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토산리, ‘당팟당장’ 전설의 마을
서귀포 시내에서 성산포 방향으로 일주도로를 따라가면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귤 밭이 길게 펼쳐진다. 서귀포 시내를 벗어나면 제주도내 최대 귤 주산지인 남원읍이 나오고, 남원읍의 동쪽 끝에 있는 신흥1리 마을을 지나면 길은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토산리 해안에 이른다.
‘당팟당장’의 마을, 그 1000년의 역사
토산 마을은 약 1000년 전에 토산봉 서쪽에 제주 부씨(夫氏)가 이주해서 살기 시작한 것이 설촌의 시초에 해당한다. 그러다가 서기 1300년(충렬왕 26년) 무렵에 제주에 고려 조정에서 제주도에 대한 행정개편을 단행하여 제주에 대촌현(현재의 제주시)을 중심으로 동서에 14개 현을 세웠다. 그 후에 두개의 현이 추가되었는데, 토산현은 정의현과 더불어 나중에 추가된 현에 해당한다.
당시 토산의 '절려왓'에 토산현의 관청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토산1리 지경을 '절려가름;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다.
그 후 광산김씨가 '고성리'에서, 경주 김씨가 '의귀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의 규모가 커졌다. 마을명이 처음에는 '토산리(土山里)'였다.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지역의 지형지세가 옥토망월(玉兎望月,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명당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이라 하여 '토산리(兎山里)'로 바꿨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배가 큰 '당팟당장'에 관한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보리 빚지러 갔다가 도적 버릇 고친 이야기이다.
옛날에 토산 사람들은 식량이 부족하여 대정지방까지 가서 보리를 빚져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추수가 끝나자마자 되갚으며 살았다. 남달리 배가 큰 당팟당장에게 보릿고개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큰 근심거리였다.
어느 날 당팟당장이 대정으로 보리를 빚지러 다녀오다가 길거리에서 도적을 만났다. 당팟당장은 도적에게 보리를 가져가라고 허락했다. 하지만 도적은 무거운 보리 가마를 들을 수가 없었다. 힘으로 도적을 압도한 당팟당장은 도적의 머릿카락을 자기의 지겟다리에 묶어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참 길을 걷다보니 도적은 머리털만 남기고 도망치고 없었다.
몇 해가 지나 당팟당장이 다시 대정으로 보리를 빚지러 갔는데, 그곳에서 자신에게 보리를 강탈하려했던 도적을 만났다. 그 도적은 큰 부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힘만 믿고 도둑질하며 살다가 더 힘이 센 당팟당장을 만나니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일을 했다고 했다. 그날 당팟당장은 부자가 된 도적에게 후하게 대접받고 보리 스무 말까지 공짜로 얻고 돌아왔다.
토산 마을 주민들이 대정으로 쌀을 빚지러 다녔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일대 토질이 밭농사에 불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던 주민들이 당팟당장의 전설을 통해 대박의 꿈을 꾸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전설의 주인공인 당팟당장이 광산김씨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토산리에는 광산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이 곡식을 빚지러 다닌 것은 마을에 귤나무가 보급되기 전의 얘기다. 60년대 박정희 정권 이후 서귀포를 중심으로 온주밀감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귤의 보급이 서귀포에서 점점 동쪽으로 확산되었으니, 표선면에서는 토산리에 가장 먼저 귤을 보급되었다.
한편, 토산리에는 '여드레당'이 있어서 이 마을을 뱀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드레당'은 뱀신에게 제를 올리는 당으로, 매달 8일(여드레)에 당제를 지내기 때문에 여드레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오래전 제주에는 나무와 띠와 흙과 돌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기 때문에, 구렁이들이 지붕이나 담벼락에 터를 잡고 사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었다. 비단 토산만이 아니라 제주의 대부분 마을의 어른들은 구렁이가 집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에서 제주도에는 토산을 비롯하여 22개 마을에 여드레당이 있다.
토산에는 예로부터 샘물에서 물이 풍부하게 솟아났기 때문에 인근의 다른 마을의 부러움을 샀다. 대표적인 샘물이 '노단새미'와 '거슨새미'다.
