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임관호 지사③] 임 지사 신변위협 여관에서 침숙...계엄령 발동

치안대책수습위원회는 9월 23일 진정단 파견에 필요한 경비가 마련되자 민간대표로서 박우상, 박치순, 김충희, 강지수와 도청에서는 이인구 사회과장, 사회단체에서는 김인선 대한청년단장, 김재능 서북청년단장 등이 진정단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상경 즉시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할 수 있었다. 진정단은 별도로 마련해간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제주도의 사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도민들을 위해 정부가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토벌대가 양민과 폭도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즉결처분함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아 도민들의 원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들의 말을 들은 뒤에 "이미 이응준(李應俊) 참모총장으로부터 제주도 사태에 대해서 보고를 받아 잘 알고 있으나 그토록 심한 줄은 몰랐다"면서 "제주도에는 아직도 사상무장이 덜 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에 온 사람들이 잘 계도해 나가달라"고 강조하고 "도민들이 요구한 사항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나갈 터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 있으면 관계장관들을 내려보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진정단이 제주에 내려온 뒤 며칠만에 이윤영(李允榮) 사회부장관과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이 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현지 실태조사차 내도했다. 이들은 임관호 지사와 군·경 관계관으로부터 사태경위를 보고받은 데에 이어서 진정단으로 상경했던 주민 대표들을 만났다.

제주도에서는 이들을 환영하는 도민대회를 관덕정 광장에서 가졌다. 정부지원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도민들은 사회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의 내도에 거는 기대가 컸던 것이었다.
이 장관은 환영대회에서 "우리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파견됐으며 제주도의 사태수습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고 도민 여러분은 생업에 열중해달라"고 말했다.

신 장관은 양민학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 "앞으로 국방장관의 명령 없이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즉결처분을 못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신 장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군 토벌대는 그해 11월부터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을 내리면서 초토화 작업을 밀고 나갔다)

구호물자는 약속대로 도착했다.
진정단과 함께 상경했던 이인구 사회과장은 일행을 먼저 보내고 서울에 남아 사회부 사회국장으로부터 미군용 C-레이션과 의복 등 구호물자 20대 트럭분을 서울시 회현동 소재 사회부 창고에서 인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과장은 그때 자주 일어나고 있는 노상절도를 맞으면 큰 일이다 싶어 사회부 직원들의 협조를 얻어 인천항까지 무사히 운송시킬 수 있었다. 구호물자는 다시 화물선을 통해 제주로 수송됐다. 선박은 제주주정공장 소속 100톤급 청주호를 빌었다.

이 과장은 배를 먼저 출발시키고 나서 목포를 거쳐 제주로 오다가 추자도에서 청주호를 만나 함께 제주항으로 왔다. 구호물자는 제주항에서 하역되자마자 수협창고로 옮겨져 보관된 후 식량과 피복별로 분류됐다. 일주일에 걸쳐 분류된 구호물자는 읍면별로 배분됐다.

여수순천 사건...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보복 이어져

이에 앞서 제주도내에는 우익인사들로 구성된 담수계(淡水契)가 8.15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조직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도제실시의 유공자와 지역 유지들인 김문희 김충희 박종훈 양홍기 김희수 김석호 이한철 등 담수계는 재산 무장대의 토벌을 위해 파견된 군대와 경찰에 대한 지원을 도맡는 것은 물론이며 '애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도정에 깊숙이 간여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제주읍의 폭탄테러와 인공기 게양사건이 있은 뒤 제주읍 관내 13개 이장(里長)이 총사직함으로써 또다시 적잖은 충격을 던졌다. 이처럼 제주사회의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장단은 외형상 개인신병과 가정형편을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으나 실제는 소요사태로 인한 생명의 위협 때문이었다.

제주사태는 육지부에까지 파급됐다.
1948년 10월20일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전라남도에 주둔하고 있는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일명 麗水 新月리 부대)가 제주에 파견되기 전날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麗水順天반란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제주사태가 예상보다 쉽게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암살되는 불상사까지 발생하자 그해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에 주둔중인 제14연대의 1개 대대 병력을 제주에 파견키로 돼 있었다.

제주파견에 따른 작전계획을 사전에 입수한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부대 내의 조직책을 통하여 다른 부대원들을 선동하여 총격을 벌였다. 이 바람에 여수와 순천에서는 쌍방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보복의 악순환으로 수 천명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수많은 가옥이 소실 파괴됐다.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난 직후 제주지방은 다시 좌익에 의한 교란행위가 곳곳에서 발생해 관계기관을 긴장시켰다.
이른바 '11.7 사건'이라고 불리는 제주지역 적화음모사건이 거사 하루 전 계획에 가담했던 일행의 제보에 의해 적발됨으로써 제주도 전체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여순 반란군과 연계한 11.7사건 적발...좌익세포조직 타격

제주도내 좌익세력은 여순·순천 반란군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자신들과 합세하여 제주도를 적화시킬 목적으로 그해 11월7일을 기해 도 전역에서 거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각 기관에 침투해 있는 좌익세력에게 이날 낮 12시를 기해 일제히 봉기, 경찰 무기고를 습격하여 제주도청을 비롯한 경찰서 등 관공서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거사 하루전 임관호 지사는 위생계장 고승호(高昇浩)로부터 급한 보고를 받았다.
고 계장은 "내일 낮 12시를 기해 제주도 전역을 적화시키려는 좌익들의 음모가 확인됐다"고 말하고 "도청·경찰국·경찰서·도지사관사 등에 폭발물이 장치돼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임 지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즉시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제보자인 경찰구내 이발사 서용각을 대동하여 폭발물 제거작업에 나서는 한편 거사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도청 직원과 읍사무소 직원, 학교 교사 등을 모두 검거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내 관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 넣었던 '11.7 사건'은 도청 구내 이발사 서용각이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고 위생계장에게 계획을 털어놓음으로써 사전에 적발할 수 있었으나 관가는 아직도 각 관공서마다 좌익세력이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더했으며, 좌익세력은 관가에 침투되고 있는 세포조직의 대부분이 와해되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임 지사는 '11.7 사건'직후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도지사 관사를 비우고 관사 앞에 있는 영주여관에서 묵는 일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지사 관사에는 경찰과 군인들을 배치시켜 경비를 맡도록 했으나 신변보장이 힘들다는 이유로 여관에 묵었으며 도지사가 없는 날에는 헌병들이 잠을 잤다.

이러한 일들이 있은 뒤에 제주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제주도에 대한 계엄령 선포는 사실이 아니다”고 공식 해명하는 등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틀만인 그해 11월21일 계엄령이 실제 발표돼 주민생활을 크게 제약했다.

당시 국방부 보도과는 "요즘 모든 신문과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제주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된적이 없으며, 다만 제주도 각처에 폭동이 일어나 군에서는 작전상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어 일부에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로 해명했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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