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잔혹했던 제주 4·3의 기억, 서귀포 토산리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마을 해안가에는 최근에 단장된 조그만 공원이 있다. 

주민들은 이 해안을 '너븐개'라고 부른다. 해안도로를 운전하던 관광객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제주의 해안 경관을 감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검은 바위와 푸른 바다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해안선과 그 너머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그려내는 수평선을 선명히  감상할 수 있다.
  

   
모자상 토산2리 속칭 너븐개 해안에 세워져 있다. 어버이날을 전해로 누군가 꽃바구니를 놓고 갔다.  ⓒ 장태욱 

4·3의 증거, 토산리 모자상

이 너븐개에는 해안선과 수평선 말고 방문객의 시선을 끄는 또 다른 구경거리가 있다. 이 마을 주민 김승률씨가 기증해서 세웠다는 모자상이 그것이다. 모자상에는 이 상을 세운 동기를 짐작할 수 있는 서간문이 적혀있다.

어머님

저희들을 이토록 키워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백성은 수난을 당하는 법!

1948년 4·3사건으로 인하여 토산리 거주 리민은 만18세부터 만 40세까지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 다행히 살아남은 우리의 어머님들은 텅 비어있는 초가집 지붕 밑에서 젖먹이 아이, 철없는 어린 자식을 품에 품고 사면이 고요히 잠든 잠하늘의 별과 달을 쳐다보며 몇 년을 몇 십 년을 말없이 우셨는고! 이십대의 젊은 나이였기에 저희들을 버리고 다른데로 가셔서 행복하게 사실수도 있었으련만… 금지옥엽으로 우리들을 키우셔서 표선면 제일의 역군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까만 머리 백발로 변하시고 허리 굽고 얼굴에 깊은 골이 패었어도 지난날을 뒤돌아보시며 한 치도 후회하심이 없이 마디 굵은 손으로 손자를 어루만지시는 자비로운 어머님을 뵐 때 우리 리민들의 가슴을 적시어 드는 이 세상 제일의 어머님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뜻을 모아 이 모자상을 세웁니다. - 2002년 12월 김승률

김승률씨는 개인적으로 4·3유족이 아니다. 다만 4·3 당시 마을이 겪었던 참혹한 피해와 이 마을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을 위로하기 위해 이 조각품을 기증했다고 한다.

토산리 마을이 4·3 당시 참상을 당한 것은 토벌대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48년 12월의 일이다.
  

▲ 향사 옛터 토산2리 마을회관 인근에 있다. 1948년 12월 15일 주민에 대한 토벌대의 만행이 시작된 곳이다.  ⓒ 장태욱 

토산리에 영혼 결혼식이 많은 이유

토산리는 토산1리(웃토산)과 토산2리(알토산)으로 구분되는 마을이다. 당시 토산리는 200가호 정도의 조그만 마을로, 진압군의 관심을 받을 만한 배경이 없는 마을이었다. 토산1리는 해안에 위치해 있고, 토산2리도 해안에서 2~3Km정도 떨어져 있어서 소개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1948년 12월 12일에 토벌대는 토산1리에 대해 소개를 명령했다. 집을 놔둔 채 토산2리로 내려온 1리 주민들은 토산2리 주민들에게 집이나 외양간을 빌려서 거처를 마련했다.

소개가 일어난 지 며칠 후인 12월 14일에 갑자기 군인들이 토산2리 마을로 들이닥쳤다. 12월 15일(음력 11월 15일)이 되자 토벌대는 이 마을 주민들을 모두 마을 향사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들을 모두 결박했다. 또 여자에겐 달은 쳐다 보라고 한 후 젊고 예쁜 처녀들도 함께 결박했다. 그 날은 보름이었기에 달이 매우 밝았다고 한다.
  

▲ 표선 백사장 최근 관광지로 떠오르는 곳이다. 제주 4.3 당시 이 일대에서 주민에 대한 토벌대의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 장태욱
▲ 표선 도서관 입구 표선 백사장 서쪽에 당캐가 있다. 표선 도서관은 당캐 근처에 있다. 도서관 입구가 토산 주민들이 학살을 당한 장소라고 한다.  ⓒ 장태욱 
   
군인들은 결박한 토산 주민들을 끌고 가서 표선국민학교에 감금한 후 모두 표선 백사장에서 집단 학살했다. 남자들이 학살된 것은 12월 18일과 19일 일이고, 여자들은 그 일주일 후에 화를 당했다.

당시 젋고 예쁜 처녀들을 골라 수용했다는 점과 남자들을 먼저 처형하고 여자들을 일 주일 후에 처형했다는 점은 당시 여성 수감자에 대해 토벌군이 성적유린을 자행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토산리 주민에 대한 학살은 4·3 당시 토벌군이 자행한 수많은 만행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패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 총살장면 4.3 당시 진압군이 총살을 집행하는 장면이다.(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촬영)  ⓒ 장태욱  

주민들은 이 마을 사람들이 왜 화를 당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이 마을에는 사혼(死婚)한 가정이 많다. 처녀 총각으로 죽은 망인끼리 영혼 결혼식을 치르게 하고 양자를 데려다 대를 이었다.    
  

▲ 아버지에게 남긴 편지 4.3 때 아버지를 잃은 분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부친에게 보내는 편지(제주4.3평화 기념관에서)  ⓒ 장태욱  

살아 남은 자의 한, 어찌 위로할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국회는 제주 양민학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 토산 주민들은 148명의 희생자를 신고했다. 또 1987년 이 마을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4·3사건 실상기'라는 진정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희생자 수가 157명으로 기록됐다.
  

▲ 김해생 할머니 86세다. 4.3 당시 물질 하러 육지로 나가서 화를 면하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오빠 두 분을 잃었다.  ⓒ 장태욱  

토산 2리 마을 회관 앞에서 이 마을 김해생(86)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토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4·3 당시 20대 젊은 처녀였는데,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내가 어릴 때 물질을 배웠지. 돈을 벌러 4년 동안 육지에 나갔다 와보난 그 난리가 난거라. 두 오라방이 다 죽어 불고 벗들도 다 죽어성게."

아직도 4·3의 피해자들에게 이념의 굴레를 덧씌우려 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시 만행을 기억하는 자들이 아직도 살아있는데, 저 뼛속 깊이 사무친 주민들의 한을 어찌 다 감당하려 하는가?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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