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문학기행 이덕구山田서...4.3작가와 기행자들 ‘동행’
60년전 4.3피난민 은거지 '붇받친 밭'서 넋위로 ‘몸굿’ 공연
‘역사를 따라서 상생의 발자국을 찍다’를 주제로 한 4.3평화문학기행이 26일 민예총제주지회 주최, 제주작가회의 주관으로 ‘이덕구 산전(山田)’을 비롯한 한라산 동부지역 일대에서 열렸다.
4.3 당시 한라산 유격대의 제2대 총사령관이었던 이덕구가 머물렀던 그곳. 1949년 이덕구가 체포된 곳도 이곳이다. 지금은 잡목이 무성해졌지만 60년 전만 해도 억새만 무성한 들판이었다. 좌우측으로 하천 계곡이 휘둘러져 있어 천연 요새로 흠이 없다.
이덕구 산전을 찾아가는 이번 기행에는 제주문학작가들과 4.3평화문학기행 참가자, 충북지역 작가 등 100여명이 동행했다.
이덕구 산전은 5.16도로를 따라 교래리 방면으로 가다가 물찻오름으로 들어가는 임업도로로 빠져 약1.8km 지점의 하천(밤남도왓내)을 따라 30여분 올라간 조천읍 교래리 산137-1번지 일대의 ‘북받친 밭’에 있다.
4.3평화문학기행 참가자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이덕구 산전에 들어서면서 시간은 60년 전무자년 그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전 입구의 70여년된 어느 집 개인 묘와 울창한 백일홍 나무도 뜬금없는 불청객들의 방문이건만 어서 오라 반기는 듯하다.
이 무덤의 왼쪽으로 올라간 일대가 바로 이덕구 산전이다. 원래 ‘북받친 밭’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 북받친 밭을 중심으로 밤남도왓내 하류쪽엔 1948년 말부터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숨어든 피난민들이 줄을 이었던 곳이다.
이곳 일대의 피난민들은 당시 토벌대의 무자비한 강경진압을 피해 제주읍 봉개리.용강리.회천리.도련리 등에서 올라온 제주 동부지역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당시 무장대의 주력부대인 이덕구 부대도 1948년 말부터 1949년 3월경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그 후 사람들에 의해 ‘이덕구 산전으로 불렸다.
4.3 당시에는 벌판이었던 이곳은 지금은 새 생명들이 쑥쑥 자라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덕구 부대가 머물렀던 산전 곳곳에는 지금도 돌로 쌓아 놓았던 비트(초소)가 남아있어 당시 난리를 피해 산에 올랐던 피난민들과 결사 항전했던 무장대들의 비참했던 삶을 떠올리게 했다.
깨어진 항아리, 그들의 꿈은 그렇게 깨어졌을까? 녹슬고 깨어진 무쇠솥, 산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두동강 났을 것이다. 얕은 돌무더기에 기대고 대충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붕에 몸을 가려 추위와 배고픔과 수시로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을 산사람들의 숱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과 마주한 채 슬픈 역사의 대화를 묵묵히 나눴다. 아직까지 피어있는 늦은 복수초 몇그루가 4.3의 넋들을 위로하고 평화와 상생을 노래하고 있었다.
놀이패 한라산과 극단 자갈치 등도 이날 이덕구 산전에서 4.3의 넋들을 위로하는 ‘몸굿’ 공연을 펼쳤다. 황량한 산전에서 애절하고 가슴 절절한 이들의 몸짓이 ‘평화’와 ‘상생’의 노래로 기행자들 가슴속에 기억됐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결국 사살됐다. 증언에 의하면 봉개동 절물 인근에 피신해 있던 이덕구는 토벌대와의 교전 끝에 사살된 채 끝내 죽음을 맞았다. 그렇게 이덕구의 시신은 산을 내려왔다.
이튿날인 1949년 6월8일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 마당에 십자형 틀에 묶여 전시됐다. 아마도 ‘무장대 최후의 말로’를 비참히 보여주려 했던 의도였을 터다. 이덕구의 왼쪽 가슴 호주머니에 꽂힌 숟가락을 보면서 당시 제주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그것이 실질적인 4.3의 끝이었다.
이날 4.3평화문학기행에는 시인 문충성, 희곡작가 장일홍, 소설가 양영수, 소설가 한림화, 시인 문무병.문영종.김수열.이종형.강덕환.허영선 등이 기행자들의 길동무로 나서 문학속에 그려진 4.3을 참가자들과 교감했다.
북받친 밭을 내려오는 길목 곳곳에 피어나고 있는 제비꽃들, 뭉텅뭉텅 솟아나는 솔잎고사리, 이름 모를 봄의 새 순들이 60해 동안 구천에서 떠돌고 있을 4.3 영혼들의 따뜻한 말벗이 되어 주고 있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저작권자ⓒ 제주 대표뉴스 '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