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유적, 기황후의 원당사, 검은모래축제로 잘 알려진 마을

지루했던 장마가 그 명을 다하고 예년보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무더위에 도심을 떠나 시원한 바다나 산으로 떠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제주도가 사람 살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부를만한 이유는 어디에서든지 10여분만 차를 운전하면 쉴만한 자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삼사석 탐라 시조인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쏜 화살이 박힌 돌을 삼사석이라 한다. 화북동 주공아파트 정문 앞에 있다. 제주시 중심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이 곳을 지나치면 화북동을 건너 삼양동에 이른 것이다. ⓒ 장태욱
제주시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일주도로를 따라 10Km쯤 지난 길가에 화북주공아파트 단지가 있고, 이 아파트 단지 앞에는 삼사석이 있다. 삼성신화에는 옛날 탐라의 시조인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서로 살아갈 터를 정하기 위해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데, 삼사석은 그 화살이 꽂혔다고 알려진 바위를 말한다. 삼사석을 지나치면 검은모래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삼양동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삼사석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은 화북이고 동쪽은 삼양이다. 삼양동은 서쪽으로는 화북동, 동쪽으로는 조천읍과 경계를 마주대한다. 구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통합되기 이전에 삼양동은 제주시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동(洞)이었다. 조천읍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것이 말해주듯이 행정구역상 동에 속하지만, 삼양은 농업 인구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다.

▲ 원당봉 벌랑(삼양3동)에서 바라본 원당봉. 원당봉에는 고려시대 원의 기황후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원당사의 흔적이 있다. ⓒ 장태욱
행정구역상 삼양동은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5개의 자연마을 중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은 지금 삼양1동이 자리 잡은 마을이다. 과거에는 이 곳을 '서흘촌' 혹은 '설개'라고 하였는데, '서흘' 혹은 '설'은 호미를 의미하고, '개'는 포구를 의미한다.

설개의 동쪽에는 원당봉이 자리 잡고 있고, 원당봉 중턱에는 원제국 시대에 기황후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원당사의 터가 있다. 기황후는 1333년에 14세의 나이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1340년에 원제국의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고려의 여인이었다. 그녀가 왜 이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 불탑사 원당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불탑사의 전경이다. 고려시대 이 자리에 기황후가 세운 원당사가 있었다. ⓒ 장태욱
원이 망하고 고려도 국운을 다하게 됨에 따라 원당사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조선 조정이 불교억제정책을 시행하면서 원당사는 자취를 감췄고, 최근 들어 건립한 불탑사라는 절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원제국 지배당시 원당사에 세워졌던 5층석탑은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설개에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건국이후 유배 때문이거나 혹은 은둔을 목적으로 고려유민들이 입도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설개의 서쪽 마을을 감물개라고 하는데, 감물개는 단물(담수)이 많이 흘러나와 지어진 이름이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감물개의 서쪽 마을을 '벌랑'이라 부른다. 파도와 파도가 서로 부딪쳐 가른다고 하여 칠 벌(伐)자와 물결 랑(浪)을 사용하였다. 벌랑에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설개, 감물개, 벌랑을 지금은 편의상 삼양1,2,3동으로 분류한다.

삼양이란 마을명이 생겨난 것은 약 백 년 전의 일이다. 당시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마을 동쪽에 원당봉이 높이 솟아 있어서 마을에 인물이 나오지 않고, 주민들이 가난을 면치 못할 운세였다고 한다.

이에 일대 유지였던 장봉수, 박운경 등이 협의하여 설개, 감을개, 매촌(지금의 도련2동) 등 세(三) 마을이 합해서 삼양(三陽)이라 호칭 하였다. 원당봉의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마을 이름에 ‘양(陽)’기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 삼양취수장과 동카름성창 오른쪽 파란 건물이 삼양취수장이고, 그 왼쪽에 있는 포구가 동카름성창이다. 동카름 성창은 고문에 소흘포 혹은 서흘포로 기록되어 있다. 원당봉 중턱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장태욱
삼양동은 제주시내에 있으면서도 바다가 깨끗하게 잘 보존된 지역이다. 그런 이유로 삼양동의 가장 동쪽 끝에는 제주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삼양 취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삼양 취수원 서쪽에는 '동카름성창'이라 부르는 포구가 있다. 조선시대 기록된 ‘제주삼읍지’에는 ‘원당봉 동쪽에 소흘촌(所訖村, 설개의 한자식 표현)이 있고, 그 앞에 소흘포(所訖浦)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흘포는 소흘촌이라는 마을명에서 비롯된 포구 이름인데, 지금의 ‘동카름성창’을 의미한다.

