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리, 오름이 숨겨 놓은 보물

   
마을 입구 오름을 배경으로 바라보는 유채꽃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 장태욱

제주시내에서 동부관광도로(97번 도로)를 따라 30분 정도 차를 운전해서 대천동 사거리에 이르면 송당 마을 경계 내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대천동에서 동쪽으로 길게 뻗은 삼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6km 정도 가면 주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송당 본 마을를 찾을 수 있다.

송당리, 오름이 남겨놓은 마을

송당은 해발고도가 400m에 이르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 과수 농업을 할 수 없는 마을이다. 당오름, 높은오름, 안돌오름, 아부오름, 칡오름, 민오름, 백약이오름, 돛오름 체오름 등을 비롯해 17개의 크고 작은 오름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의 주민들은 광활한 초지와 농지를 터전으로 대부분 축산과 밭농사에 종사한다. 송당의 넓은 터전으로 인해 '구좌면의 큰 부자가 모두 송당에 있다'는 말이 나돌던 적도 있었다.
  

오름들 아부 오름 위에서 바라본 주변의 오름들이다. 아부오름은 영화 '이제수의 난'을 촬영했던 장소이다.  ⓒ 장태욱 

마을이 오름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인지, 70-80년대 제주가 겪었던 급속한 산업화의 터널도 송당을 비켜갔다. 그 때문에 송당에는 제주의 천연 자연환경과 전통 민속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송당에 있는 아부오름은 영화 <이제수의 난>을 촬영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기록에 남아있는 대로라면 송당의 설촌은 12-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씨와 김씨 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의종 당시 중시랑을 지냈던 김태조가 송당에 거주했고, 13세기 김언양이 조천면에서 송당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가 어림잡아 800- 900년이 되는 셈이다.

예로부터 "도리 송당"이란 말이 전해지는데 이는 과거 행정구역이 변경되기 이전에 교례리(도리)와 송당리가 같은 관내에 속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실지로 두 마을은 인접해있고, 전설상으로도 유사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지금 송당 본향당의 안주인인 백조할망도 원래 교래리에서 살다가 송당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주변의 오름을 배경으로 마을을 향해 뻗은 도로는 삼나무 가로수가 그 운치를 더해준다. 삼나무가 위로 쑥쑥 잘 자라는 것을 보면 이 마을의 토질을 짐작할 수 있다. 흙에 돌이 적게 포함되어 있고, 토양의 깊이가 깊다는 것이다.

마을잔치, 고향사랑이 묻어나고 

송당 마을이 가까워지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오름들이 사방에서 시야에 들어온다. 활짝 핀 유채꽃이 오름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인가에 가까워지면 돌로 만들어놓은 장승 한 쌍이 방문객을 맞는다. 뉘 작품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익살스럽다.

마침 마을에 무슨 잔치가 열렸다고 한다. 알고 보니 새로운 마을 사무실을 짓기 위한 기공식이 열린다고 한다. 모처럼 마을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쪽 구석에서는 여인네들이 모여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마을 사무실을 짓게 된 데에는 마을 출신 여성 독지가의 헌신이 있었다. 주인공은 송당초등학교를 3회로 졸업한 김순자씨다. 김순자씨는 현재 제주시에 살고 있는데, 예산이 부족해서 사무실을 새로 짓지 못하는 마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2억 원을 기증했다고 한다. 
  

마을 잔치 마을 사무실 기공식이 열리는 날 마을 부녀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 장태욱

마을 잔치 잔칫상에 술과 고기와 떡이 차려졌다.  ⓒ 장태욱   

김순자씨 마을 사무실을 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감을 말씀하라니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다. ⓒ 장태욱 

기공식에 앞서  제주도 무속신앙의 본가와도 같은 당오름을 배경으로 돼지머리 올려놓고 고사를 지냈다. 마을 임원들의 인사 후에, 김순자씨가 소감을 전하는 순서가 돌아왔다.

