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임관호지사 ④]제주도청 별관 전소...임관호 지사 전격 경질

국방부는 1948년 11월21일 제주도 전역에 대한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11월23일에는 계엄령 포고령 제1호로서 교통제한, 우편·통신·신문·잡지 등의 검열, 부락민 소개(疏開), 교육기관에 대한 제한, 폭동에 관한 벌칙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후 애월 일부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처음으로 내려진 다음 12월 중순부터는 중산간 부락에 대한 일제 소개령이 내려졌다. 토벌대는 겨울철을 앞두고 재산 무장대들이 식량난에 봉착하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중산간 마을을 모두 소개시킴으로써 식량 확보를 사전에 완전히 차단해버린다는 계획이었다. 거듭된 흉년과 폭동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주민들은 설상가상으로 겨울철에 강제소개명령을 받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이주와 살림에 꼭 필요한 간단한 생필품만을 챙기고 해안마을로 옮겨졌다. 더구나 군·경 토벌대는 주민들이 떠난 대부분의 가옥들을 강제로 불태워 버림으로써 나중에는 심각한 민생문제를 야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산간 주민들은 소개령 와중에 애매하게 희생되는 일이 많아 관(官)에 대한 불신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금유용 감추기 위해 도청 방화...관덕정 임시건물 사용

새해를 이틀 앞둔 1948년 12월29일 그동안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가 충청남도 대전으로 이동되고 대전에 주둔하고 있는 제2연대(연대장 咸炳善 중령)가 제주에 파견됐다.
1949년 정초 제주도청에 뜻하지 않은 화재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날은 모든 관공서가 연휴 마지막 날로서 공무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때였던 1월3일 밤이었다.

'4.3 사건'의 와중에서도 제주도 행정을 총괄해왔던 도청의 별관에 불이 난 것은 이날 오후 8시께였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한 불길은 별관 전체를 모두 태우고 본관으로 옮겨 붙기 직전에 도청 옆에 위치한 소방서의 긴급 출동으로 간신히 진화시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별관에 보관하고 있던 의류와 양말 등 구호물자는 물론이며 도청의 각종 자료와 서류들이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경찰과 도청은 화재사건 직후 도청에 침투하고 있는 좌익계의 소행이거나 좌익계의 사주를 받은 내부 직원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전개했다. 며칠간의 수사에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한 경찰은 다시 숙직직원을 대상으로 수사를 재개한 결과 숙직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임(林)모 서무계장이 각종 배급물품을 관리하고 있는 책임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1월1일부터 1월3일까지 연휴동안 숙직실에서 화투를 하다가 많은 돈을 잃은 사실을 알아냈다.

경찰은 林 계장을 불러 추궁한 끝에 화투판에서 돈을 잃자 직원들에게 나눠줄 양말을 팔아 써버린 뒤에 그것을 보충할 방법이 없자 증거를 없애고 화재의 원인을 좌익계열로 돌리기 위해 방화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林 계장은 즉각 구속됐다.

도청 별관 방화사건은 모처럼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도정수행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서류와 비품들이 불에 탔는가 하면 본관 일부분도 불에 그을려 일반사무를 볼 수 없게 됨으로써 도정은 마비상태나 다름없었다.

임 지사는 홍순원 총무국장 등 간부직원들을 불러 대책을 숙의했다. 일단 도청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대상지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제주도립병원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환자들의 입원실 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관덕정을 임시 사용하기로 했다.

임 지사는 지사실을 비롯한 주요 관리부서에 대해 관덕정으로의 이전을 지시하고 상공·수산과 등은 피해가 적은 도청 본관의 일부분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제주도는 도제실시 당시에 북제주군청이 사용하다가 비어 있는 관덕정을 개보수하고 판자로 칸막이를 설치하여 임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무장대 귀순위해 지역유지 중심의 선무공작대 조직

그 무렵 군·경 토벌대는 재산 무장대에 대한 진압작전을 한층 강화시켜 나가는 한편 그동안 잇단 사태로 시달릴 대로 시달린 주민들을 위안시키고 무장대들의 귀순을 유도하기 위해 언론인과 지역유지·교사들로 선무공작대를 조직했다.

그해 1월 중순께 함병선 제2연대장의 행정고문인 이기영(李基榮)을 단장으로한 100여명의 선무공작대가 편성됐다. 여기에는 김용수(金瑢洙) 홍완표(洪完杓) 김국배(金國培) 송훈(宋勳) 고영일(高瀛一) 김종철(金鍾喆) 이승택(李昇澤)을 포함하여 박경훈 前도지사와 최정숙(崔貞淑. 前제주도교육감), 제주여고 학생 등 다수가 참여했다.

선무공작대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일부는 비록 강제동원된 사람도 많았으나 이들의 활동은 겨울철에 들면서 투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재산 무장대나 이쪽 저쪽에도 끼지 못하고 중산간 지대를 헤매던 주민들의 귀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을 받았던 선무공작대는 부락을 순회하면서 연극과 무용 노래, 의약과 치료활동을 함께 벌이면서 무장대의 귀순을 권유했다. 이들의 선무활동은 당시 중앙지와 지방지에 자세히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지만 오지 마을까지 선무활동을 벌임으로써 숱한 고생을 겪였다.

