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목관아, 탑동 해변, 전농로... 민심과 행정이 교차하던 제주 삼도동

제주시 삼도1동과 삼도2동의 유래가 되는 삼도리는 삼성 신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삼성혈에서 태어난 삼성의 세 시조는 오곡의 씨와 마소를 갖고 제주에 들어온 일본국 혹은 동해왕국의 세 공주와 각각 혼인을 맺었다. 그리고 활을 쏘아 각각 거주할 땅을 정하였는데, 세 번째로 활시위를 당긴 부을라의 화살이 떨어진 곳이 삼도(三徒)이다.
  

▲ 삼성 시조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서로 터를 정하기 위해 활을 쏘는 모습(삼성혈에서 촬영)  ⓒ 장태욱

부을라의 마을, 제주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즉 삼도동은 삼성신화에 나오는 삼신인 형제 가운데 부을라가 터를 잡았던 삼도(三徒)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지금도 삼도2동에 있는 북초등학교 북쪽 인근을 속칭 '무근성'이라고 부르고 실제 이 일대에서 옛 성터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성은 탐라국 시대에 해당하던 5~7세기 경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건국될 당시 고려조정은 제주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성주 왕자 등의 토착 지배층이 지역을 관할하여 다스리게 했다. 당시 지방의 토착 지배층이 지역민을 다스리던 성주청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제주우체국이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제주시 목관아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600~900년 전의 토기들이 상당수 출토되었는데, 이는 10세기를 전후하여 이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탐라총관부터 제주북초등학교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그 곳에 우체국물류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 장태욱 

1211년(희종 7년)에 삼도는 일도·이도와 함께 제주목의 본읍에 해당하는 대촌현을 구성하였다. 1273년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고 탐라가 원의 지배하게 들어가자, 원의 조정은 제주를 관할하기 위해 탐라총관부 등의 관아를 설치하였다. 현 제주북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우편물류센터 부지가 탐라총관부 관아터에 해당한다.

그리고 1300년(충렬왕 26년)에 제주도에 대한 행정개편이 이루어져 대촌현을 중심으로 동서에 14개 현이 생겨났다. 이때도 대촌현은 제주 전 지역을 다스리던 제주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자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1397년(태조 6년)에 최초로 제주목이 설치되었고, 1416년(조선 태종16년)에는 제주지역이 제주목·정의현·대정현으로 구획되어 삼읍체제로 운영되었다. 제주목 관내는 과거에 존재하던 제주성을 근간으로 새롭게 축성되면서 삼도는 제주목의 관아가 즐비하게 늘어선 행정타운이 되었다.
  

   
▲ 삼도동의 모습 삼도동은 과거 제주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 장태욱

1609년(광해군 1년)에 대촌은 제주 중면으로 개편되고, 일도·이도·삼도는 일도리·이도리·삼도리로 불리었다. 삼도리라는 지명은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10년 행정구역 통합이 이루어질 당시 제주군 중면이 제주군 제주면으로 바뀌고, 1931년에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해방을 맞아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될 때, 삼도리는 삼도1동과 삼도2동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관덕정 앞의 일주도로를 기준으로 그 북쪽을 삼도1동으로, 그 남쪽을 삼도2동으로 구분하였다. 그로 인해 삼도2동은 북쪽으로 탑동 해안가와 접해있고, 삼도1동은 공설운동장이 있는 오라동과 북쪽으로 경계가 닿아있다.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지방 행정과 여론이 교차하던 곳

과거 이 일대가 제주도 행정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삼도지역에서 많은 문화유적들을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관덕정과 복원된 제주목 관아이다.

고려시대부터 제주에는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제주목이 설치된 시기는 1397년(태조 6년)의 일이다. 그러던 중 1435년(세종17년)에 관청에 불이나 건물과 문서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당시 제주목사였던 최해산은 이를 탄식하며 죄수와 입번자들을 시켜 목재와 기와를 마련하고, 새롭게 206 칸의 관청을 지어 이를 홍화각(弘化閣)이라 하였다. 홍화(弘化)란 '널리 임금님의 교화를 입는다'는 뜻이며, 홍화각에는 총루, 침실, 독서방, 금당, 정당, 약고, 독소, 낭사, 영고 등을 갖추고 있었다. 
  

제주목관아 복원된 제주목관아. 조선시대 제주목의 관아가 이 일대에 즐비했었다.  ⓒ 장태욱 

1649년(인조 27년)에 홍화각은 김여수 목사에 의해 중창되었고, 1713년(숙종 39년)에 동헌으로서 연희각(延曦閣)을 따로 지어, 홍화각은 아전들의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1448년(세종 30년)에 안무사 신숙청은 관덕정을 창건하였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관리와 군인들이 활쏘기를 겨루는 곳으로 제주에 남아있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건물에 해당한다. 관덕정의 들보에는 상산사호, 취과양주귤만교, 적벽부, 대수렵도 등의 그림이 남아있어서 그 가치가 더해진다. 1963년에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관덕정 제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사람이 붐비는 장터였다.  ⓒ 장태욱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시대 관덕정 일대는 장이 크게 서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관덕정은 무예를 겨루는 장소로서의 본래적 기능보다는 광장으로서 기능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이재수의 난 과정에서 화난 군중이 천주교인들과 봉세관에 대한 피의 보복이나, 4.3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던 삼일절 발포사건이 관덕정에서 일어난 것은 관덕정 광장이 여론과 민심이 소통되는 중요 장소였기 때문이다.

