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펼친 리영희 선생의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에 대해 국민들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촛불이 전국의 광장을 뒤덮고 있다. 지난 2002년 효순이와 미순이가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세상을 떠나며 촛불이 타오른 지 꼭 6년만이다.

이번 촛불도 미국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보수진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촛불 배후에 친북좌파가 있다'고 매도하고 있다. 저들의 이념공세는 나로 하여금 다시 <자유인>을 읽게 하였다.

2008년 정국, 다시 <자유인>을 펼치게 한다.

   
▲ 표지 리영희 저 '자유인'의 표지. 출간된 지 18년이 되었다. 
ⓒ 범우사  자유인 

 리영희 선생이 미국에 대해 내린 진단을 보면 미군장갑차 사건과 미국산 쇠고기 개방 압력의 배후에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을 앓고 있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굴러다니는 자동차를 유심히 살피면 10대 중 미국제는 3대, 독일 및 유럽국가제가 2대, 일본제가 5대 꼴은 되는 것 같다. 한국 교포들은 물론이지만 미국인들도 미국제 자동차의 성능이 형편없다는 일치된 평이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자제품·광학기기·오토메이션 장치……등, 조금 고급스럽다 싶은 기계나 장치는 거의가 일본·독일……제고, 일반 일상생활용품은 섬유류를 위시해서 한국·홍콩․대만……등과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심지어 중동 국가 제품들이다. …

미국이 군사국가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제 제1차산업 농산물과 전쟁무기를 제외하고는 국제시장에서 경쟁할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고 해도 진실에서 과히 먼 이야기가 아니다. … 국내경제 구조를 군사화 해놓고, 그 결과로 무역경쟁력 저하와 무역부채 증대를 전쟁무기 판매 강요와 문호개방압력으로 충당해야 하니 세계의 평화와 협력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극단적 사유재산제, 광신적 반공주의, 군사국가' 중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정부가 검역주권을 포기했기에 미국과 재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밝히고 있는 시민들에 대해 <조선>·<중앙>·<동아>는 '배후설'이나 '헌정질서 위협'등을 제기하며 비난하고 나섰다. 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할 언론이 그 사명은 내동댕이친 채 스스로 권력의 시녀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언론인? 언롱인(言弄人)!

그간 수구 카르텔의 행동지침을 결정해 온 <조선>·<중앙>·<동아>는 세상이 변해도 자신들의 세계관과 태도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시민들은 이들 신문에 대해 신문절독 운동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조선일보>라는 신문에 광고를 내는 기업의 상품은 불매하겠다며 광고주를 압박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리영희 선생은 이 책이 출간될 당시 이미 언론이 그 고유의 맛을 잃어버린 현실을 개탄하며 후배 언론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한 바 있다.

"지난 한세월 동안 나에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는 나에게 조석으로 배달돼왔지만 '새 소식(新聞)'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소식이란 것이 한결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 말을 가지고 독자를 희롱하는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후배 기자들에게 당부' 중에서)

   
▲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시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한 시민이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장태욱  언론개혁 
 
이런 언론관을 품고 있었기에 그가 겪은 고초는 스스로 고백하기에 '회상하기 끔찍한' 정도였다고 한다.

"글로 말미암아 권력과의 갈등으로 1964년에 시작된 투옥의 횟수가 대여섯 차례 된다. 간간이 끌려가 닦달을 받은 일은 세지 않고도 그렇다. …… 30여 년 전 글을 쓰기 시작하였을 때 읽은 '침묵의 공화국'에서 싸르트르가 "철저한 억압 밑에서의 선택이야말로 진실한 자유"고 "잔악한 상황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은 앙가주망(자기구속, 사회참여의 의미, 기자 주)의 무게를 갖는다"고 말한 그 정신에 충실하려 했을 뿐이었다."

회상하기도 끔찍한 시련들

책에는 리영희 선생이 4년간 몸담았던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 흥미를 끈다. 그가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한 이유는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을 방문해서 '한국군이 현지에서 베트남 국민들의 사랑과 환영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써달라는 정부 당국자의 부탁을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L부장의 뜻도 C일보사의 뜻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외신부장에서 조사부장으로 발령났을 때에 나는 L부장이 사표를 내리라고 생각했었는데요."

L부장은 편집국장의 일방적 통고를 마음속에서 저울질하면서 듣고만 있었다.

