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용담동 다끄내 마을이 사라진 사연

용담레포츠공원 제주시 해안도로변에 있다. 여름에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장태욱

제주시 해안도로는 용담동 사대부고 앞 속칭 '말머리 해안'에서 시작해서 도두 방파제로 이어진다. 말머리 해안에서 서쪽으로 1.5Km 정도 거리에 용담 레포츠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레포츠공원은 넓은 주차장 시설에 축구장과 농구장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부대시설로 화장실과 매점 등이 갖춰져 있음은 물론이고, 취사할 수 있게 식수도 충분히 공급된다. 레포츠공원은 야유회 장소를 찾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다.

레포츠공원은 특히 여름철에 복잡한 도심을 떠나서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가족단위로 나들이를 계획하는 시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주변 밭에서 자라는 보리가 익어가는 모습이 들꽃과 어울려 운치를 더해주기도 하고, 야간에 고깃배들이 비추는 불빛이 밤바다와 어우러져 장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끄내 포구 포구가 들어설 수 없던 해안에 주민들이 징으로 바위를 깨서 포구를 만들었다. 터를 '닦은' 포구라서 이름을 다끄내라 하였다.  ⓒ 장태욱  

다끄내 포구, 사라진 마을의 유일한 증인

용담 레포츠공원 앞에는 다끄내 포구가 있다. 과거에 이 일대에 다끄내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은 사라지고 옛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포구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용담에 제주공항이 들어서고 해안도로가 건설되면서 용담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던 마을들이 종종 개발에 차출되었는데, 다끄내 마을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다끄내 마을은 어영마을, 정드르 마을과 더불어 용담 3동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다끄내 포구 입구에는 이 마을이 사라지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고향을 떠나는 실향의 설음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수근동유적비'가 그것이다.
  

   
다끄내물 다끄내 포구 입구에는 맑은 지하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는데, 다끄내물 혹은 양원수라 불렀다. 이 물로 인해서 이 일대를 물댄동산이라 불렀다. 다끄내물 바로 옆에 '수근동유적비'가 있다.  ⓒ 장태욱

다끄내 마을은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돌새미 주변에서  김해김씨 인동장씨 제주고씨 등이 설촌한 마을이다. 다끄내 해안에는 전체적으로 해안선이 완만하여 포구를 만들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돌을 쌓고 정으로 바위를 깎아 포구를 만들었다. 주민들이 터를 '닦아' 만든 포구이기에 이름을 '다끈개'라고 하였고, 다끈개가 있는 마을이라서 마을 이름도 '다끄내'라 하였다. 수근동(修根洞)은 다끄내를 이두식으로 고쳐서 부른 이름이다.

주민들은 비록 풍요롭지는 못하였으나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상부상조하며 비교적 화목하게 살았다.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이 포구에 양원수를 지은 것은 1935년과 1936년 2년 사이의 일이다.   
  

해녀 해녀가 다끄내 포구 인근에서 물질을 하는 모습이다. 이 포구 인근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다.  ⓒ 장태욱

비극의 현대사에 차출당하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본군이 제주에 주둔하면서 다끄내 마을의 농토가 비행장 부지로 수용되자,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해방이 되자 주민들은 잃었던 토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에 부풀었다. 기대에 들뜬 주민들은 1947년에 공화당을 신축하면서 삶의 의욕을 다졌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유엔군과 중공군이 개입하여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제주도 각지가 전쟁의 후방기지로 차출되었다. 1950년 7월에 육군 제5훈련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1월에 육군 제1훈련소가 제주도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1952년 6월에는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제주로 옮겨졌는데, 중공군 포로 중 본국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는 제주비행장에, 송환을 원치 않는 '반공포로'는 모슬포비행장에 수용되었다. 기록에는 1953년 2월 당시 제주비행장에 수용된 포로가 5809명, 모슬포비행장에 수용된 포로가 1만4314명이었다고 한다.

제주비행장에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신설되면서 다끄내 마을 주민들은 추가로 농토 8만여 평을 포로수용소 부지로 내놓아야 했다. 잃었던 농토를 되찾길 기대했던 주민들이 크게 실망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삶터마저 빼앗긴 주민이 남긴 실향가 '수근동유적비'에 남아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68년 제주공항이 제주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고, 1969년 항공사가 민영화되면서 항공 산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제주공항이 팽창하면서 주민들은 6만여 평의 땅을 추가로 내놓아야 했다. 게다가 제주공항이 확장되면서 항공기 이착륙으로 생기는 소음으로 인해 주민들은 더 이상 마을에서 살 수 없었다. 
  

