해서 ‘짐과 같이 대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를 거역하면 대역죄가 된다. 이재수가 보다 못해서 나를 ‘장수’로 인정해 주고 여러 분들이 따르면 내가 나선다고 하였다. 모두 찬성, 제주 섬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위세를 떨치던 천주교 신도들이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고, 결국 이재수외 2인은 주모자로 조선 관군에 의해서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 졌다. 80년이 지난 어느 날 대정고을 사람들 후세는 그 3인의 의인을 추념하여 ‘삼의사’ 비를 마을 길 한 모퉁이에 세웠다. 추사 김정희 거적지 바로 근처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제주 섬사람들은 3.1 독립운동은 물론 ‘해녀 항쟁’등을 일으켜 외세에 항거하였다. 고려 말에는 몽고군의 침략을 받고 항거하다 최후를 맞이한 삼별초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아직도 섬사람들은 ‘몽곳놈의 자식’이라고 하면 가장 큰 욕으로 여기고 있다. 몽고는 고려를 80년간 한반도와 제주도를 지배하고 착취하였다.)

이제까지 1947년 3월 1일에 일어난 이 ‘대학살’ 사건을 아무도 ‘제주 대학살’ 또는 ‘제주 3.1 대학살’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때 희생된 6인에 대하여 아무도 ‘순교자’라고 이름하지 못하였다.

왜냐고? 왜 그럴까?

역사는 항상 강자의 손에 의해서 강자의 기억만을 중심으로 쓰여져 왔고 약자의 기억은 망각되기를 강요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역사는 뒤집어 봐야 할 경우가 너무도 많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과거 조상들의 역사, 즉 ‘미국 혁명/독립 투쟁사’를 육사 (West Point)에서나 고등교육 기관에서 배웠더라면, 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제주 3.1 대학살’에 이어지는 1948년의 ‘제주 4.3 항쟁’도 없었을 것이고 3만 명이란 희생자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이란 내란도 없었을 것이다. 더 더욱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에서의 대학살’ 및 ‘광주 대학살’도…

역사에는 ‘만약…’ (IF…)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하나 심리학에서는 꼭 짚어보고 넘어 가야할 대목이다. 왜냐면 여러 가지 선택지들 가운데서 인간은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 잡고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이리라.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 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과학이라고 정의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이와 꼭 닮았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 파괴(학살)무기를 숨기고 있다’고 기정사실화한 죠지 부시 미 대통령과 그 참모들 (소위 강경 ‘매파’)들은 전쟁이란 선택지를 골라 잡았다. 대량 학살 무기를 대량 학살 무기로 파괴하는 소위 선제공격 (preemptive attack)을 감행했다. 9.11 테러로 인한 미 정보당국의 정보수집 능력에 대한 미국인들의 비난을 잠재우기 위하여 알케이다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담 후세인을 대상으로 분노를 폭발하고 비난의 화살을 그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게 전쟁 과정에서 잘 못된 정보라는 것이 금방 들통이 났다.

부시는 잽싸게 전쟁의 목적을 ‘이라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이라고 위장 전술로 바꿔치기 했다.

그 어떤 ‘민주정부’도 총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현재 이라크 전쟁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재연 (replay)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역사를 반복할 운명에 처한다”고 미국의 시인이면서 철학자인 죠지 산타야나 (George Santayana, 1863–1952)는 이미 경고했다.

4월 3일자 뉴욕 타임즈 인터넷 판에는 ‘미국 정부가 잘 못 길을 가고 있다’는 여론이 81%에 육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인/미군들이 자신들의 불행했던 약소국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고 또 배우고 있다면 이런 끔찍한 대학살은 재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미국도 그 불쌍한 (poor) ‘남의 집 귀한 아이들’만 죽임을 당하고 있다. 3월 현재  400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미 재향군인인 케네디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은 ‘Black (흑인), Hispanic (스페인 계통 사람들), Red-neck 그리고 Minorities (소수민족 들)’이 무수히 희생된다”고 회상하였다. Red-neck은 미 남부지역 가난한 백인들에 대한 속칭.)

Military Fatalities: By Time Period

한편 침략을 당한 나라에서는 무수한 여자, 어린이, 노약자, 가난한 자들이 희생된다.

한편 이라크의 불쌍하고 힘없는 ‘인민’들은 얼마나 죽어 가고 있을까?

약1백 20만 명 이다. 미국의 유명 언론매체들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미군들만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라크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가 보다.

▲ ⓒ http://www.justforeignpolicy.org/iraq/iraqdeaths.htmlBritish polling agency in September 2007

우리는 ‘역사의 기억’ (학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고 젊은 세대들을 교육해야 한다.

▲ 이도영 편집위원 ⓒ제주의소리
이제 막 문을 연 ‘제주 4.3 평화 공원’은 우리의 가장 고귀한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간수해야 할 가치인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치는 교육의 생생한 현장이어야 한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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