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 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48)

예쁜 꽃은 '가시'를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사랑을 고백하는 청춘남녀에게 사랑을 받는 장미도 가시를 달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예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내었다는 말도 이해가 간다.
'가시'의 존재가 애초에 남을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니 마음이 여려서 상처를 받을 때면 내 안에도 저런 가시 하나쯤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시를 품은 꽃들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웅얼거려지는 노래는 '가시나무'라는 노래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 가시엉겅퀴.ⓒ김민수

엉겅퀴꽃의 아름다움만 바라보고 다가 갔다간 이파리마다 간직한 잔가시에 찔리고 만다. 그러나 공생하는 곤충들에게는 풍성하고 부드러운 꽃으로 맞이한다.
엉겅퀴라는 이름은 '엉기다'는 동사와 관련이 있는데 상처가 나서 피가 날 때 엉겅퀴를 사용하면 출혈을 멈추게 한다고 한다. 그러니 남을 찔러 피를 나게 하기 위한 가시가 아니라 오히려 치료하고 보듬기 위한 가시를 품고 있는 것이다.

엉겅퀴는 씁스름한 맛이 있어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기도 한데 가시엉겅퀴까지 토끼가 잘 먹을지는 모르겠다.

엉겅퀴와 관련하여 서양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주 먼 옛날 어느 외딴 마을에 가난한 소녀가 살고 있었단다. 그 소녀는 우유를 짜다 내어 팔아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항아리에 우유를 담아 시장으로 나가는 길에 엉겅퀴 가시에 다리를 찔려 깜짝 놀라 항아리를 놓쳐버렸단다. 소녀의 꿈도 쏟아진 우유처럼, 깨어진 항아리처럼 산산조각이 났어.
상심한 소녀는 그만 쓰러져서 울다가 죽었는데 가족들에게 우유라도 맘껏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녀의 소원을 들어준 신들이 소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대. 훗날 소로 태어난 소녀는 엉겅퀴를 보기만 하면 다 뜯어 먹어버린다고 한다네.

▲ 아까시나무.ⓒ김민수

일반적으로 아카시아꽃이라고 부르는 꽃이다.
진짜 아카시아나무는 열대 지방에만 자라며 아까시나무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니 모제과에서 만드는 추억의 아카시아껌의 원료는 아까시꽃일까, 아카시아꽃일까?

아까시꽃은 꿀도 많아서 양봉농가에 효자꽃이기도 하고 향기가 좋아서 꽃이 필 무렵이면 그 향기를 아주 먼 곳에서도 맡을 수 있다. 새벽바람이 잔잔하게 불 때면 집 뒤편에 있는 지미봉에서 날아온 아까시향기가 얼마나 은은하게 뜰 안에 가득 퍼지는지 모른다. 아까시향기에 황홀한 아침을 맞이할 때면 온 세상이 상큼하다. 맨 처음에는 향기만 맡고는 아까시나무가 무척이나 많은 줄 알았는데 정작 지미봉을 산책하며 보니 서너 그루에 불과했다.

아까시꽃을 한 송이 따서 먹으며 아릿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달콤한 향기가 온 몸에 퍼지는 듯 한데 아이들은 '이것도 먹냐?'며 촌스러운 아빠는 별 걸 다 먹는다고 한다.

아까시나무는 성장이 빠르고 생명력이 강해서 한번 뿌리를 내리면 절대로 죽은 법이 없다고 하니 그 생명력을 칭찬해 주고 싶다. 그러나 독을 품어서 주위의 풀들을 자라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아예 자기와 경쟁대상이 될 만한 나무는 씨부터 말려 죽이니 그렇게 곱상스럽지만은 않은 나무인 듯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시나무가 예뻐 보이는 것은 베어 내고 또 베어 내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결국은 새순을 내고야 마는 그 끈질김 때문이다.
무릇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삶이란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 청미래덩굴.ⓒ김민수

