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전설을 찾아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드는 곳

제주도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 착륙하기 이전에, 비행기 창으로는 검은 현무암과 푸른 바다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해안을 구경할 수 있다. 이 때 내려다보이는 해안이 제주시 용담동 바닷가고, 비행기는 그 용담 해안에 있는 활주로에 착륙한다. 용담동에 있는 제주국제공항은 제주와 다른 지역을 잇는 하늘 길의 관문이다.

▲ 제주공항 제주시 용담동에 있다. ⓒ 장태욱
전설을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던 용두암과 용연

용담동에는 제주국제공항뿐만 아니라 용두암(龍頭岩)과 용연(龍淵)이 있어서 더 유명하다. 용두암과 용연은 오랜 전부터 관광객들의 발길을 끄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광지였다.

용두암은 용의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는 현무암질 바위를 일컫는다. 용두암은 약 50만년전 용암이 위로 분출되면서 형성된 암석으로 보이는데, 바위의 기이한 형상으로 인해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용두암 현무암질 용암이 분출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용 머리 형상을 하고 있어서 용두암이라 했다. ⓒ 장태욱
용연은 제주시에서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는 한천의 하류에 있는 소(沼, 연못)를 말한다. 용연은 주변에 높게 서있는 바위들과 푸른 이끼와 잡목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친 모습과 같다하여 조선시대에는 취병담(翠屛潭)이라 부르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매해 음력 7월 16일이 되면 관리와 유배인들이 기생을 거느리고 이곳에 배를 띄워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과거 이 연못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용담이라는 지명도 용연의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용담 일대에서 발굴된 유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고인돌 유적부터 한두기 마을이 형성될 때까지 연속과 불연속의 과정

한천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B.C 10세기 ~ A.D 전후로 추정)의 고인돌이 발굴되었고, 1985년 용담2동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는 철제 장.단검, 화살촉, 철도끼, 마제석검, 홍옥 구슬 등의 부장품이 나온 바 있다. 오래전에는 사람들이 한천을 중심으로 집단생활을 유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용연 조선시대 지방관들과 유배객들이 풍류를 즐겼던 연못이다. ⓒ 장태욱
용담에 가장 먼전 설촌이 이루어졌다고 알려진 한두기는 한천의 하류가 바다와 만나는 곳을 말한다. 동네가 마치 큰 항아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한독'(大甕.大獨)이라고 하다가 '한두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두기는 용연을 중심으로 그 동쪽을 '동한두기', 서쪽을 '서한두기'라 하였다.

10세기를 전후부터 오랫동안은 현 삼도2동 무근성 일대가 제주시의 중심부였다. 그 후 용담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 경이다. 1760년 경 지금의 동한두기에 남평문씨가 정착했다. 그러다가 1827년(순조 27년)에 제주향교가 용담1동으로 이설되고, 1920년에 제주의 시가지가 제주읍성 밖으로 확장되면서 용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약 100년 전부터 서한두기와 동한두기를 합쳐서 용담리라고 불렀다. 용연 주위에 형성된 마을임을 암시하는 이름이다. 그러다가 1955년에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고 제주읍 당시의 25개 법정리가 40개 행정동으로 개편되었다. '용담리'는 3개동(용담1.2.3동)으로 분리되었다가, 1962년 1월 1일 제주시 40개 동(洞)이 14개 행정동으로 통합되면서 용담1.2.3동이 다시 '용담동'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10월 1일에는 용담동이 다시 용담 1.2동으로 분동되었다.

▲ 용담 해안도로 용두암 서쪽 말머리해안에서 시작해서 도두동까지 이어진다. 새롭게 관광코스로 떠오르는 곳이다. ⓒ 장태욱
용담 해안도로, 옛 사람들이 채취가 바다에 남아 있는데

용두암 및 용연과 더불어 최근에 관광객들에 각광받는 곳이 또 있다. 용두암 서쪽 해안에서 시작해서 도두까지 이어지는 제주시 해안도로가 바로 그곳이다. 이 도로는 바로 눈앞에 푸른 바다를 끼고 지나게 되는데, 과거 이 일대 주민들이 바다에 남겨놓은 삶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생태학의 관심 대상이 되기도 하고, 민속학의 탐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제주시 용두암의 서쪽에 제주사대부속고등학교(사대부고)가 있다. 사대부고의 북쪽에 있는 해안을 말머리해안이라 한다. 해안가에 말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머리해안에는 지하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는데, 이 샘물을 말머리물이라 한다. 사대부고가 자리 잡고 있는 동네를 말머리마을이라 한다.

