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편지(4)] 일생에 한번 꽃을 피우고 자결하는 조릿대

▲ 단풍잎 떠나간 어승생악의 숲으로 저녁노을이 단풍으로 타오릅니다.ⓒ오희삼

황금빛으로 물든 서귀포 들녘에서 향긋한 감귤 향기가 남풍을 타고 山으로 山으로 번져오는 계절입니다.
겨울을 몰고 오는 폭풍같은 바람이 숲속을 흔들어대면, 맨살의 나무들이 몸을 비벼대는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며 다가오는 겨울을 실감하게 됩니다.
선작지왓 너른 벌판의 초원엔 바람이 빚어내는 서리꽃이 매일 아침 피어납니다.

▲ 안개속의 산길을 걸으며 자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와 그 나름의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음이 느껴집니다.ⓒ오희삼

어제는 안개 자욱한 山길을 걸었습니다.
두어 시간을 걷는 동안 단 한번도 하늘을 보기가 어렵더군요.
안개에 둘러싸인 터널을 걸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바람에 조릿댓잎 일렁이는 소리가 안개속에서 음악처럼 흘러가고 부지런한 새들은 어디로 가는지 날개짓 소리 우렁찹니다.
안개속에서 이슬을 머금은 초록빛깔의 제주조릿대를 보니 얼마전 텔레비전에 방영된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한라산의 생태를 교란시킨다는 무법자로 조릿대가 출현했더군요.

조릿대는 땅속으로 줄기를 뻗으며 번식하는 식물입니다.
다른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어렵게 어렵게 자손을 이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녀석은 지상의 폭군처럼,
다른 식물들이 뿌리를 내릴수도 없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난답니다.
한라산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쁜 꽃이 피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녀석을 참 미워했더랬습니다.
한라산의 명물인 시로미도 이 녀석들을 피해 바위로 쫒겨나고, 만세동산 벌판에 별처럼 피어나 황홀했던 구름미나리아제비의 군락은 이젠 사진에서나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풍경이 되어버렸죠.
한라산의 보석같은 야생화들도 무정한 조릿대의 기세에 눌려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아 정말이지 한라산의 조릿대를 모두 뽑아버렸으면 하고 바래기도 했습니다.

▲ 땅속의 줄기로 번식을 하다보니 조릿대는 애써 꽃과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정할 것 같은 조릿대가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며 애면글면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생사고락(生死苦樂)의 삶이 부러웠나 봅니다.생애에 한 번쯤은 꽃을 피워보려고 무진 애를 다 썼던 조릿대는 꽃을 피우고 난 후 스스로 말라죽습니다.(한라산연구소에서 제주조릿대의 생태를 연구하는 김현철 연구원이 이 귀한 사진을 저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이 품고 있는 조화의 숨결을 우리들이 어찌 다 알겠습니까.
조릿대의 숨겨졌던 일면을 알고 나서부터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자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생겨나는 모든 존재들에는 그 나름의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나서 참으로 조릿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늦게나마 알게된 조릿대는 이랬습니다.
한라산의 지표면을 조릿대가 든든하게 덮고 있어서 폭우에도 흙이 쓸려내리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조릿대의 조밀한 줄기는 숲속의 작은 새들에게 둥지를 트는 보금자리입니다.
한겨울 깊은 잠에서 깨어난 뱀들은 조릿대의 부드러운 잎새에 맺힌 이슬을 마시고 기운을 차린다네요.
최근에는 어떤 벤처기업에서 조릿대에 함유된 물질이 항암효과가 뛰어나다는 점을 응용하여 음료의 재료로 개발중이라고 합니다.
조릿대의 줄기는 옛사람들이 복조리를 만들때 쓰던 말그대로 ‘조리를 만드는 대나무’였죠.

▲ 조릿대에 맺힌 이슬은 한 겨울 동면을 끝낸 뱀들이 기운을 차리기 위해 처음 마시는 음식입니다.ⓒ오희삼

이런 생태적인 조릿대의 이면엔 보이지 않던 슬픔이 묻어 있었습니다.
땅속의 줄기로 번식을 하다보니 조릿대는 애써 꽃과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정할 것 같은 조릿대가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며 애면글면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생사고락(生死苦樂)의 삶이 부러웠나 봅니다.
그래서 조릿대도 이 세상에 태어나 생애에 한 번쯤은 꽃을 피워보려고 무진 애를 다 썼던 것이죠.

그런 비장(秘臧)의 심정으로 조릿대는 꽃을 품었을 것입니다.
익숙하지 못했던 꽃을 피우기 위해 제 몸에 가진 모든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은 까닭일까요.
꽃을 피우고난 조릿대는 말라죽습니다.
꽃 한번 피워본 사랑의 댓가가 너무 컸던 것일까요.
일생을 땅속으로만 뻗으며 살아오다 꽃한송이 피운 죄가 그리도 컸던 것일까요.
제 열정에 못이겨 스스로 자결을 택했을까요.

▲ 꽃 한번 피워본 사랑의 댓가가 너무 컸던 것일까요. 일생을 땅속으로만 뻗으며 살아오다 꽃한송이 피운 죄가 그리도 컸던 것일까요. 제 열정에 못이겨 스스로 자결을 택했을까요. 꽃을 피우고 난 조릿대잎은 스스로 말라죽습니다.ⓒ오희삼
저 메마른 조릿대의 갈색 낙엽을 보며 치유하지 못하는 사랑의 상처를 떠올립니다.
일생에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 하나 없다면 그것이 사람의 인생이겠습니까.
일생에 시린 가슴으로 눈물 한번 글썽이지 못한 가슴이 어디 사람의 가슴이겠습니까.
등산로를 걷다가 무성한 조릿대를 보거든 너무 미워는 말아주십시오.
무심하게 뻗어가는 줄기도 어찌 보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런지요.
이 세상 살아가는 저만의 방식이겠지요.
안개속에서 푸른 빛을 발하는 조릿대잎을 가만히 쓰다듬어 봅니다.
바람에 댓잎 부딪치는 소리가 아름다운 선율로 가슴에 스며듭니다.

▲ 한라산의 11월은 매일 아침 나무며 풀마다 겨울의 전령 서리꽃이 피어납니다.ⓒ오희삼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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