청미래덩굴의 가시의 위력은 가을과 겨울에 나타난다.
긴 덩굴줄기에 가시를 달고 있다가 얼마나 끈질기게 공격을 하는지 한번 그 가시에 걸리면 놓아주질 않는다.
그러나 고사리를 꺾을 무렵에는 가시가 있어도 부드러워서 연한 순을 꺾어 나물로도 먹을 수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청미래덩굴이나 찔레나무처럼 가시를 담은 덩굴식물 틈에는 얼마나 실한 고사리가 많은지 모르겠다. 가시들 때문에 사람들의 손이 쉽게 가지 않기 때문에 고사리의 아지트가 되었을 것이다.
가시가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보호하며 풍성하게 해 주는데 사용되니 자연이 가진 부드러움도 모난 것도 모두 아름답게만 다가온다. 그래서 자연이겠지.

▲ 청미래덩굴의 열매.ⓒ김민수

청미래덩굴의 꽃은 화사하지 않고 그저 밋밋하다고나 할까?
꽃이 주인공인 듯 하지만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을 간직한 것들이 참으로 많은데 난(蘭)같은 것들은 이파리가 더 예쁘고, 청미래덩굴은 빨간 열매가 더 예쁘다.
열매가 그토록 예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먹을 것이 많지 않은 겨울,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산짐승들이나 새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다. 너무 허기져서 쓰러지지나 않을까 배려하는 것이겠고, 누군가에게 먹혀야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으니 그 또한 자신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 실거리나무.ⓒ김민수

아까시나무처럼 생긴 실거리나무는 노랑꽃을 피우는데 얼마나 뻣뻣한지 하늘을 향해서 당당하게 꽃들을 피우는 성격이 꼿꼿한 놈이다. 게다가 가시의 끝이 한번누군가를 찌르면 톡 부러져 버리니 그게 살로 파고 들어가 꽤나 애먹게 하는 가시를 가졌다.

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난생 처음보는 꽃과 조우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흔하디 흔한 꽃들도 언젠가는 보았을 테지만 그것이 확실히 각인되어 눈에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본 것이 아니다. 눈 뜬 장님이라고나 할까?

맨 처음 실거리나무의 꽃을 만났을 때 '이런 꽃도 있구나!' 너무 기뻤다. 너무 예쁜 꽃에 반해 향기를 맡으려고 손을 쭉 뻗었을 때 '아, 따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손에 박힌 가시를 다 빼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사흘쯤 지나니 손가락이 욱신거리며 부어 올랐다. 고름이 생긴 후 짜보니 아주 작은 실거리나무의 가시가 들어있었다.

'알았어, 너 다음 번에 만나면 만져주나 보자!'

그 이후로도 실거리나무의 꽃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겠다던 마음은 꽃을 보는 순간 다 사라져 버린다. 조심조심 다가가 향기도 맡고, 만져본다.

'아직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조금 천천히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나에게도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해요.'

그래서 내가 실거리나무의 꽃에게 붙여준 꽃말은 '천천히 오세요'라는 꽃말이다.

▲ 탱자.ⓒ김민수

가시가 성성한 가시만 보면 그 줄기에서 이토록 연한 꽃이 핀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예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드럽지 않은 꽃, 연하지 않은 꽃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새로운 것들 중에서 연하지 아니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굳어진 저 가시도 맨 처음에는 부드러웠을 것입니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진리를 보는 듯 합니다.
연약함 속에 깃들어 있는 강인함을 보여주고 이제는 가지마다 성성히 달은 가시를 통해서 그 연약함을 넘어서서 어느 누구도 감히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강함을 가진 나무가 된 탱자를 보면서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경계를 보게 됩니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경계를 잘 아우르는 꽃.
그러다 보니 그 속내에도 같은 마음을 담고 있어서 신맛과 단맛의 경계를 아우른 것 같습니다. 시다 못해 쓴맛의 탱자가 있을 때 단 맛을 내는 밀감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죠.

▲ 꽃기린.ⓒ김민수
꽃기린의 고향은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라는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라고 한다. 참 먼 곳에서 이사한 꽃이다.
다육식물은 사막이나 높은 산 같은 척박한 곳에서 자라가에 늘 물이 부족해서 '타는 목마름'의 아픔을 아는 식물들인데 꽃기린도 다육식물의 하나다. 척박한 땅, 머나먼 이국 땅이라는 것만으로도 외국인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되는 꽃이다.

