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교육의 요람이었던 귤림서원의 옛터, 오현단으로 남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옛 제주성 남문 동쪽에는 오현단이 있다. 1871년(고종8년)에 전국에 사원철폐령이 내려지기까지 이 자리에는 귤림서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현단 과거 이곳에 귤림서원이 있었다. ⓒ 장태욱 

귤림서원, 유배 정객들의 정신적 안식처

1777년 정조시해사건과 연루되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제주로 유배되었던 정헌 조정철이 귤림서원 내에 있던 우암 선생(송시열) 유허비를 보면서 남긴 시가 있다.

동성에 높이 높이 선 돌은
우옹이 옛날 적거하던 집
큰 이름 북두칠성처럼 우러러
지극한 덕 짐승과 물고기도 감동시키네
세상 어지러우면 도는 항상 굽히나
우리의 쇠퇴 허약함에서 회복되는 꿈꿔
제생의 바른 길로 향하며
귤림에서 제사 모시네.

당시 유배정객이던 조정철이 귤림서원이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는 것에 깊은 위안을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귤림서원 서원 철폐령이 내려질 때까지 제주 유생들에게 교육의 요람이었다. 지금은 오현단 내에 조그맣게 복원되었다.  ⓒ 장태욱 

이곳에 제단이 만들어진 것은 1578년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해 가락천(산지천) 동쪽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다. 1665년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경내에 장수당(공부하는 방)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682년에 충암묘와 장수당을 합해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귤림서원에는 5명 현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냈다. 5명의 현인이란 1520년에 유배된 충암 김정, 1601년 '소석유, 길운절의 난'을 수습하기 위해 어사로 파견되었던 청음 김상헌, 1534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 1614년에 유배되었던 동계 정온과 1689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을 일컫는다.

충암 김정, 기득권에 도전했던 성리학적 애민주의자

귤림서원 건립의 발단을 제공했던 충암 김정은 1507년(중종 2년)에 중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보임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주도하는 정치개혁에 참여하면서 반정공신(反正功臣)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적극 주장했다.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1519년(중종 14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김정은 조광조와 더불어 화를 당하고 금산으로 유배되었는데, 유배인의 신분으로 늙은 어머니를 문병한 것이 문제가 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1520년(중종 15년)에 제주로 이배되었다.

충암 김정 유허비 충암 김정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애초에 제단이 만들어졌다.  ⓒ 장태욱 

진도를 거쳐 제주로 들어온 김정이 제주성 동문 밖 금강사에서 1년을 지내는 동안 <제주풍토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품관으로부터 말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의 지위 높은 사람과 사귀어 … 날마다 이득만 쫒고 털끝만한 작은 연고일지라도 모두 뇌물을 보내니 염치와 의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제압하고, 거칠고 사나운 자는 어진 사람을 을러대니, 군자의 가르침이 내리지 아니함이라.

소 사육은 많이 하나, 값이 3․4정에 불과하다. 맛은 육지의 것만 못하다. 모두 산야에 길러 곡물은 먹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우스운 것은 땅이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나 소금이 나지 않은 일이다. -<제주풍토록> 중에서

당시 제주의 기후, 가옥구조, 풍속, 신앙, 관원의 횡포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제주풍토록은 16세기 제주 실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김정은 제주도 사람들의 생활을 측은히 여겨 한라산 기우제문을 지어주기도 했고, 우물을 파서 위생적인 식수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이 화근이었다. 조정의 관료들이 김정의 배소이탈 문제를 꺼내 극형에 처할 것을 왕에게 요구하니 결국 그는 왕의 명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청음 김상헌, 굽힐 줄 모르는 원칙주의자

청음 김상헌은 1601년 제주에서 소덕유, 길운절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어사로서 이를 수습하러 왔다. 김상헌은 1601년(선조34년) 9월 22일에 제주에 도착하여 이듬해 정월 24일까지 제주에 머물면서 민정을 살폈다. 그는 당시 제주 곳곳을 순회하며 민폐를 시정했고, 과거 시험을 시행하여 8명을 뽑아 전시에 나가도록 했다.

김상헌은 1601년 8월 어사에 명을 받으면서부터 이듬해 2월 상경할 때까지 일기를 상세히 기록했는데, 이를 책으로 엮은 것을 <남사록>(南傞錄)이라 한다. 

당시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제주 민중들의 생활상을 둘러본 김상헌은 자신의 일기에 "제주에 부임하는 수령에는 무관이 많고 그들은 자신의 폐단을 조정에 알린다고 여겨 유생들의 출륙을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막는다"고 기록하였다.

