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날아가고 풍류만 남았네
용은 날아가고 풍류만 남았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사람 황홀한 풍류가 남아 있는 곳, 제주 용연

한라산에서 출발하여 제주 시내를 관통하는 한천(漢川, 큰 내라는 의미)은 용담동 해안에서 바다와 만난다. 제주 시내를 관통하는 대부분의 구간은 맑은 날이면 하천이 그 바닥을 드러낸다.   
  

한천 한라산에서 내려와 제주시내를 관통해서 해안에 이르기 직전 한천의 모습이다.  ⓒ 장태욱

바다에 이르기 전에는 바닥을 드러내던 한천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는 지하수를 용출시키니, 단물과 바닷물이 뒤섞여 큰 웅덩이를 이룬다. 이 웅덩이를 과거에는 용추(龍湫, 용이 설던 못), 혹은 용소(龍沼)라 하였는데, 지금은 용연(龍淵)이라 부른다.

용이 살던 연못에 기우제를 올리면 가뭄이 해갈되었다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연못은 동해 바다의 사신들이 한라산 백록담으로 갈 때 지났던 통로다. 그리고 연못 안에는 큰 용이 살고 있었다. 이 연못의 이름이 용과 관련된 것은 이곳에 용이 살았다는 전설에 기인한다.
  

용연의 물 용연의 물은 언제 봐도 푸른색이다. 임제는 이 연못을 '파란 유리잔'이라 하였다.  ⓒ 장태욱

용연은 과거에 기우제를 올렸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오래전에 가뭄이 들어 제주에 큰 기근이 들었다. 목사가 이를 걱정하여 기우제를 올려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이 때 무근성 근방에 살고 있던 고씨 성을 가진 무당이 "용소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올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이 말이 목사의 귀에 들어가자 목사는 무당을 동헌으로 불렀다.

"네가 용소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온다고 했다는데, 사실이냐?"
"예, 그리 말했습니다."
"그러면 기우제를 올려서 비를 내리게 해라. 만일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너는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무당은 목사의 영을 따라 기우제를 올렸다. 목욕재계하여 짚으로 용을 만들고 용소 바로 옆에 있던 당 밭에 제단을 걸쳐놓아 7일 동안 굿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당이 굿을 마칠 때까지 하늘은 비 한 방울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들은 고이 돌아서건만 이내 몸은 오늘 동헌에서 목을 내 놓게 되었습니다."

고씨 무당은 눈물을 흘리며 신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때 동쪽 사라봉 위에 주먹만한 검은 구름이 나타나더니, 이 구름이 삽시에 하늘을 덮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지 시작했다. 무당은 짚으로 만든 용을 어깨에 메고 성안으로 들어가니, 성안의 백성들이 무당을 맞아 환호성을 지르며 풍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때부터 용연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효험이 있다하여, 가물 적에는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정자 용연 현수교를 지탱하는 동쪽 기둥 인근에 정자가 있다. 과거 선비들이 시를 읊었던 곳인데 최근에 복원되었다.  ⓒ 장태욱

흙이 부족하고 자갈이 많은 제주의 토양은 비가 내리더라도 물을 지표에 가두지 못하고 지하로 쉽게 침투 시켰다. 게다가 한라산에서 바다에 이르는 하천의 경사각이 크기 때문에 빗물이 바다로 쉽게 흘러 버렸다. 농사짓기에는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런 지질학적 환경 때문에 가뭄에 쉽게 노출되었던 주민들은 늘 가뭄을 두려워했다. 일례로 1670년(현종 7년)에 제주에 가뭄으로 흉작이 들었는데, 이때 굶어죽은 이들이 2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가뭄과 그에 따른 기근을 두려워했던 주민들은 용연의 맑고 깊은 물을 보면서 비가 충분히 내리기를 늘 기원했던 것이다.

용연을  다녀간 풍류객들의 흔적

조선 초기에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용연에서 기우제를 올린다는 대목이 나타난다. 

"주 서쪽 3리에 있다.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불어나는데, 물이 우묵한 곳에 이르러 저수지가 되어 그 깊이가 밑바닥이 없는데 이름을 용추라 한다. 비가 오지 않는 해에는 나가서 기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작성 연대가 조선 초기였음을 감안하면, 용연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일은 아주 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어온 관행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용연이 바다와 만나는 곳 용연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파도에 의해 되밀려와 쌓인 둘무더기들이 있다. 이 곳을 '냇깍' 혹은 '용수깍'이라 한다. 바다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 배를 정박시키기에 좋은 곳이 있다. 이 곳을 '용수개맛'이라 불렀다.  ⓒ 장태욱

16세기 후반에 백호 임제라는 시인이 용연을 찾아와 그 감회를 시로 표현했는데, 시의 제목이 취병담(濢屛潭)이다.

취병담(濢屛潭)
(바위에 세 글자 남아 있고 용은 천년도록 잠겨있다.)

성 남쪽 몇 리쯤에
협곡 하나 청아하고 기이하다.
바위는 둘러 백옥병풍
못은 파란 유리잔
언덕 위에 몇 무더기 대숲
해풍이 불어 소소한데
일엽편주 노에 기대어
놀하며 즐기다 천천히 돌아가세.