다끄내 포구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 포구에서 남쪽을 향해 섰을 때 비행기는 내 왼쪽 어깨 위를 지나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제주국제공황이 확장되면서 토지를 수용당했고, 비행기 소음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느꼈던 주민들은 결국 마을을 떠났다.  ⓒ 장태욱

결국 다끄내 마을 170여 호의 700여 명 주민들은 가옥을 철거하고 정든 향토를 떠나 새로운 삶터를 찾아 흩어졌다. 당시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주민들의 심정이 '수근동유적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우리들은 이제 생활의 보금자리를 각각 사방으로 옮겼으나 어버이의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땅을 후손에게까지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원수가 흘렀던 물동산에 애향의 동산을 만들고 매년 경로효친의 달인 5월이 되면 이 동산에 모두 모여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고 아울러 언젠가는 이 향토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면서 이곳에 유적비를 세운다.(1987년 5월)"

다끄내 포구, 차마 떠나지 못한 주민들의 유일한 터전 
  

도대와 등대 오른쪽 앞에 보이는 종모양의 돌탑이 도대다. 과거에 도대 꼭대기에 생선유등으로 불을 피워서 입항하는 배들에게 방향을 알렸다. 등대가 생기면서 도대는 상징물로 남게 되었다.  ⓒ 장태욱 

마을을 떠난 주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일부 주민들은 선조들이 닦아놓은 다끄내 포구에서 어촌계를 조직하여 생계를 도모하고 있다.

다끄내 포구에는 도대불이라 부르는 방사탑 모양의 돌탑이 있다. 도대불은 주민들이 솔칵, 생선유 등을 사용해서 야간에 불을 밝혔던 민간등대를 말한다. 1957년 세워졌던 것인데, 2004년에 방파제를 확장하면서 허물었다가, 2007년에 제주시 해양수산과에서 다끄내포구의 상징물로 복원했다.

과거 해질 무렵 출항하는 어부들이 도대 위에 직접 불을 켰고, 새벽에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어부들이 불을 껐다. 다끄내 포구에는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세워지면서  도대는 그저 상징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서씨 아주머니 포구에서 주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릴 때 다끄내 마을로 시집을 와서 살았다. 마을이 없어지면서 용담동 가까운 곳에 집을 정해서 살고 있는데, 포구는 떠날 수 없어서 다끄내 포구를 기반으로 남편과 함께 어업에 종사한다.  ⓒ 장태욱 

다끄내 포구에서 주낙을 준비하고 있는 서씨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씨 아주머니는 원래 제주시 외도동이 고향인데 어려서 다끄내 마을로 시집을 왔다. 남편은 9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시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시동생 뒷바라지를 감당하며 지냈다.

처음에 이 마을로 시집을 왔을 때 가장 무서운 일은 밤에 정드르 마을을 지나는 일이었다고 한다. 4·3 당시 그 일대가 학살터였기 때문에 귀신이 나올까 봐 밤에는 무서워서 길을 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수근동 마을이 철수될 당시 주민들은 모두 자기 발길 닿는 곳으로 떠났는데, 서씨 아주머니 가족은 차마 멀리 갈 수 없어서 용담동 인근 마을에 살면서 이 포구를 기반으로 뱃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고기도 많이 잡히지 않고 기름값도 많이 올라서 고기잡이로 돈을 벌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배를 놀릴 수가 없어서 출어를 하는 것이다.

서씨 아주머니 부부가 잡은 장어로 아들 내외는 시내에서 장어구이 집을 운영한다고 했다. 내게 식당의 위치와 상호를 알려주어서 꼭 한번 들러보겠다고 약속했다. 서씨 아주머니는 야속한 지난 세월에 대해 전해주고 싶은 사연이 많았던지, 초면인데도 많은 얘기를 했다. 
  

해초 다끄내 포구 인근 바위 위에 자라는 해초들이다. 생태, 청각, 톳 등이 바위 위에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 장태욱 
배말과 군부 바위 위에 배말과 군부들이 생활하는 모습니다. 이 일대 물이 맑고 깨끗해서 바다 생물들이 살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 된다.  ⓒ 장태욱  

해군기지 유치하겠단 사람들, 서러운 실향가에 귀 기울여야

다끄내 마을에는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포구만이 남아있다. 그 와중에 차마 정든 고향을 떠나지 못했던 주민들이 포구에 몸을 맡겨 고단한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는 기름값 때문에 많은 어부들이 어로를 포기하는 것을 보면서 다끄내 포구에 남은 주민들도 이곳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언젠가는 이 향토로 돌아올 날을 기약'하며 고향을 떠났던 주민들의 희망은 어쩌면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개발광풍에 눈이 멀어 자신의 마을에 군사 시설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던 일부 마을 주민들은 다끄내 마을 주민들이 남긴 서러운 실향가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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