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전용 별장이 있는 송당목장을 찾아서

송당목장 안돌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송당목장.  ⓒ 한라산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  송당목장
조선시대 목장의 분포 송당은 제1소장이 위치했던 곳이다.  ⓒ 장태욱  송당목장 

1730년(숙종 30년)에 제주목사 송정규는 당시 제주에 난립하던 목장들을 정리해서 10소장(所場)으로 나눴다. 

당시 송당은 국마를 관리하던 여러 목장 중 제1소장이 자리하던 곳이다. 정조 16년에 만들어진 <제주삼읍지>에는 제1소장에서 말 878필과 소 553두를 기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도래 송당'(교래리와 송당리)은 제주에서 목축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했다.

대천동 사거리에 이르면 동북쪽으로 삼나무 가로수길이 시원스럽게 뻗어있다. 송당 본 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4·3때 사라져버린 '장기동' 마을 터를 알리는 표석이 나오는데, 표석을 1㎞만 더 지난 곳에 옛 '국립송당목장' 입구가 자리 잡고 있다.

국립목장 계획을 추진한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4·3 당시 해안선에서 5㎞를 벗어난 제주도의 중산간은 거의 황폐화되었다. 그로 인해 목축업도 크게 위축되었다. 50년대 중반 제주도의 소와 말의 사육두수는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941년의 6만6700마리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천혜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축산은 정부의 지원 없이는 회복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처지를 딱히 여겼는지 이승만 정부는 잘 사는 제주를 만들기 위해 조선시대 제1소장이 있던 송당지역에 국립목장을 건설하였다. 

발단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래 내용은 '제주도지방의정연구소'의 <도백열전>을 발췌한 것이다.

송당으로 가는 길 대천동에서 송당으로 향하는 길가에 송당목장의 입구가 있다.  ⓒ 장태욱  송당  
제주를 방문했던 이승만 대통령 일행 왼쪽에서 네번 째가 이승만 대통령.  ⓒ 제주도지방의정연구회  송당목장

1954년 말경 농림부 명재억 축정국장과 미국 CAC(민사원조처) 직원이 제주를 방문했다. 제주에 축산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조사단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1957년에 이르자, 이 조사단의 보고를 바탕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한미재단고문이 국립목장 건설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해 3월 28일에 밴플리트는 외국인 수의사 스틴슨과 함께 제주를 찾아 목장 후보지들을 돌아본 뒤, 구좌면 송당 지역이 대규모 목장 후보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4월에 이르자 농림부는 "900만평 규모의 '국립제주도송당목장'을 7월 12일까지 완공한다"는 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는 축사 105동과 대통령 전용 숙소를 포함한 관사 8동을 짓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립목장 기공식에 즈음하여 5월에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관덕정에서 열린 도민 환영대회에서 "우리 국민도 이제는 쇠고기를 먹어야 합네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오랜 기간 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다.

귀빈사에서 바라본 목장 넓고 푸른 목장이 내려다 보였다.  ⓒ 장태욱  송당목장
   
송당목장 지금은 민간에 불하되어 경주마를 육성하는 목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장태욱 송당목장

목장 공사는 예정처럼 원활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재를 도입해서 공사를 하는데다, 공사 실무자들이 제주 환경에 익숙하지 못해 공사는 더디기만 했다. 그러던 중 8월에 플로리다에서 수입된 육우 브라만 166두가 LST함정 두 대에 나눠 실려 제주에 들어왔다. 

1957년 10월이 되자 총 공사비 3540환이 투입되어 1차로 목장시설공사가 완공되었다. 축사 7동, 창고 1동 관사 3동, 특호 관사 1동(대통령  전용숙소)에 자가발전시설과 구내전화 등이 가설되었다. 거기에 진수내를 막아 댐을 만들고, 가축급수장 및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풍차와 12㎞의 수도관이 설치되었다. 총 35㎞의 철조망이 목장 주위로 설치되었다.

당시 우리 기술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대신 국립목장의 규모는 900만평 계획에서 300만평으로 축소 조정했다. 

제주에 들어온 플로리다 소, 그리고 브루셀라병

그런데 당시 목장 부지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았다. 목장 내 대부분의 토지가 사유지였는데, 정부는 토지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임대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길성훈 도지사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부지를 확보했다. 이후 국회에서 문제가 되자 소액의 임대료를 지불했다.

