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소리] 강용택 화백님의 남모른 사연--둘째 형 강중하의 죽음을 애도함

김천 이름모를 골짝기에서 뼈는 못 찾더라도, "흙이라도 혼줌 고저당 봉분이라도 몬들게..."하시던 어머님의 평생 소원을 이제 들어주시려고 유족분들 맨 앞장에 서서 가셨군요. 화보를 통해서 다시 뵙게 되는 '화백' 강용택 선생입니다. 모셔진 위패에서 둘째 형이 '강중하'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동행이 참으로 남보다 더 힘든 것이었지요.

1999년 5월 중순 경 '우리의 만남'은 정말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우리 만남을 통해서 알게된 남모를 사연을 여기에 공개합니다. 거리가 멀리 떨어진 관계로 강 화백님께 사전 양해를 구하지 못하고 글로 이렇게 올리게 된 것을 이해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큰형(강규하)은 4.3때 홍순봉(제주경찰국장) 밑에서 경찰관으로 지냈고 그의 둘째 형은 제주농업학교를 다니가가 산으로 올라가서 항쟁했습니다.

당시 제주읍내 관공서(특히 경찰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4월 3일 새벽 제주읍 근교 다리밑에 산사람들(무장대원)이 집결했는데, 둘째 형(중하)이 용택씨를 비밀리에 불렀답니다. "비상소집 명령이 내리더라고 절대로 형을 경찰국으로 출근케 하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더랍니다.

용택씨는 큰 형의 신발을 똥통에 넣어버리고 못 나가게 했답니다. (그날 '공격'은 후발대가 오지 않아 무산되었다지요.)

그리고 둘째 형은 포로가 되어 '귀순공작'에 동원되기도 합니다. 100여명의 산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처음에는 무죄로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고 김천형무소에 이감되었습니다.

형은 수형생활에서도 학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모양, 수학참고서를 보내달라고 해서 우편으로 차입하고도 했답니다.


한국전쟁이 확전되자 그는 수형인들과 함께 국군에 의해서 처형되고 맙니다. (7월 말 경으로 추정됨)

그의 어머니는 생존시에 둘째 아들의 봉분을 만들어 주려고 셋째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김천 가서 한 줌의 흙이라도 가져다 달라"고.... 그러나 지금껏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도 상당히 작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규하씨는 5.16 쿠데타 직후 서귀포 경찰서장으로 부임했고, 백조일손 공동묘역 해체와 위령비 훼손 사건 현장지휘자로 오게 되는 악역을 맡습니다. 나의 할아버지와 조우하는 기막히 사연이 있게 되었고,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강규하씨는 안덕면 '모록밭'(=상천리)출신이라는 것도...

1997년 내가 제주도로 귀향하여 교편을 잡는 동안 그의 행적을 수소문하고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강용택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내가 만나자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이 강규하씨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형이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강규하씨의 동생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손을 내밀면서 형의 잘 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면서 눈물로써 받아들였습니다.

"모슬포에 가면, (해병대) 동기들이 너의 형이 모슬포에서 불미스런 일을 했다"고 술좌석에서 들려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형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잡아떼었던 모양입니다.

서로 만나게 된 동기는 남상휘 장군(4.3당시 제주해안 봉쇄 책임자, 1년전 작고)을 뉴욕에서 찾아내어 친하게 되고 제주에 모시고 가서 유족과 언론인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게 당시 제민일보와 TV 방송에 크게 뉴스꺼리가 되었습니다 (1999년 5월).

강용택씨는 해병대 4기 출신으로 남상휘 장군 부대에서 있었고 남상휘 장군을 천주교 세례 당시 '대부'로 삼고 있었더군요. 신문과 방송에 남 장군이 제주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그이를 만나려고 수소문 끝에 나를 만나게 되었었답니다. 이미 그는 제주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막 서울로 떠나 버린 직후였습니다. 묘한 인연으로 기적같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강규하씨는 내가 강 화백을 만나기 1년 전(1998년 11월)에 육지 어느 곳에서 작고했다고 들었습니다. '형은 고향에서 말년을 보내지 못하고 외롭게 육지에서 고단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회고하더군요.

'제주의 소리'에서 김천 형무소 수형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고 하길래, "그 분에게도 같이 이번 김천 형무소 유적지 순례를 가심이 좋을 상 싶네요"라고 제안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동행했군요.

김천 형무소 수형인 유해발굴은 2003년 4월 중순 경 제가 전주 형무소 수형인 처형사건을 밝힌 직후에 이뤄졌습니다.

강 화백님! 이제 흙이라도 한 줌 놓고 봉분이라도 만들어 줍서양, 어머님의 생전 그 '소원'이 풀리게시리.

만일 화백님의 형님을 지금 내가 만난다면, 백조일손 공동묘역 위령비를 헴머로 부술 당시 형님의 심정이 어떠했던가를 헤아릴 수 있겠고 모든 행위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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