이 꽃은 '예수꽃'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예수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 썻던 가시면류관을 이것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꽃기린의 줄기로 못 만들 법도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꽃기린은 관상용으로 키우다 보니 키가 작지만 원산지에서는 2m 까지도 자란다고 하니 그 줄기들을 취해서 가시면류관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성성한 가시를 품고 있는 줄기들과 불게 피어난 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떠올리며 '예수꽃'이라고 이름 붙여줄 만하다.

'예수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소개해 드릴 꽃 중에는 '부처꽃'도 있으니 종교적인 편견을 가지고 꽃을 소개한다고 하지는 마시길.

예수의 삶은 끊임없이 낮은 자를 섬기는 삶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상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전성기 다윗왕국을 회복시킬 정치적인 왕이었지만, 메시야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끊임없이 가난한 자, 병든 자,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죄인 취급 당하는 '암하레츠(땅의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결국 아이러니칼하게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이들에 의해서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다. 가시 면류관을 쓴 채로 그들의 조롱 속에서 무력하게 죽어간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승리했다고,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기고만장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가 부활함으로 반전된다.

꽃기린의 마음에는 예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예수는 아니지만 예수의 고통의 정점에 함께 있었기에 '타는 목마름'의 진의를 가장 잘 아는 꽃일지도 모르겠다.

▲ 찔레.ⓒ김민수

찔레하면 떠오르는 노래, 마음 저미게 하는 노래가 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말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유년 시절에는 주전부리가 많지 않았기에 산야로 돌아다니며 군것질거리를 얻었다.
한 겨울에는 칡과 메꽃의 뿌리가 그만이었고, 봄이면 막 올라오는 새순들 중에서도 아까시나무의 새순과 찔레의 새순은 일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찔레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내고 아삭아삭 맛있게 먹었는데 동네형이 "야야, 찔레순은 먹으면 피가 말라서 죽는다는데." 하는 통에 잠자리에 들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다음 날 아침에서야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진달래와 비슷한 철쭉꽃을 먹으면 그렇다고 하는 소리에 놀란 적도 있었는데 마음 놓고 먹어도 되는 찔레순에 그렇게 당할 줄이야.

찔레꽃의 꽃말은 '고독'이란다.
찔레꽃과 관련하여 구전되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보리가 여물어갈 무렵에 피는 찔레꽃은 어쩌면 성성한 가시로 인해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귀찮다고 베어버림을 당하기에 고독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베어내고 또 베어내도 끈질기게 자라는 찔레꽃이 예쁘기만 하다.

▲ 해당화.ⓒ김민수

그런데 가만히 가시를 달고 있는 꽃들을 하나 둘 소개하다 보니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가시가 없어도 될 만큼 생명력이 무척이나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내는 무척이나 부드럽다는 것이고, 그래서 보여지는 것과 품고 있는 것의 다름으로 인해 어떤 경계를 넘나드는 것과도 같은 꽃이라는 점이 닮아있다.

해당화 곱게 핀 바닷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그리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잡히지 않을 것 같은 행복, 미래에만 있을 것 같은 행복의 현존을 실감하게 되고,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내일의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해당화(海棠花)는 장미과의 꽃답게 작은 가시들을 총총하게 줄기에 달고 있다. 이번에 소개한 '가시'를 가진 꽃들 중에서는 으뜸일 것이다. 감히 맨 손으로는 만질 엄두도 내질 못한다.
'참 잘했다!'
만일 그렇게 자기를 지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아름다움이 모두 뽑혀나갔을 것이니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척박하고, 또 잔잔한 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광풍이 몰아치는 것과도 같은 삶이 달려올 때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뭔가를 애타게 기다릴 때가 있다. 하지만 참고 인내하면서 그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일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만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 김민수님은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것을 즐겨 합니다. 자연산문집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 '을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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