전쟁과 이별을 노래했던 예술가들 떠난 해안에 바람만이 남아

관덕정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호텔, 놀이시설, 식당, 상가들이 즐비한 탑동 해안에 이른다. 원래 탑동 해안은 간조 때 해안선까지 약 100m 정도 갯벌이 드러나는 저수면 지대였는데, 1988년부터 공유수면 약 5만평을 매립하여 확장시켰다. 탑동 해안 매립으로 인해 해녀들이 입은 어장피해와 개발이익금 환수를 놓고 오랜 기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 탑동 해변 1980년대 말 공유수면 5만 평을 매립하였다. 어민 피해 보상과 개발이익금 환수를 둘러싸고 마찰이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 장태욱  

탑동 해안가 방파제 앞에는 해변공연장이 있는데, 공연장 북쪽 울타리 앞에는 '떠나가는 배'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제주 피난 생활 도중 여인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는 전쟁이 끝나자 여인을 남겨두고 제주를 떠났다고 한다. 제주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별해야 하는 슬픈 운명에 처한 두 연인을 바라봤던 고 양중해 시인이 당시의 안타까움을 시로 표현했다고 한다.

노래 '떠나가는 배'는 양중해의 시에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인 것이다.  양중해 시인은 2007년에, 작곡가 변훈은 2000년에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남긴 상처의 증거로 노래비만이 푸른 제주바다를 배경으로 탑동 해안에서 바람을 맞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 '떠나가는 배' 노래비 탑동 해변공연장 인근에 있다. '떠나가는 배'는 고 양중해 시인의 시에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였다.  ⓒ 장태욱  

전농로, 지금은 한 없이 아름답지만

최근 들어 삼도동의 백미로 떠오르는 곳은 전농로이다. '전농로'란 '전에 농고가 있던 길'이란 의미로 지어진 도로 이름이다. KT사옥 앞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남성로터리까지 1.5Km 정도 뻗은 도로에 빽빽이 심겨진 벚나무 가로수가 도심 속에서 생명력을 과시하는 곳이다. 
  

▲ 전농로 봄에 벚꽃이 만개했을 때의 모습니다. 최근 삼도동의 백미로 떠오르는 곳이다.  ⓒ 장태욱

이곳에 벚꽃이 피면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과 차들은 바람에 날리는 벚꽃의 세례를 듬뿍 받게 된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회간 이곳에서 벚꽃잔치가 열린 적이 있다.

전농로의 도로명이 붙여지는데 단서를 제공했던 제주농고는 1901년에 '사립의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오현단에서 출발했다. 1910년이 되자 사립의신학교를 모태로 제주농립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후 교명이 다시 제주공립농업학교로 변경되었다. 1940년이 되자 학교는 5년제로 승격되어 삼도리 6만여 평의 부지 위로 이설되었다.
  

▲ 토지공사 과거에 제주농고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장태욱 

제주농업학교는 일제시대에는 군시스템에 의해 유지되었다. 학교 시설은 병영으로 꾸며졌고, 현역교관이 상주하면서 학생들에게 일본식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28일에 일본군의 항복절차가 제주농업학교 교실에서 진행되었고, 이어 학교 내에 미59군정 중대본부가 설치되었다. 그 후 1947년 7월부터 이곳에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9년 2월)가 주둔하여 제주4.3의 참극을 초래하였다.

4.3와중에 김익렬 중령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무고한 주민들에 대한 강경진압을 통해 대령으로 고속 승진했던  박진경이 피살된 곳도 당시 제주농업학교였다. 1948년 6월 18일 제 11연대장 박진경은 제주농고에 마련되었던 숙소에서 부하 손선호 하사에 의해 피살되었다. 
  

▲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곳 전농로 토지공사 앞에는 홍윤애의 무덤이 있었던 장소를 알리기 위한 표석이 세워져 있다. 홍윤애는 유배정객 조정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제주의 여인이다. ⓒ 장태욱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기 이전인 조선시대에 이 일대는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정조 시해사건에 휘말려 근 30년간 제주에 유배되었던 정헌 조정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여인 홍윤애가 묻힌 곳도 당시 이 일대에 있던 공동묘지였다. 이곳에 제주농고가 들어서면서 홍윤애의 무덤은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되었다. 토지공사 도로 앞에는 이곳에 홍윤애의 무덤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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