▲ 동카름성창 서흘촌에 있었기 때문에 고문에는 서흘포 혹은 소흘포라 기록되어 있다. 삼양을 대표하는 포구다. ⓒ 장태욱
설개에는 ‘동카름성창’외에도 ‘앞개성창’이란 포구가 있다. ‘앞개’란 마을의 바로 앞에 위치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앞개성창 안에는 ‘엉덕물’, ‘큰물’, ‘서쪽물’ 등 담수가 사철 풍부하게 솟아오른다. 이 포구의 입구는 수중암초들을 피해 서쪽으로 나 있다. 포구의 진입로에는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모여든다.

앞개성창의 입구에는 1924년 이 마을 주민들이 포구를 정비하면서 세워놓은 ‘개수기념비(改修紀念碑)’가 있다.

▲ 앞개 마을 앞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다. 근처에 담수가 사철 풍부하게 솟아오른다. ⓒ 장태욱
앞개성창의 서쪽에는 검은 모래로 유명한 삼양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해마다 8월이 되면 이 해수욕장에서는 ‘검은모래축제’가 열린다.

삼양해수욕장은 다른 지역의 모래와 달리, 모래의 입자가 가늘고 색깔이 검기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모래 위를 걸을 때 아프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또 검은색 모래가 태양열에 대한 흡수율이 높기 때문에 흰색 모래에 비해 온도가 높아 모래찜질에 적합하다. 신경통이나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시민들이 여름에 이 해수욕장을 즐겨찾는 이유다. 그 때문에 ‘삼양검은모래축제’는 제주도에서 특색 있는 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 삼양해수욕장 검은모래로 유명하며, 이곳에서 여름에 검은모래축제가 열린다. ⓒ 장태욱
삼양동의 서쪽에서 화북동과 경계를 마주대하는 해안에는 고려시대 쌓았던 환해장성이 일부 남아있다. 애초에 환해장성는 1270년 9월경 삼별초군에 앞서 제주를 선점하기 위해 제주로 들어왔던 고려관군이 삼별초에 대항하기 위해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삼별초 군대가 관군을 물리치고 탐라를 장악하게 되자, 삼별초군도 탐라방어를 위해 고려관군이 쌓던 환해장성을 이어서 쌓았던 것이다. 하지만 삼별초군대가 여몽연합군에 대패하고 나자 환해장성은 다시 고려관군과 몽고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요즘 정부가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악을 쓰는 것을 보니 문득 환해장성이 주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성’이든 방송이든 결국은 만들거나 쌓은 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주인이 되는 것인가 보다. 적을 이기기 위해 공을 들여 만든 모든 것들이 종국에는 적의 주머니만 채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 환해장성 처음에는 고려관군이 삼별초군이 탐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았는데, 삼별초군이 탐라를 장악한 이후에는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성을 계속 쌓았다. ⓒ 장태욱
삼양동은 동쪽으로 원당봉을 끼고 있고, 원당봉 아래에 속칭 ‘음나물내(川)’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이 일대 토양은 제주에서도 드물게 미세 양질의 토양이고, 해안가에는 맑은 샘물이 여러 곳에서 솟아오른다. 과거 사람이 살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삼양동에서는 1920년대 이후 여러 차례 선사시대 마을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에는 움집, 대형 창고, 곡물저장시설, 토지제작소 등이 포함되는데, 그 생성연대가 기원전 1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에서는 초기 탐라국 시대에 해당한다.

▲ 삼양동선사유적 토질이 비옥하고 인근에 물이 풍부하게 솟아나기 때문에, 이 일대는 부족이 집단생활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이 일대에서 발굴된 유적은 초기 탐라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경 이 일대에 사람이 모여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장태욱
▲ 움집 내부 야외에 전시된 움집 내부에 있는 선사시대 사람의 모형이다. ⓒ 장태욱
삼양동 선사시대 유적지지에 가면 고인돌, 움집 등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고, 박물관내에는 토기와 연모들이 전시되어 있다. 게다가 고대 탐라인들의 생활상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초기 탐라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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