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좋아 바다에 핀 제주의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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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47)

바다에 피는 꽃들 중에는 바다를 뜻하는 '갯'자가 붙은 꽃들이 많다. '갯'자를 얻으려면 척박한 해안가의 바위틈이나 모래밭의 목마름을 감수해야 한다. 넓고 깊은 바다의 마음을 닮으려면 때로는 광풍에 뒤집어지는 풍랑의 바다도 맞이할 줄 알아야 하고, 해일에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온 몸이 저려지는 상처도 넉넉히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견디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 곳을 사랑해야만 한다. 온 몸으로 껴안아야만 한다.

그런 마음들을 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다에 나가 그들을 보노라면 내 삶의 고난 같은 것은 그저 삶을 맛나게 하는 양념 같은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밋밋할까?

'갯'자가 붙지 않은 많은 꽃들도 바다를 벗삼아 피고 진다.
아예 바다 근처가 아니라 바다를 담아 '해(海)'라는 이름이 들어간 해국, 해당화, 해녀콩, 해란초도 있으니 척박한 땅을 벗삼아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면서 우리 삶에 닥쳐오는 고난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 갯무.ⓒ김민수

갯무는 우리가 즐겨먹는 채소인 무가 그 조상이다. 밭에 심었던 무의 씨앗들이 밭의 경계선 밖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갔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밭에서 가꿔지는 무들은 주로 뿌리를 중심으로 발달한 반면에 갯무는 뿌리보다는 꽃이 더 아름다워졌다.
밭이라는 공간에서 자유를 찾아 가장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곳은 바다에 인접한 해안가였을 터이니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날아가 그 곳에서 삶의 둥지를 틀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찾아 스스로 떠난 것이다.
자유라는 것, 그것은 그저 안주하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가운데서 얻어진 다는 것을 보여주는 꽃, 그래서 그 꽃말을 '바람 따라 자유의 삶을 사는'이라고 붙여 주었다.
식용적인 가치로야 밭에 심기운 무를 따라갈 수 없겠지만 그 효능이나 품고 있는 속내는 전혀 다르지 않은 꽃은 그 마음이 바다를 닮아 넉넉한 꽃이다.

▲ 갯씀바귀.ⓒ김민수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꽃을 말하라면 씀바귀류의 꽃들을 서슴없이 추천한다.
봄나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쓴나물 종류이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씀바귀인데 잃었던 입맛을 찾는데는 그만이다.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시골에 사시고, 젊은 자식들은 도시에 살게 마련인데 나는 거꾸로 된 생활을 하고 있는 덕에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근심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봄이면 겨우내 잠들었던 몸이 덜 깨어 입맛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봄이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봄나물을 하러 간다. 달래, 냉이, 씀바귀, 고들빼기 등을 깨끗하게 뜯어서 서울에 사시는 연로하신 부모님께 보내드리면 덕분에 입맛을 찾으셨다며 즐거워하신다.
바닷가 모래 위에서 뜨거운 태양을 뒤로하고 작은 연꽃처럼 피어나는 꽃인 갯씀바귀는 그 줄기가 모래땅 깊은 곳까지 내려가 있어서 웬만한 불볕더위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바닷가 모래 속에도 생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생명력이 강한 것들이라 생각되어 한 줌 캐다가 바닷가보다 환경이 좋은 화단에 심었더니 이파리가 엄청나게 퍼진다. 그러나 이파리가 퍼진 만큼 꽃은 피지 않는다. 피기는 피는데 바닷가 보다 덜 예쁘고, 꽃의 수도 적다.
척박함이 그에겐 더욱 더 예쁜 꽃들을 피워 가는 약이었던 것이다. 잎만 무성하게 자라는 화단에 심긴 갯씀바귀에게 미안했다.

▲ 갯메꽃.ⓒ김민수

갯씀바귀 곁에는 갯메꽃이라는 것이 함께 어루러져 있다.
한 겨울에도 푸른 이파리를 내고 있는 갯메꽃은 고난의 겨울, 넓은 바다의 마음을 다 담은 꽃이다. 국숫발같이 생긴 메꽃의 뿌리는 어린 시절 논두렁에서 많이 구할 수 있었다. 아직도 땅이 얼어 푸른 싹이 나오기 전 논두렁 같은 곳을 파보면 하얀 메꽃뿌리가 먹음직스럽게 드러났다. 생으로도 먹었지만 쪄서 먹으면 고구마 맛 같은 것이 구수했다.