지금 사대부고와 사대부중이 자리잡고 있던 터는 원래 제주대학교가 세워졌던 곳이다. 1967년 용담동에 세워졌던 제주대학교가 80년대 제주시 아라동으로 이전하면서, 이 곳에 중고등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 다끄내포구 포구가 들어설 수 없던 조건에서 주민들이 돌을 쌓고, 바위를 쪼개서 만든 조그만 포구다. 과거 이 일대에 다끄내 마을이 있었는데, 공황이 확장되면서 주민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 장태욱
말머리해안에서 시작된 해안도로는 서쪽으로 이어진다.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카페, 음식점 등이 길가에 줄을 지어 들어서 있다. 북쪽에는 바다를, 남쪽에는 수많은 업소들을 끼고 1.5Km쯤 가다보면 레포츠공원이 나온다. 넓은 주차장과 더불어 축구장과 농구장이 갖춰져 있다. 취사도 할 수 있으니 여름에 시원한 제주 해안에서 야외 식사를 원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추천할 만한 장소다.

레포츠공원 바로 앞에는 배 몇 척이 정박할 만한 그림같이 조그만 포구가 있다. 이 포구를 '다끄내 포구'라 한다. 이 포구가 있는 바다가 원래 해안선이 단조로워서 포구가 들어설 수 없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돌을 쌓고 바위를 깎아내어 포구를 만들었기 때문에 '(터를)닦은 갯가'라는 의미로 '다끄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포구와 레포츠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일대에 과거에는 '다끄내 마을'이 있었다. 이두식으로 표기하여 '수근동'(修根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1985년 제주국제공항이 확장되면서 다끄내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다끄내 포구 입구에는 수근동유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당시 고향을 떠나는 주민들이 아쉬운 마음을 비석에 새겨놓은 것이다.

▲ 어영공원 이 일대에 연대가 있다. 야간에 조명을 비추면 인근의 이국풍의 카페와 더불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장태욱
다끄내 포구를 서쪽으로 200m쯤 지난 곳에 수근연대가 있다. 과거에 이 연기를 피워 급한 소식을 전했던 중요한 통신수단이다. 과거 기록에 의하면 이 곳에 장수 6명과 봉수군 12명이 배치되어 3교대로 24시간 지켰다고 한다. 수근연대는 동쪽으로는 별도연대와, 서쪽으로수근연대가 있는 주변을 '어영마을'이라 하는데, 용담동의 서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어영'은 '어염'이 변형해 생긴 말이라고 한다. 이 일대에 바위 위에서 주민들이 소금을 만들었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 해안도로가 들어서면서 원래 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 섯물 어영 해안에 있는 섯물이다. 주로 여자들이 사용했다. ⓒ 장태욱
어영마을 해안에는 현무암질 바위들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그 바위들 틈으로 샘물이 솟아나는데, 동물과 섯물이라고 한다. 동물은 동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남자들이 주로 사용했다. 반면, 서쪽에 있는 섯물은 여자들이 주로 사용했다.

이 근처에는 최근에 조성된 공원이 있는데, 마을 이름을 따서 어영소공원이라 한다. 저녁에는 공원 주변에 오색 조명이 켜지는데, 불꽃이 만들어내는 장관이 주변의 이국풍의 카페들과 더불어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말머리해안에서 어영해안에 이르는 해안도로에는 현재 주민들이 대부분 이주하고 살지 않는다. 지나는 관광객들과 연인들의 발길을 끌기 위해 들어선 카페와 횟집 등이 주민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 해녀 어영 바닷가에 해산물이 풍부하게 난다. 가까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장태욱
하지만 주민들이 떠난 후에도 과거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샘물과 포구 소금밭 원담 등은 그대로 남아있다. 게다가 고동, 게, 배말, 말미잘, 미역, 지충이, 톳, 모자반 등의 해안 동식물들이 풍부하게 남아서 옛 주민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용담동 해안도로가 더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이유다.

▲ 제주향교 조선시대 태조 원년에 세워졌다. 지방교육의 요람이었다. ⓒ 장태욱
제주교육의 요람, 제주향교와 제주중학교

한편, 제주서문시장 앞에는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던 제주향교가 남아있다. 제주향교는 1392년(태조원년)에 제주성내에 창건되었다가 187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향내에는 명륜당, 대성전, 계성사 등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제주향교는 국가로부터 토지, 책, 노비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제사만 지내고 있다.

제주향교와 인접한 동쪽에는 제주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제주중학교는 1947년 제주향교의 뜻있는 유림들이 세운학교인데, 4·3의 피해를 많이 당한 학교다.

▲ 현경호 선생 비석 현경호 선생은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이었다. 4·3당시 좌익활동에 가담했다가 진압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비석은 제주중학교 운동장에 세워져 있다. ⓒ 장태욱
제주중학교 교문 오른쪽에는 이 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던 현경호 선생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는 1947년 결성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과 '3·1절 기념투쟁 제주도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좌익 활동이 원인이 되어 아라동 박석내에서 진압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1948년 12월 23일의 일이다. 비석에는 현경호 선생이 "1948년 12월 23일에 애석하게 작고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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