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토벌군 박진경 연대장, 그의 최후

제주시 병문천과 소용내 사이에 있던 넓은 들판을 과거로부터 '서사라(西紗羅)'라고 불렀다. 과거 이 일대는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됐다고 한다. 가을에 햇빛이 비치면 넓은 들판이 비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황금빛으로 보였는데, 서사라라는 이름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사봉낙조'를 자랑했던 사라봉이 있는 동네를 '동사라'라 부르던 것과 뜻이 통하는 지명이다. 
  

전농로 서사라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길이다.  ⓒ 장태욱
  

전농로, 서사라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길

'전농로'는 서사라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이 약 1.5킬로미터의 도로를 칭하는 이름이다. 전농로라는 이름은 '전에 농업학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전농로에는 길 양쪽에 오래된 벚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데, 봄이 되면 하얀 벚꽃 터널이 장관을 연출해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거슬러 올라가서 제주농고가 이곳에 터를 잡기 이전인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 전체가 공동묘지였다. 전농로가 시작되는 토지공사 사옥 앞에는 오래된 벚나무 고목들이 차도에 버티고 서 있는데, 1940년에 제주농고가 이곳으로 옮겨질 때 기념으로 심은 것들이라고 한다.
  

표석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곳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장태욱  

토지공사 사옥 앞에 있는 벚나무 고목 옆에는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홍윤애의 무덤은 그녀의 사위였던 박수영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다가, 이곳에 학교가 들어서게되자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비련의 주인공인 홍윤애는 향리 홍처훈의 딸이었다. 1777년 정헌 조정철이 정조 시해사건에 연류되어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홍윤애는 조정철과 사랑에 빠져 그의 유배처소에 출입했다. 당시 조정철과 원수지간이었던 김시구 목사는 판관 황인채와 모의하여 조정철을 제거할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유배 정객을 사랑하다 죽은 여인이 묻힌 곳

홍윤애가 조정철의 처소를 출입하는 것을 알아차린 김시구 목사는 홍윤애를 잡아다 심문했다. 목사는 조정철이 유형수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지,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에 대한 비방을 했는지 여부를 캐물었다. 하지만 홍윤애는 시종일관 "청소하고, 빨래하며 잔일을 거들어 주었을 뿐"이라고만 답했다.

홍윤애는 장 70대를 맞아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 가운데 죽었다. 1781년(정조5년) 음력 5월15일의 일이다.

당시 홍윤애가 죽은 날부터 오랜 기간 비가 내리지 않아 제주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러다 8월 2일이 되니 큰 폭풍우가 불기 시작했다. 비가 동이로 붓 듯했고 나무들이 꺾이는 비바람이 열흘 가까이 그치지 않았다. 섬사람들은 "몹시 세차게 내리는 비바람은 모두 홍윤애의 원기가 섬에 불러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조정철은 1803년에 내륙인 광양으로, 1805년에 구례로, 1807년에 황해도 토산으로 이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정언으로 복관됐다. 그러다가 1811년에 제주목사겸전라방어사로 명을 받아 제주에 부임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환갑이 넘었다.

홍윤애의 무덤을 찾은 조정철은 묘비명을 지어 새기고 1812년에 동래부사로 이임했다. 조정철이 남긴 묘비명은 지금도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홍윤애의 무덤가에 남아있다.

토지공사에서 남쪽으로 삼성초등학교 후문을 향해 오르는 길을 홍랑로라고 하는데, 이는 홍윤애의 무덤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랑로 토지공사 앞에서 남쪽으로 삼성초등학교 후문을 향해 오르는 길이다. 홍윤애의 무덤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도로명이다.  ⓒ 장태욱

역사의 불청객들, 이곳으로 모여드는데 

공동묘지가 있던 이 일대에 일제시대에 제주농고가 세워졌다. 제주농고는 1901년에 '사립의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오현단에서 출발했는데, 1910년이 되자 이 학교를 모태로 제주농립학교가 설립됐다. 그 후 교명이 다시 제주공립농업학교로 변경됐고, 1940년이 되자 학교는 5년제로 승격돼 삼도리 6만여 평의 부지 위로 이설됐다.
  

옛 제주농고터 제주국제교육정보원 내에 옛 제주농고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장태욱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학교 병영화 정책에 따라 학교가 군시스템에 의해 유지됐다. 학교시설은 병영으로 꾸며졌고, 현역 교관들이 상주하면서 학생들을 일본 군인으로 양성했다. 이런 시설 때문인지 해방정국에서도 학교는 군인들의 주둔지로 사용됐고, 학생들은 교실에서 쫓겨나 야외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밀려나는 것이 제주의 주민들은 자신의 삶터에서 밀려나는 비극을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45년 9월 28일에 일본군의 항복절차가 제주농업학교 교실에서 진행됐고, 이어 학교 내에 미59군정 중대본부가 설치됐다. 그 후 1947년 7월부터 이곳에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9년 2월), 독립제1부대(49년 7월) 등이 줄줄이 이곳에 주둔했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은 이렇게 불청객을 맞으면서 시작됐다. 
  