1960년대 초반에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덕에 온전한 보릿고개는 아니지만 배고픔의 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친구들 중에도 하루 세 끼를 건사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런 친구들과 산이나 들로 돌아다니며 칡도 캐고, 메꽃뿌리도 캐느라 겨울 해가 짧았다. 어쩌면 치열한 생존투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쌀밥은 아니지만 밀가루로 만든 음식으로나마 삼시 세 끼를 챙겨먹던 나보다 친구들이 더 실한 칡과 메꽃뿌리를 캐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조금 철이 들 무렵에는 메꽃만 보면 슬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메꽃보다 화려한 나팔꽃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은은한 메꽃은 우리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 메꽃, 허기를 달래주고 군것질에 목말라하던 꼬마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던 메꽃이 이렇게 갯메꽃이라는 이름으로 바다에도 피어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 갯장구채.ⓒ김민수

꽃은 장구모양을 닮았고 줄기 장구채를 닮은 데다가 갯바위를 벗삼아 피니 갯장구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장구채라는 꽃에 비해 얼마나 야무지고 단단한지 모른다. 갯바위를 벗삼아 피면서 먼바다를 바라보는 모양새가 마치 바다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모습니다.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에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잔치라도 거나하게 벌리려는 것인지 바닷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은 '덩기덕 쿵딱!' 장구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듯 하다.

바다가 그리워 갯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저 바다의 근원으로부터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의 그 곡선을 따라
잔잔한 바람을 벗삼아 춤을 춰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 광풍이 불면
바다를 집어삼킬 듯한 파도를 따라
미친 듯 뿌리가 뽑혀나가도 좋을 듯
온 몸을 흔들어 보기도 합니다.

하루가 시작될 무렵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
해맞이를 하며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파도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햇살이 따가운 날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바람이 살가운 날에는 한껏 흐드러짐으로
늘 한 마음, 그리움으로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바다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기에
에메랄드빛 바다거나 검푸른 바다거나
잔잔한 바다 갈매기 끼룩 나는 바다거나
폭풍우 포효하는 바다거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운 마음으로
나의 님 바다를 한껏 껴안아봅니다.

-자작시 '갯장구채'

▲ 갯금불초.ⓒ김민수

꽃 이름에 '금'자가 붙으면 노랑색인 경우가 많다.
같은 꽃이라도 척박한 땅에 핀 꽃이 향기도 더 진하고, 꽃도 더 화려하다고 한다. 그래야 곤충들을 유인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니 어쩌면 우리 삶에 다가오는 고난 같은 것들은 우리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친구와도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르긴 하겠지만 금불초에 비하면 갯금불초는 별로 예쁘지 않다. 금불초가 마치 개망초처럼 총총한 꽃잎을 간직하고 있는 반면에 갯금불초는 하나 둘 셀 수 있을 정도의 꽃잎을 가졌을 뿐이며 줄기도 바닥을 기면서 자라기에 고개를 들어 바다를 제대로 쳐다 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꽃이다.

'저렇게 바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바에 바다에 필 것은 또 무엇이람?'

한 겨울에도 푸른 잎을 간직하고 있어서 다육질이다. 게다가 조금만 따스한 기운이 있으면 한 겨울에도 한 두 송이씩 꽃을 피우다가 추위에 시들어버리곤 한다. 일명 '바보꽃'을 많이 피우는 꽃이다.

바보꽃을 많이 피우는 갯금불초.
그러나 바보꽃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건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규정지어준 것이지 자연은 그저 최선을 다해서 피고 질뿐이니 한 겨울에 피어났다고 해서 굳이 '바보'라고 놀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 갯까치수영.ⓒ김민수

꽃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아이들과 동행할 때가 종종 있는데 꽃 이름을 알려주면 기발한 상상은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갯까치수영'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이들은 이렇게 풀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까치가 바다에 수영을 하러 왔다가 꽃이 되어서 갯까치수영이다.'

이 얼마나 기발한 상상인가?
훨훨 날아 창공을 비상하는 까치, 요즘이야 과수농가의 골칫거리로 전락했지만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고 해서 예로부터 길조로 불리던 까치, 아침에 잃어나 까치가 울면 오늘은 우체부가 어떤 좋은 소식을 가져오려나 종일 우체부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서인지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도 많았던 것 같다.

갯까치수영은 순백의 꽃도 아름답지만 마른 가지에 동글동글한 씨앗을 붉게 맺고 있는 모습도 아름답다.

꽃마다 예쁜 구석이 다르다.
흔히들 꽃만 보지만 어떤 꽃은 열매가 더 예쁘기도 하고, 어떤 꽃은 향기로 인해 사랑스러운 꽃이 있으며, 어떤 꽃은 뿌리가 더 아름다운 꽃도 있고, 이파리가 백미인 꽃도 있다. 심지어는 진짜꽃이 아닌 헛꽃이 더 화사할 때도 있는 것이다.

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사람도 그런 것은 아닌지?

▲ 갯완두.ⓒ김민수

보랏빛 갯완두가 해안가를 물들여 갈 때쯤이면 완연한 여름이다.
그런데 이 갯완두는 진한 보랏빛으로 피어났다가 비와 바람과 풍상을 겪으면서 점차로 그 빛을 잃어가면서 점점 하얀빛으로 변하는 꽃이다.
처음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얀갯완두를 발견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 피어나는 것들 중에는 하얀 꽃이 없으니 뭔가 이상해서 줄기들을 좇아가 보니 보랏빛으로 피어났다가 점차로 그 색을 잃어버린 것이다. 조금은 실망.

