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뉴욕통신] 이제사 고람수다.

"할머니, 일본에 있는 삼촌 불러 들이젱 햄수가?"

"응, 상모리 김00 대의원이 나 조케 아니가, 모슬포 방첩대 황 대장허고 잘 고랑으네 불러 들염쪄..."

"절대로 안됩니다, 삼촌 불러 들이민, 얼굴도 한 번 못 방 감옥으로 갑니께, 오늘 낮에 군내 보안대장 황 상사허고 제주 성내 보안대장허고 전화통화 허는 것 옆방 사무실에서 들었수다. 삼촌 오면 공항에서 당장 체포허켕 고람수다."

"..."

"할머니! 삼촌 꼭 보고 싶으민, 할머니가 직접 오사까 강 만납써. 절대로 불러들이지랑 맙써양! 잘 못허민 삼촌 감옥살이허당 죽습니다. 죽게 뚜들겨 맞당 죽습니다. 알아 들엄수가?"

"..."

"할머니, 전화로도 말곡, 오사까 가는 인편이 있거들랑 꼭 전헙써, 제주 들어오는 거 단념허랭..."

1970년대 초 약 3년 동안 내가 모슬포 주둔 <육군 제주 경비 사령부>에 사병으로 복무하고 있을 당시에 벌어졌던 일이다.

나는 우연하게 전화 당번을 서고 있었고 모든 행정반 사무병들과 장교들은 아침 조회에 연병장에 나가 있어서 행정반 막사가 고요했다. 바로 내가 당번을 서고 있는 사무실 옆 방이 육군 보안대 모슬포 파견 분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방음장치가 전혀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옆방에서 전화 통화하는 내용을 그냥 엿들을 수가 있었다. 또 당시 군대 전화 시설은 아주 후진 것이어서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정도였다.

간첩잡기로 악명 높은 황 상사(보안 부대장) 그리고 그 부하 졸병들의 어떤 일을 저질렀었는지, 나는 현장에서 목격하기도 하고 직접 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졸병 중 모슬포 출신 허 아무개 일병은 같은 부대내에 기거하지만, 항상 사복을 입고 출퇴근을 하였다. 그의 근무처는 대정읍사무소 호적계. 왜 보안대 사병이 읍사무소 호적계 근무냐고 의아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속된 말로 그의 의무는 '호적을 파는 일'을 하였다. 특히 일본으로 밀항하였거나 일본에 거주하는 대정읍 출신 동포들의 뒷조사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 있는 친인척 관계의 다이아 그램을 그리는 일이었다.

상기 예의 나의 삼촌 X일은 7촌 숙질관계다. 1948년 당시, 삼촌은 대정중학교 재학 중 이승진(김달삼) 선생에게 공민(역사) 과목을 직접 배우기도 하고 '혁명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앞집에 사는 작은 숙부(대정 중 재학생, 나이는 동갑?)가 하루는 모슬포 거리의 전봇대에 나붙은 '대자보'를 무심코 읽다가 순찰하던 순경에게 불심 검문을 당하였다. 현장에서 불순분자로 체포되었다. 포승줄로 두 손이 결박되어 경찰지서로 끌려가는 길에서 탈출하였다. 그의 별명은 '오토바이,' 단거리 경주 선수였다. 모슬봉 뒤 신평리 민가에 숨어 들었다. 집 주인이 호미(낫)로 포승줄을 끊어서 풀어주었다. 그 집주인이 모슬포 어머니에게 와서 지금 산으로 숨었으니 안심하라고 전언해 주었다.

산에서의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토벌대에 쫓기고 악다귀(모기)에 물리고 가시덤불에 찔리고 굶주리고 춥고...1년 남짓 산생활을 도저히 감내할 수 없어서 그는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안덕면 대포에서 사계리 그리고 송악산...바닷가를 돌고 돌아 그리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숨어 들어왔다. X일 삼촌이 집에서 자다가 인기척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작은 숙부였다.

"아니, 작은 아부지, 어떵 살앙 돌아옵떼가?"

"..."

X일 삼촌은 작은 아버지의 머리부터 가위로 깍아 주었다. 내일 아침이면 어머니 얼굴 한 번 보고 경찰에 자수할 예정이라고...

그 숙부는 자수하고 제주 경찰국으로 넘겨졌다. <제주 검찰청> 수형인 명부에 확인해 보니 그는 소년범으로 분류되어서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옥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리운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인민군을 따라서 평양으로 넘어갔다.

X일 삼촌은 작은 숙부가 경찰에 자수하는 것을 보는 순간 겁에 질려서 대정중 이 아무개 여 선생님을 찾아 갔다. 이북에서 넘어 온 처녀 선생이었다. 그 선생님은 학생의 신분이 위태함을 직감하고 모슬포에서 제주 성내로 가는 화물차를 이용하여 그를 제주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X일 삼촌은 제주항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부산에서 오사까로 밀항선을 타고 건너갔다. 오사까에는 아버지도 또 숙부도 살고 있었다.

세계 2차 대전 종전 직후라 일본의 동포들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빈곤과 고된 노역의 연속일 뿐이었다. 모슬포 고향에 남아 있던 그 삼촌의 사촌 형제들 4인 중 3인이 4.3의 광풍에 휩쓸려 가버렸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귀향?

모슬포에는 보고 싶은 노모도 있고 또 조상 대대로 물려온 밭떼기도 제법 있고 가난하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었다.
....

나는 모슬포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대구로 대학원 공부를 위해서 떠났고, 할머니와는 전혀 연락을 취할 기회가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하고 모든 것을 잊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슬포 동생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X일 삼촌이 제주 공항에 내렸는데, 바로 보안대로 잡혀 들어가서 면회도 안 됨수다...."

"아니, 내가 할머니께 삼촌 불러들이지 말랭 그만큼 애타게 설득을 했는데, 그새 잊어버렸구나....삼촌 병신되거나 죽는다..."
....

박정희가 죽은 후에야 그 삼촌은 풀려 나왔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보안대에서 하도 머리를 두들겨 패서 뇌속에 물집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수술을 받았다.

▲ 이도영 편집위원
서귀포 경찰서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동향조사 보고서를 꾸며야 한다면서 불러 대었다. 소위 보호관찰 대상이었다. 김영삼 정부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악몽같은 삶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술' 아니면 바닷가에 가서 낚시하는 일로 보냈다.

지금은 손주 녀석들 재롱속에서 시름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만...

나의 X일 삼촌과 같은 케이스가 어디 한 둘일까? 
누가 이 청춘을 보상해 준단 말인가?
넋두리만 나올 뿐이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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