김상헌의 시가 적힌 비석 비석에 청음 김상헌의 시 <모흥혈>이 적혀있다. 오현단에는 이 외에 다른 현인들의 시도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 장태욱 

훗날 병자호란이 발생할 무렵 김상헌은 존명반청의 중심에 섰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이조판서였던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만들어 청에게 내주려하자 예조판서였던 김상헌이 그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그의 반청 주장이 원인이 되어 김상헌은 시 한수를 남기고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김상헌의 시조-

그 곳에서 포로 생활을 마칠 때 청의 황제에게 절을 하라는 명을 받고도 허리가 아프다며 절을 하지 않아,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서인세력에게 존경을 받아왔다. 

정의를 위해 스승과 광해군에게 저항했던 동계 정온

동계 정온은 월래 광해군의 권력기반이었던 북인에 속했다. 그런데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스승인 정인홍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그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고 결국 광해군과 그 권력 기반이었던 대북의 미움을 사서 1614년 대정에 유배되었다. 북인이면서 서인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그는 10년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 집주위에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을 쌓고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키는 형벌)되었는데, 대정현감 김정원이 적소(지금의 인성리) 마당에 서재용으로 두 칸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유배되었던 송상인, 이익 등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했다.

   
동계 정온 유허비 오현단 내에 있지 않고 보성초등학교 앞에 있다.  ⓒ 장태욱 

동계 정온이 제주를 다녀간 지 약 200년 후 제주에 유배되었던 추사 김정희는 당시 자신과 친분을 유지했던 제주목사 이원조로 하여금 동계정온비를 건립하게 했다. 그 '동계정온선생유허비'가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에 남아있다.

규암 송인수는 송시열의 종증조였는데, 1534년(중종29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조정의 허락도 없이 부임지를 떠났던 인물이다. 제주와 각별한 인연이 없던 송인수가 오현단에 배향되게 된 배경에는 송시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당 귤림서원이 들어서기 전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방이었다.  ⓒ 장태욱 

1682년(숙종 8년) 충암묘와 장수당을 합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충암 김정과 더불어 송상헌, 정온, 송인수 3인을 이곳에서 배향하도록 했다.

조선 의리학파의 거두 우암 송시열, 제주에 마지막 혼을 묻고

송시열은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전수되는 도학과 예학을 계승 발전시켜 조선 의리학파의 중심이 되었다. 당내 최고였던 송시열의 강단은 당쟁의 와중에서 노론이 우세를 점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암 송시열 유허비 송시열의 유배는 당시 유생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 장태욱

송시열은 한 때 효종의 사전(師傳 스승)을 지냈고 효종 2년에 문서에 청국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청의 압력을 받고 낙향하기도 했다. 그리고 효종의 북벌계획을 추진하는데 최일선에서 노력했다.

하지만 숙종이 즉위하자 정국은 남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비대해진 서인에 반감을 가진 숙종은 피비린내 나는 환국정치로 정국을 이끌었다. 

1689년(숙종 15년)에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원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 일파가 이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서인이 화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송시열은 기사환국에 연류되어 1689년 8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주로 유배되어 산지골에서 111일 동안 머물렀다. 유림들에게 송시열은 송자로 추앙을 받던 시절이었다. 송시열의 제주유배는 이 지역 유림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송시열이 남긴 마애명 증주벽립,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존중하라는 의마라고 한다. ⓒ 장태욱 

지금도 오현단(당시 귤림서원)에는 송시열이 제주 유생들에게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고 남긴 마애명이 있다.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것처럼 받들고 존경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송시열은 결국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갑술환국(1694년)에 송시열이 복원되자 제주도 유생 김성우가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배향할 수 있도록 상소하였다. 당시 상소문은 제주에서 유배 중이던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춘택이 썼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인 1695년(숙종 21년)부터 송시열도 이곳에서 배향되었다.

당시 귤림서원은 원장 외에 장의 1인, 유사 2인을 두고 있었으며 학생수는 1860년 기록으로는 397인이었다고 한다.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단행할 때까지 212년 동안 사학의 요람으로 제주 지역의 교육발전에 기여했다.

향현사 지역의 대표적 선비였던 고득종과 김진용의 의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오현단 경내에 있다.  ⓒ 장태욱  

서원철폐령에 의해 귤림서원이 허물어진 지 20여년 뒤인 1892년(고종 29년)에 제주 유생 김희정 등이 건의하여 서원의 옛터에 오현의 위폐를 모시고 제자를 올리니 오늘날의 오현단이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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