그러나 재산 무장대들이 야간에 해안부락에 까지 내려와 총기와 식량을 탈취해 가는 일이 여전히 일어나자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부락마다 돌을 높이 쌓아 성을 만들도록 하는, 이른바 축성명령이 내려졌다. 또한 전략촌을 곳곳에 건설하고 사태로 소실된 마을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임관호 지사는 함병선 연대장을 방문하고 민심수습의 한 방법으로서 난민촌 건설의 시급성을 역설한 뒤 소개령으로 파괴된 중산간 부락 재건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제주도는 제2연대의 장비와 자재 등을 지원받고 집을 지은 후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가장 먼저 복구된 마을은 봉개리(奉蓋里)였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주민들은 함 연대장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했다가 후에 다시 옛 이름인 봉개리로 바꿔 불렀다.

그해 3월10일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화되고 있는 제주도 사태를 조기 수습하기 위해 이범석(李範奭) 국무총리와 신성모(申性模) 내무장관을 제주에 파견했다.
이날 오후1시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이 총리 일행은 제주도내 피해상황을 돌아보고 나서 병원을 찾아 입원하고 있는 군·경 토벌대원들을 위문했다.

이 총리는 이어 관덕정 광장에서 개최된 도민 환영대회에 참석하고 "군대가 강력한 토벌작전을 실시하고 있는 만큼 경찰은 전력을 다해 치안을 확보하고, 관공서는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민생수습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하고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그 창건기에 악조건을 극복한 힘으로 완수됐으며 우리나라도 현재 창건기에 있는 시기이므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해 나간다면 몇 십년 후에는 강력하고도 자유로운 국가가 될 것이므로 분투 노력해달라"고 강조했다.

이 총리는 또 "현지실정을 파악한 결과 군·경·관·민은 폭도토벌에 노력하고 있으나 민심수습에 서로 협조하되 선무공작을 활발히 진행하여 관대한 태도로 대해 나가라"고 말하고 "부족한 식량문제는 정부에서 조속히 대책을 세워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 총리는 3월16일 제주시찰을 마친 뒤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3월말까지 제주도는 완전히 복구될 것으로 믿으며 과거 군·경간의 과오에 대해서도 철저히 시정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3월25일부터 4월10일까지 제주시내 관덕정과 서울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에는 제주사태의 진상을 알리는 '제주현지사진보고전'이 개최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국방부 정훈국이 주최하고 국제보도연맹(대표 宋政勳)의 후원과 제주선무공작대가 주관한 사진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성금을 보내주는 등 국민들의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정부는 이 여세를 몰아 '제주난민돕기호소문'을 발표하고 4.3 사건으로 곤경에 빠져있는 제주도의 이재민을 돕는 운동을 벌였다. 이 장관은 4월6일 전국민이 모아준 구호물자를 가지고 제주에 내려와 임 지사에게 전달했다.

이승만 대통령 제주방문...재선거 앞둬 계속된 투서로 임관호 지사 경실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에 첫 발은 디딘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인 1949년 4월9일이었다.
이날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이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이 보사부장관과 함께 왔다. 이 대통령의 제주시찰은 정부 통치권의 회복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그때까지도 준동하고 있는 좌익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1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 사태로 혼란에 빠져있는 도민들을 위로하고 장기간 토벌에 나서고 있는 군·경에 대한 격려 등 여러 목적이 포함돼 있었다.

도지사 관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 대통령은 이튿날 오전 10시 관덕정 광장에서 국민회제주도지부의 주최로 거행된 도민환영대회에 참석했다. 金忠熙 국민회도지부 위원장의 안내로 입장한 이 대통령은 운집한 도민들에게 일일이 손을 들어 인사한 뒤에 "오랫동안 오고 싶어하던 제주땅에 처음 당도하니 감개무량하며, 그동안 제주땅에서 일어난 사태로 많은 희생을 치른 도민 여러분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조국이 광복된 후에 우리 정부가 수립되는 동안 大邱폭동, 麗水·順天사건 등 여러 사건을 치렀지만 제주사태처럼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사태는 일찍이 없었으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완전 진압하도록 군대에 지시했다"면서 "정부에서는 제주도의 복구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도록 하겠으며 도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주시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도민환영대회가 끝난 뒤 포로수용소 등을 돌아보고 이날 오후 서울로 돌아갔다. 1박2일의 짧은 체재였지만 도민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정부는 이 대통령의 제주순시를 전후해서 전년도에 선거투표인수 부족으로 무기연기됐던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에 대한 재선거일을 5월10일에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선거일을 20일을 앞둔 1949년 4월20일 돌연 임관호 도지사의 경질이 발표됐다. 임 지사는 4.3 사건의 조기 수습을 위해 미군정청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전격 기용됐다가 사태가 장기화되자, 道산업국장 시절에 좌익계와 함께 3.1 파업사태를 주동했다는 사실을 다시 거론하면서 이를 문제삼는 투서가 계속되자 경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 지사는 11개월간의 지사 재임을 끝낸 뒤에 제주화물과 제주무역을 설립하고 제주도부흥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초대 박경훈 지사와 달리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다가 퇴임 일년만인 1950년 3월 별세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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