"신문사의 입장만도 아닙니다. 정부당국에서 몇 번이나 L부장의 해직을 요구해왔었어요. L부장은 어떤 사상에서인지 모르지만 국제관계를 보는 시각이 한국의 국가이익과 반공이념에 잘 부합되지 않아요. 새로 편집국 책임을 맡은 나 자신의 방침과도 어긋납니다. 이제는 사표를 내주어야겠어요."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그는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1968년의 일이다. 얼마 후 합동통신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가 한양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1989년 봄 '한겨레신문 기자단 방북취재 기획사건'으로 기소되어 6개월간 복역하고 나온 이후에 출간된 책이다.

리영희 선생은 그간 여러 차례 독자들에게 '내 저서가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는 희망을 내친 바 있다.

"나의 정신적 만족도는 나에게 보내지는 인세가 줄어드는 속도에 정비례하고 인세의 액수에 반비례한다. 인세가 영(0)이 되는 순간이 차라리 나의 기쁨이 극대화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2008년 대한민국 현실은 시민들로 하여금 다시 리영희 선생의 저서를 탐독하게 하고 있다. 이러다가 그가 바라는 '그의 책이 읽히지 않는' 사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리영희 선생의 아우임을 자처하는 시인 고은의 말이다.

"그는 진작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에 씌어진 글들이 하루 빨리 구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불쌍하게도 그 말대로 몇 년이 지나서 낡은 것이 되어 버리지 않았다. 아니 몇 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의 글이 머금고 있는 생생한 실감은 유효하다."('리영희 론, 진실의 대명사' 중에서) 

이라크에서 자이툰 부대가 현지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기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서특필하고,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어린 여학생들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경찰이 물대포와 소화기를 난사해도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주장하며, 굳건한 한미동맹만이 조국이 살 길이라고 떠들어대는 기자들에게 눈을 열고 <자유인>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리영희 선생 후배인 내 이야기

유독 형편이 어려운 농가의 장남이었던지라 집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꼬박꼬박 지원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돈을 들이지 않고도 공부를 마칠 수 있고, 졸업 이후에 취업도 보장받을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주변 어른들은 사관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했는데, 상명하복에 익숙하지 않은 체질이라 직업 군인으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잘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대학은 입학해야하겠는지라 선택한 곳이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교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내가 입학할 즈음에 전두환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되었고,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었다.

당시 내가 입학한 항해학과는 입학생 전원이 해군ROTC에 편입되어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 군사훈련과 별개로 승선생활훈련관이라 불리던 기숙사에서 병영생활을 해야 했다. 교과과목에 대한 공부보다 훈련에 대한 부담이 앞섰고, 밥을 먹을 때조차도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생활이 고달프기만 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서울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렸는데, 정부 예산이 부족하다고 부식비가 삭감되는 바람에 평소보다 더 배고픈 생활을 견뎌야 했다.

자유로운 사고는 이미 사치품이 되어버리고 말초적 감각만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던 고단한 시절, 우연히 '한겨레신문 방북취재 기획사건' 주모자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가 적용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주동자로 거론되던 '리영희' 선생의 존함을 알게 되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나갈 기회를 박탈당한 환경 하에서 '방북취재 기획사건'은 꽤나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 사건에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은 보안법 위반사건의 주모자로 거론되던 리영희 선생이 나보다 해양대학교 항해과를 42년 앞서 졸업한 모교의 선배였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리영희 선생이 전직 기자였고, 한양대학교 교수이며 이 땅의 대학생들에게 사상의  은사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저서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 한길사에서 출판한 <분단을 넘어서>라는 책을 맨 처음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책에 깊이 빠진 나는 일주일에 한번 있는 주말 외출도 포기한 채 하루 만에 그 책을 읽어버렸다. 내게 이렇게 우연히 찾아온 행운의 기회는 지금까지도 살아가는 데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리영희 선배의 강연 이후

방북취재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리영희 선생은 89년 가을 해양대학교 총학생회 초청으로 모교를 방문했고, 후배들에게 두 시간 남짓 자신의 학창시절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리영희 선생은 강연을 시작하는 인사 말씀에서 "졸업 후 처음으로 모교를 방문한 것"이라며 "오랜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탕아의 심정으로 왔다"라고 고백했다.

<자유인>은 그가 모교를 방문했던 이듬해인 1990년에 세상에 내 놓은 책이다. 당시 이 책이 출간될 당시 내가 아끼는 후배들 몇이 모여서 책의 이름을 딴 '자유인'이란 소모임을 만들었다. '자유인'에 속한 후배들은 남들보다 앞서서 개명한 탓에 당시 학내에 들불처럼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군에 강제로 징집되는 시련도 기꺼이 감수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리영희 선생의 저서가 모교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친 셈이다.

책이 출간된 지 18년이 되었고, 졸업한 지 1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면서 군에 강제로 징집된 후배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나와 함께 이 책을 읽은 이(들)에게 좀더 따뜻이 대하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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