임제는 1576년(선조9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 직전인 1576년 11월에 제주목사로 있던 부친 임진을 뵈러 나주 고향을 출발하여 제주에 들어왔다.

그는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제주를 두루 구경하였는데, 이때 남긴 일기체 기록문이 <남명소승(南溟小乘)>이다. 시 취병담(濢屛潭)도 남명소승이란 글에 남아 있다. 임제는 이전에 누군가가 연못의 석벽에 '취병담(濢屛潭)'이라고 남겨놓은 마애명을 보고 시의 제목으로 삼은 것 같다. 취병담이란 이름은 '높은 바위들과 푸른 이끼와 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 친 모습과 비슷하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1679년(숙종5년)에 순무어사로 제주에 온 이증(李增)은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제주도의 여러 포구를 답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증의 기록에는 용연 일대에 대한 내용도 남아 있다.

"용추는 주 서쪽 5리에 있다. 그 하류를 대독포(大凟浦)라고 한다. 그 아래쪽에 용추가 있다. 좌우에 석벽이 있고, 물색이 맑아 짙은 초록색이다. 그 가운데 돌아간 데는 조용하고 어부들이 바람을 감추고 바람을 피한다."
  

빌레깍 용연 서쪽 해안이다. 한두기 주민들의 바다 밭이었다. ⓒ 장태욱 

대독(大凟)이란 한두기 마을의 한자식 표기이다. 대독포란 한두기 마을에 있던 포구를 말한다. 용연에는 '용수개맛'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어부들은 지금도 이곳에 배를 묶어 둔다. 

1702년(숙종 28년)에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제주에 부임해던 병와 이형상은 제주의 민폐를 시정하고 선정을 배풀었던 수령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주 목사로 재직하던 중에 제주도내 각 고을을 순력하면서 당시 지역에서 행했던 행사 장면이나 자연 및 풍속을 소재로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채색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때 그린 그림 40폭을 묶어 놓은 화첩을 '탐라순력도'라고 한다.

'병담범주(屛潭泛舟)'는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그림으로 용연에서 뱃놀이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병담이란 임제의 시에 나오는 취병담, 즉 용연을 이르는 말이다.   
  

병담범주 이형상 목사가 화공 김남길을 시켜 그리게 했던 그림이다. 용연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과 그 주변 일대가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다.(제주목관아지에서 촬영)  ⓒ 장태욱  

그림에는 용연에서 기생들과 뱃놀이를 하는 장면과 더불어 용연 주변마을과 해안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용연에서 한천을 거쳐 한라산 백록담에 이르는 과정이 압축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발길은  이어져도 좋지만 수로를 파겠다는 말을 참아줘

용연에서 달 밝은 밤에 뱃놀이를 즐기는 것을 '용연야범(龍淵夜泛)'이라 하여 영주십경 중의 하나로 꼽았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던 지방관들과 유배인들은 자신들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바위 위에 마애명을 새겼는데,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 산책로 용연 동쪽에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 장태욱  

용연인근에는 연못 외에도 구경거리들이 많이 있다. 

한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마을을 한두기라 하는데, 용연의 서쪽을 서한두기, 동쪽을 동한두기라 한다. 서한두기와 동한두기 사이에는 현수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밤에 현수교 주변에서 발하는 오색 빛 조명이 연못에 반사되면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현수교 용연 위를 지나는 현수교가 설치되었다. 동한두기와 서한두기를 연결한다.  ⓒ 장태욱 
진주와 우진이 이곳에 따라 오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우리 아이들도 풍류를 알까?  ⓒ 장태욱  
   
용연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밀려오는 파도에 운반되어 자갈들이 퇴적된 곳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 돌무더기를 '냇깍'이라 부른다. '깍'은 제주어로 끝을 의미한다. '냇깍'이란 내의 끝을 말한다.

용연의 서쪽 해변에는 '엉물'이라 부르는 샘터가 있다. 냇깍에서 엉물에 이르는 해변에는 평지가 넓게 펼쳐지는데, 이 평지를 '빌레깍'이라 부른다. 예전에 빌레깍은 한두기 마을의 주요 '바다 밭'이었다.

용연 현수교를 지탱하는 동쪽 기둥 인근에는 옛 선비들이 시를 읊었던 정자가 복원되어 있다. 이 정자는 용연 인근의 산책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산책로는 정자 북쪽으로 용담공원을 향하고 남쪽으로는 동한두기 해안을 향한다.
  

▲ 용담공원 용연 산책로가 북쪽으로는 용담공원과 연결된다.  ⓒ 장태욱 

산책로를 따라 조명불이 켜지기 때문에 야간 산책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많이 찾는다.  

과거 주민들이 기근을 두려워하여 용신을 향해 제사를 지냈고, 지방관과 유배인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던 용연에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이곳을 찾더라도 탐라순력도에 그림을 보고 한라산까지 수로를 파겠다는 말만은 참아줬으면 좋겠다. 물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비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1
090 2008-05-20 10:29:22
근처에 살면서도 껍데기만 본 것 같으우다.기사 잘 봤수다.....
2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