사람들의 욕심을 그런가 보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면 뭐 그리 좋다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보면 뭐 그리 좋다고 하는지 그 소유욕이 남다른 것이 우리네 사람들이다.

보라색이 잘 어울리면 미인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보라색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보라색이 상징하는 바가 '고난'이니 우리 삶에서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보라색꽃을 총총히 달고 피니 갯완두는 미인인 데다가 고난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꽃인가 보다. 제주도의 검은 화산석 갯바위들이 보랏빛 갯완두로 단장을 하고는 바다를 바라본다. 그 어울림이 각별한 꽃이다.

▲ 갯강아지풀.ⓒ김민수

강아지풀이라는 이름은 강아지의 꼬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강아지풀'이라는 이름보다는 '똥개풀'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부르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꽃 같지도 않은 꽃을 피우는 똥개풀은 그 옛날에는 구황작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니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알터이다. 그래서인지 금성을 개밥바라기라고도 하는데 서쪽 하늘에 샛별이 뜰 때쯤이면 배가 고파 주인이 밥 주기를 기다리는 똥개의 배고픔을 담아 붙여준 이름이 아닐런지.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똥개꼬리처럼
바람에 살랑거리며 반갑다고 아우성치는 강아지풀

길가
여기

저기

똥개처럼
온 들판을 지키며
개밥바라기를 바라보며 우는 똥개처럼
온 밤을 지키며

별과
바람과
해와
달과
파도를 너의 마음에 담고 어쩔 줄 모르는 행복에
좋아라하는 강아지풀

- 자작시 '강아지풀'

▲ 갯쑥부쟁이.ⓒ김민수

'쑥을 캐는 대장장이의 딸'이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산골에 가난한 대장장이가 살고 있었단다. 자그마치 아이들이 12명이나 되는데다가 아내는 아파서 누워버렸으니, 큰딸이 아이들에게 나물을 해다 죽도 끓여주고 장에 내다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근근히 꾸려갔다네. 그러던 어느 날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주었지만 그 노루를 좇던 사냥꾼이 함정에 빠져있는 것을 구해준 이후 한 눈에 반해 버리고 만다. 젊은 사냥꾼은 이내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돌아오지 않고 큰딸은 상사병에 걸려버렸어.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나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했기에 그 날도 나물을 하러 나갔겠지. 그 때 구해주었던 노루가 나타나서 구슬 세 개를 주며 구슬 하나마다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겠지. 당연 첫 번째 소원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것이었어.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 어머니가 병을 툴툴 털고 일어나신 거야. 이번엔 사냥꾼을 보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만나보니 이미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는 몸이야. 그래서 다시 사양꾼을 가족들에게 보내달라고 하니 세 가지 소원을 다 사용했어. 그래도 사냥꾼을 못내 그리워 하다가 그만 절벽에서 발을 헛딛어 떨어져 죽고 말았지 뭐야. 그 자리에 노란구슬을 품은 듯한 꽃이 피어나 사람들이 '쑥을 캐는 불쟁이의 딸'이라는 뜻으로 '쑥부쟁이'라고 했다네 그려.

그 쑥부쟁이가 깊은 산골에서 사랑하는 님을 찾아 바다까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진다는 것은 그 언젠가도 이 꽃이 피어있었다는 증거고, 누군가는 이 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이런 이야기도 지었을 것이니 꽃마다 각별하다.

▲ 갯바위대극.ⓒ김민수
암대극은 화려하지 않다.
멀리서 보면 은은한 노란빛을 간직하고 한 무리씩 피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뿐이지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다에 피는 것치고는 키가 제법 크다는 것이다.
까치발을 들고 있는 형상이라고나 할까?

아시다시피 바다는 바람이 세다.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집채만한 거센 파도가 온 세상을 삼킬 듯 달려온다.

갯바위대극이 피는 5월이면 간혹은 이른 무더위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5월이라도 바람 부는 날 새벽이나 밤에 바다에 서면 추위로 몸을 웅크리게 된다. 뱃사람들이 거칠다고들 하지만 거칠다는 말보다는 강인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뱃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난 뱃사람들은 거칠다기 보다는 따스하고, 너른 바다의 마음을 가진 분들이었다. 단지 그 속내를 표현하는 것이 서출러 무뚝뚝하게 보일 뿐이다.
뱃사람들이 강인하게 된 까닭은 넓은 바다에서 파도와 바람과 맞서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의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꽃들도 어쩌면 들이나 산에 피어 있는 꽃들보다는 더 강인할 것이다.

갯바위대극은 뱃사람을 닮은 꽃이다.
화려하지 않아서 그저 꽃인지 아닌지 지나쳐 버릴만한 꽃이지만 찬찬히 바라보면 예쁜 구석들이 너무 많은 꽃이다.
화사해서 단 번에 시선을 끌었다가 이내 싫증나게 하는 꽃보다 은은하게 오래 가슴에 남아있는 꽃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닌지,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혹하지 말고 그 속내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이 정말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꽃이다.

※ 김민수님은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것을 즐겨 합니다. 자연산문집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 '을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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