"호호호, 별 거 아닌데 인사까지 하라니 부끄러워서…"

저리 수줍음을 타는 성격으로 어떻게 그리 큰 돈을 기증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행사 후에 술과 떡과 고기가 풍성하게 준비되었다. 체면 불구하고 자리에 끼었는데 사투리와 더불어 풍겨오는 시골 인심이 음식을 한층 맛있게 했다. 마을 탐방이 매일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송당초등학교 이 마을 주민들은 송당 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을로 이사오는 주민들에게 집을 무상으로 빌려주고 급식비도 대신 납부해준다.  ⓒ 장태욱 

사무실 건축과 더불어 마을 주민들은 초등학교에 관심을 갖고 학교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김수경 마을이장에 따르면 송당은 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이 마을로 이사를 와서 초등학교에 학생을 등록시키는 가정에게 주택을 무상으로 임대해 주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학생들의 급식비도 전액 마을 공금으로 대납해준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부산에서 두 가정이, 인근 하도마을에서 한 가정이 이사를 왔다. 계속해서 문의가 이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송당 본향당, 제주 무속의 고향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당오름 자락에는 제주민속자료로 지정된 송당 본향당이 있다.  
  

송당 본향당 가는길 당오름 기슭에 있다. 제주 무속의 총 본산과 같은 곳이다.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었다.  ⓒ 장태욱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당신 김백조(金白祖)와 그의 남편 소천국과의 사이에는 아들 딸 18형제를 두었다고 한다. 김백조가 당신으로 본향당(本鄕堂)의 수호신이 되고, 세명주(공주)가 당오름당의 수호신이, 소천국이 알송당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리고 남은 자녀들도 각각 제주의 다른 마을로 흩어져서 속한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숙종 25년에 이형상 목사에 의해 당 500 절 500을 폐할 때 송당 본향당도 거의 소실되었다가, 그 후에 당오름당만 재건되었다. 주민들은 4·3의 광풍에서 중산간에 위치한 송당이 큰 피해를 겪지 않은 것이 송당의 수호신이 배려해준 덕이라고 믿고 있다.

이곳에서는 음력 1월 13일에 신과세제, 2월 13일에 영등손막이, 7월 13일에 마불림제, 10월 13일에 시만곡대제를 올린다.  
  

옛 국립목장 부지 조선시대 이 일대는 국마를 키우는 제1소장이었다. 그후 이승만 정권 당시 340만평 부지에 국립목장이 만들어졌다가 이후 민간에 이양되었다.  ⓒ 장태욱 

이승만 대통령 전용 별장 1957년에 준공하였다. 지금은 관리되고 있지 않다. ⓒ 장태욱

송당의 드넓은 초원은 목축 사업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국마를 키우는 제 1소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과거 이승만 정부는 이 마을 340만평 부지에 국립목장을 만들었고, 목장의 내부에는 대통령의 별장을 지었다. 

역사가 휩쓸고 간 흔적들, 국립목장과 대비공원

4·19 혁명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정권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 이르자 목장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민간에 이양되었다.  당시 대통령이 사용했던 별장은 낡은 상태로 남아있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이 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제주도 도로는 전부 먼지나는 비포장 도로였다고 한다. 고인규 송당리 감사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이 방문한다고 사람들을 동원해서 먼지 나는 도로 위를 전부 붉은 자갈로 덮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별장 주변은 아이들 놀이터가 되었다. 50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신식 별장은 마을 아이들을 문화적으로 크게 개명시켰다고 한다. "훗날 제주공항이 지어지고 그 내부에 수세식 화장실이 생겼을 때, 내 고등학교 동창생들 중 양변기 물로 세수하지 않은 것은 송당놈들 뿐이었다"는 고인규 감사의 자랑을 듣고 한참이나 웃었다.

한편, 대천동 입구에서 송당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장기동'이라고 써 놓은 표석이 보인다. 4·3당시 정부의 소개령에 의해 불타 사라진 마을이다. 옛 장기동 마을 안쪽에는 최근에야 새롭게 단장된 '대비공원'(大妃公園)이 있다.
  

대비공원 연안김씨 종친회에서 계축사옥 당시 광해군에게 화를 당해 제주로 유배되었던 부부인 노씨(영창대군의 외조모)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 장태욱

1613년(광해군 5년)에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어린 아우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계축화옥이 일어났다. 이 때 인목대비의 생부인 김제남은 역모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죽었고, 인목대비의 생모인 부부인 노씨(영창대군의 외조모)는 제주로 유배되었다.

제주로 유배된 노씨부인은 술을 빚어 생계를 이었고, 제주목사 양호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집주인 전양(全良)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대비공원은 폐위된 인목대비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노씨부인을 위로하고, 노씨 부인을 보살폈던 전양을 기념하기 위해 연안 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송당리사무소 064-783-4093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