1957년 11월이 되자 목장 명칭이 '국립제주목장'으로 변경되고, 면양과 산양 148마리와 소 200마리가 수입되었다. 목장 사업비 총 1억 5000만환 중 목장 시설비를 제외한 1억 1000여 만환이 가축구입비로 소요되었다.

1959년 8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제주를 찾았다. 당시에도 그는 "제주도가 하나 둘씩 발전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쁘며, 제주 사람들은 축산개발과 관광개발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남겨 국립목장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 방문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후 터진 4·19혁명으로 말미암아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를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는데, 마침 그 해 수입한 소에서 브루셀라병이 발생하여 다른 소에게까지 전염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브루셀라병이 발생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축산 담당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송당목장의 결손이 국회 문제로 쟁점화될 즈음인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 목장 운영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조사단은 목장의 경영부진 원인으로 급수사정 불량, 관리의지 부족, 기술자양성부족 등을 꼽았다.

1961년 5월에 밴플리트 고문과 장경순 농림부장관, 이후락 공보실장 등을 대동해서 박정희 의장이 송당 목장을 찾았다. 박정희 의장은 미리 내려왔던 조사단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집어치워! 현상유지하려면 아예 문을 닫아버려"라며 화를 냈다.

결국 국립제주목장은 민간에게 불하되었다.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1억6000만 원에 삼호그룹으로 넘어갔다.

목장으로 가는 진입로 삼나무 가로수 길 안으로 걷다보면 숲 속에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 장태욱  송당목장  
귀빈사 대통령 전용 별장이다.  ⓒ 장태욱  귀빈사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쇠고기" 외치는 대통령들

1122번 도로에서 옛 국립목장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붉은 자갈이 깔려있다. 길게 뻗은 좁은 길 양쪽으로 삼나무가 높이 자라고 있어서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삼나무길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가면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했을 적마다 잊지 않고 묵었던 전용별장 '귀빈사'가 있다.

귀빈사 마당에는 100살은 다 되어 보이는 팽나무가 가지를 넓게 벌리고 수문장처럼 귀빈사를 지키고 있다. 여름에 왔으면 팽나무의 나뭇잎이 그 실록을 과시했겠지만 아직은 잎사귀가 나오지 않아서 더러는 황량한 느낌을 준다.

방치된 귀빈사 앞에서 고인규 송당리 마을 감사가 이 별장을 지을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미국 건축업자들이 한국인들을 고용해서 별장을 짓는데, 일이 진전이 잘 안 됐어. 한국 석공들이 돌을 쌓으면 미국 목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미국 사람들은 돌을 정교하게 깎아서 틈이 생기지 않도록 쌓기를 원하는데, 우리에게 당시 그 정도의 기술이 없었거든. 아마 결국은 미국 기술자들을 불렀을 거야. 지붕은 상해도 이 건물의 외벽은 아직도 새 건물인 것처럼 멀쩡하잖아."

실제로 귀빈사의 외벽은 벌어진 틈이 한 군데도 없다. 지은 지 3년만 지나면 벽에 금이 가는 지금 우리네가 사는 아파트에 비하면 신기할 정도로 튼튼한 건물임이 틀림없다. 방치하지 말고 잘 관리했으면 지금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귀빈사 마당 앞에서 나무 틈으로 바라본 송당의 넓은 초원 위에 경주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가끔 멀리서 노루가 뛰어가는 모습도 눈에 띈다. 도시에서는 돈을 주고도 쉽게 볼 수 없는 목가적인 장면이다. 이 평화로운 자연 앞에서도 마음이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국민들도 쇠고기를 먹어야 합네다"라고 외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대통령이 "맛있고 값싼 쇠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도 쇠고기의 달콤한 유혹에 귀가 솔깃해지는 서러운 백성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쇠고기도 쇠고기 나름이다. 최소한 50년 전 쇠고기에는 광우병은 없지 않았나?

방치된 귀빈사의 외벽 건물이 방치되었는데도 외벽은 여전히 든든해 보였다.  ⓒ 장태욱  귀빈사
창틈으로 바라본 침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했던 침대가 창틈으로 내다보였다.  ⓒ 장태욱  귀빈사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