'노단'은 제주도 방언으로 '제대로 된 방향'을 의미한다. '노단새미'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물이 흐르는 샘'이란 뜻인데, 물이 흐름이 남쪽으로 바다를 향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에 '거슨새미'는 '방향을 거스르는 샘'이란 뜻으로, 거슨새미의 물 흐름은 북쪽으로 한라산을 향한다.
토산에는 토산1리(웃토산)과 토산2리(알토산) 사이에 토산봉이 있는데, 토산봉의 정상에는 조선시대 정의현에 속했던 봉수의 터가 남아있다. 오솔길 산책로를 따라 토산봉의 정상을 향해 걷노라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가 정겨워 지나가는 길손으로 하여금 잠시 평온한 감상에 잠기게 한다.
1948년 12월 14일에 이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이 마을 주민들을 모두 마을 향사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주민들을 모두 결박했다. 그 후 12월 18일이 되자 군인들과 민보단원들은 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표선 백사장 근처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모든 남자들과 일부 처녀들을 총살시켜버렸다.
"한세대가 몰살되었으니 마을이 발전할 수가 있었겠나?"
마을에 대해 더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토산1리 김홍지(47) 이장을 만났다. 김홍지 이장은 토산에서 태어났고, 토산을 거의 떠나보지 않은 토산 토박이다. 지금은 부인과 슬하에 두 자녀를 거느린 가장으로, 한라봉 하우스 1500평을 경작하며 생활을 꾸리고 있다.
"비닐하우스 1500평이면 농가로서 규모가 큰 농가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토산리는 주민에 비해 땅이 넓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 그 정도 규모로는 자랑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고 했다.
"한 세대가 몰살되었습니다. 사람이 없으니 마을의 발전을 이끌어야할 인재가 없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제가 클 때만해도 마을 출신 중에 흔한 공무원이 몇 명 없었다니까요? 12월에 집단 학살을 당한 사람들의 제삿날이 돌아오면 집집마다 빠짐없이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동네가 마치 명절을 맞은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에도 삼촌 두 분이 화를 당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토산은 뱀이 많고 뱀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직도 뱀과 연관된 신앙을 자진 주민들이 있는지 물었다.
"뱀으로 인해 주민들이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특히 여자들인 경우 제주시내에 가서 방을 얻고 살려고 해도 토산에서 왔다고 하면 집주인이 방을 내주지 않을 정도였지요. 혼사가 막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동네에 뱀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물이 풍부해서 습도가 높았던 마을 환경이 뱀의 서식에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뱀에게 제를 지내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과거 일부 가정에서 제를 지냈던 것이 와전되어 마을 전체가 오해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홍지 이장은 본인도 손수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한미FTA나 미국 쇠고기 수입에 관해 솔직한 심경을 보여주었다.
"한미 FTA나 미국 쇠고기 수입은 정부가 굳이 그렇게 서두루지 않아도 될 문제로 봅니다. 개방이 대세라고 해도, 산업의 한 분야가 급격하게 피해를 당할 것이 뻔하다면 천천해 대책을 간구하며 가야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부는 개방을 서두르려고만 했지 피해 농가들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내 놓은 것이 없어요. 보상이 주어지는 분야가 일부 있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처방과 대책이 나와야 합니다."
"표선면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표선중학교로 진학합니다. 그런데 표선중학교 상위권을 토산초등학교 아이들이 독차지하다시피 합니다. 규모가 커야만 좋은 학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 선생님과 아이들과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의 신뢰와 유대감이 중요합니다."
김홍지 이장은 농촌 학교들이 살기 위해서는 지역 경제가 회복되어야하는데 최근의 농가 사정이 좋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작년 귤 값이 예년에 없이 바닥시세를 면치 못해서 농가들은 올해에 상당한 고비를 맞을 것이라고 했다. 아직까지 귤꽃이 핀 모양을 보면 가을에 수확량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가격이 지지되지 못하면 큰일이라고 걱정했다.
요즘 미국산 쇠고기 광고하느라 여념이 없는 당국자들이 가슴에 새겨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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