   
▲ 제주에 내려온 고문관들 제일 오른쪽이 박진경 11연대장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어느 날 총성 한 방이 적막을 가르며 이 일대를 새벽 공기를 진동 시켰다. 4·3이 발발하고 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장 김달삼의 평화협정이 오라리방화사건으로 파기되된 다음, 박진경이 이끌던 11연대의 토벌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48년 6월 18일의 일이다.

당시 제주농고에 마련된 제11연대의 숙소에서 당시 9연대장이었던 박진경 대령이 부하가 쏜 M-1 소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박진경이 전날 있었던 자신의 대령 진급 축하연에 참석한 후 잠든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박진경은 미군정이 제주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발탁했던 지휘 장교였다. 박진경은 일제 때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나와 영어에 능통했다. 일제 말기 일본군으로 제주에 주둔한 경험이 있어서 제주 지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의 강경 진압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외세에 충성하고 동포의 목숨을 가벼이 여겼던 자의 마지막

박진경은 48년 5월 6일 9연대장 자격으로 제주도에 왔고, 9연대가 11연대에 합편하는 바람에 5월 15일자로 제 11연대장으로 변경됐다. 그가 제주에 머물면서 토벌작전을 수행한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 박진경 연대장의 고별식 1948년 6월 18일 당시 제11연대 본부가 설치된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렸다. 당시 군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그가 이끄는 경비대는 '양민과 평민의 구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모조리 연행했다. 한 달 동안 경비대와 경찰에 체포된 자가 약 6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포로 대부분이 10대 소년들과 부녀자와 노인들이었다. 당시 무차별 체포 작전을 수행해 온 박진경 연대장은 자신을 진두지휘했던 미 6사단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의 후광을 업고 6월 1일자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박진경 암살사건에 연류된 자들은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상사, 이정후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총 6명이었다. 그중 이정우 하사는 총을 들고 입산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바람에 체포되지 않았다.

직접 총을 쏜 사람은 손선호 하사로 밝혀졌다. 박진경 연대장의 피살사건은 육군장(陸軍葬) 제1호로 기록되었으니, 이는 고급장교가 희생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사건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돼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피고들은 김익렬 전 연대장과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박진경을 암살하게 된 동기를 '무고한 토벌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한 손선호 하사가 남긴 진술을 보면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토벌에 대한 군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은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했다. … 사격 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재판결과 황주복, 김정도 하사에게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신상우, 배경용 하사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리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 대해서는 사형이 선고되어, 1948년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산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형됐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길 때, 손선호 하사는 "하나님이시여,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박진경을 사살했던 동기가 종교적 신념이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이민족에게 잘 보이려하고 동포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던 박진경의 말로를 보면서 우리 정부도 교훈을 좀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삼성초등학교 옛 제주농고터의 일부가 삼성초등학교로 남아있다.  ⓒ 장태욱 

비극 그 이후

한편 박진경의 장례식은 6월 22일 오후 2시 서울 남산동에 있는 경비대 총사령부에서 부대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1990년에는 박진경의 동상이 그의 양자인 박익주 전 국회의원에 의해 경남 남해 군민공원에 세워졌는데, 예비역 군인들이 가끔 고인을 위로하러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멀리서나마 남해 지역 주민들이 문명시대에 걸맞게 현명한 처신을 내려 줄것을 기대할 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농업고등학교 부지에는 다시 한국보육원이 들어섰고, 특무대가 7000평을 할애해 갔다. 게다가 제주일중(1951년), 제주초급대학(1952년), 제주일고(1955년), 제주중앙여중(1966년), 제주중앙중(1967년), 교육감사관, 농촌진흥원, 학생회관 등이 세워지면서 제주농업고등학교의 교정은 점점 좁아져만 갔다.
  

▲ 표석 제주일중이 이 곳에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 삼성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 장태욱   
▲ 표석 이곳에 제주일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표석. 삼성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 장태욱
 
1976년 3월에 학교가 노형동에 있는 새로운 부지로 이전할 때까지 제주농고 옛터는 한국 현대사의 외파와 질곡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이 곳에 세워졌던 제주일중, 제주초급대학, 제주일고, 제주중앙중 등 대부분의 기관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 일부에 삼성초등학교만이 남아있다. 제주의 초창기 교육기관이 겪었던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발자취가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초등학교 교정에 일부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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