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들(49)

꽃들 중에는 이름이 별로 예쁘지 않은 꽃들이 있다. 어떤 꽃은 예쁘지 않은 이름을 넘어서서 불경스러운 듯한 느낌을 주는 꽃들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애써 예쁜 이름으로 불러 주자고도 하지만 그냥 그 못 생긴 이름 그대로가 더 정감이 간다.

이런 이름도 다 그 꽃의 특성을 따라 지어진 이름인 것을 보면 당사자들은 '하필이면 이런 이름?'할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한번 이름을 익히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렇게 그 이름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옛날에는 액운을 막기 위해서 개똥이, 말똥이, 쇠똥이라고도 이름을 지어주었다는데 어쩌면 이 꽃들에게도 그런 이름을 붙여주어 오래오래 살아가라고 배려를 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 큰개불알풀꽃.ⓒ김민수
그냥 개불알풀꽃을 만나기 전에는 '뭐 이렇게 작은 꽃이 크다고 '큰'자가 붙었나?' 싶었다. 이름이 불경스러운 것도 서러운데 그 앞에 '큰'자까지 붙었으니 작은 꽃 치고 꽤나 서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불알풀꽃을 만나고 나니 정말 커도 보통 큰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예쁜 꽃인데 이름을 '봄까치꽃'으로 불러주자고 하기도 하고, 실재로 그렇게도 부르는 모양이다. 어떻게 불러도 그 꽃은 그 꽃이겠지만 그냥 '개불알풀꽃'이라는 이름이 더 정겹다. 이 꽃이 큰개불알풀꽃이 된 내력은 마치 꽃의 모양이 개의 불알같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영락없이 똑같이 생겼다.

이른 봄 양지바른 곳에서 무리 지어 피어나면 그 보랏빛의 유혹이 자뭇 강렬하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이니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길조로(지금은 과수 농가에서 골칫덩어리지만) 알려진 까치의 이름을 붙여서 '봄까치꽃'으로 불러주는 것도 괜찮겠다.

6살짜리 막내가 봄 햇살 따스한 날 큰개불알풀꽃과 멍멍이의 거시기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깔깔 웃는다.

"아빠, 정말 똑같다. 똑같애. 하하하~"

▲ 개불알풀꽃.ⓒ김민수
개불알풀꽃은 큰개불알풀꽃에 비하면 정말 작다.
아무리 작아도 혈통은 속일 수 없는 법인지라 그 모양새는 어디로 가지 않았다. 크기만 작을 뿐 그 모양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꽃 이름 중에서 조금 아쉬운 이름을 가진 꽃이 있다.
강아지풀이 그것인데 만약 나에게 그 이름을 붙여주라고 했다면 '똥개풀'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개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 똥개처럼 친숙한 종이 어디에 있을까? 자기의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똥개의 꼬리를 닮은 풀, 나는 그 이름을 똥개풀로 불러주고 싶을 때가 있다.

개불알풀꽃은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한 겨울에도 양지에서는 부지런히 꽃을 피운다. 그리고 후미진 곳에 피우는 것이 아니라 곧 농사가 시작되면 뽑혀버릴 수밖에 없는 밭 가장자리에 많이 피어있다. 그러니 어쩌면 피었다가 금방 뽑혀지기도 하고 제초제로 인해 수난을 당하기도 하는 불쌍한 풀이다.

그래서 그렇게 부지런히 꽃을 피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겨울잠을 느긋하게 자고 일어나 꽃을 피우려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뿌리째 뽑히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서둘러 피어나는 것은 아닐지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아주 작지만 작아서 아름답고, 못 생긴 이름을 가졌지만 못 생긴 이름으로 인해 더 친근해 지는 꽃이 있다면 바로 이 '개불알풀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다.

▲ 방가지똥.ⓒ김민수
외자 화두를 가지고 글을 써보라면 빠지지 않을 것 같은 소재 중 하나가 점잖은 말로는 '변'이요, 그냥 일반적인 말로 바꿔 말하면 '똥'이 아닐까 싶다. 다들 더럽다고 인상을 쓰지만 그것만큼 고마운 것이 어디 있으랴!

사실 우리네 인간은 '똥'관리를 잘해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인간들의 편리를 위해 수세식화장실이 보편화되어 있는 덕분에 우리는 깨끗한 척하고 살아가지만 본래 똥이 돌아가야 할 곳은 흙이고, 흙으로 돌아가 다시 우리가 먹는 먹을거리에 들어가고 다시 몸에 모셔지는 자연적인 순환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흙으로 가야 할 것이 물로 가버리니 먹을거리의 영양분을 대신하게 된 것은 화학비료요, 더러워진 물을 먹게 되니 정말 깨끗해 졌고 건강해 졌는가 자문해 보면 결코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황대권씨는 '야생초 편지'에서 방가지똥의 매력은 꽃이 아니라 날카로운 톱니가 불규칙하게 늘어선 이파리에서 본다고 했다. 보는 이마다 꽃의 매력이 다르겠지만 방가지똥은 정말 제 멋대로 자라는 가시 같은 이파리에 그 매력이 있는데 각 계절마다 다르게 피어남도 그 매력이다.

흔히들 여름 꽃 정도로 알고 있지만 제주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한 겨울에도 피어나는 꽃이 방가지똥이다. 그런데 이 못 생긴 이름에 못 생긴 꽃을 피우는 방가지똥이 여간 신통한 것이 아니다. 여름에는 해가 뜨면 이내 꽃을 닫아버린다. 어쩌면 이미 새벽부터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취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겨울에는 종일 꽃을 열고 있다. 추운 겨울을 보내자니 더 많은 햇살을 머금어야 하겠지.

나는 여기서 방가지똥의 마음을 읽는다.
'필요한 만큼만 가지는 마음'이 그것이다.
충분히 더 가질 수 있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족해요'하며 꽃잎을 닫는 방가지똥에게서 필요이상의 것을 가지고도 더 가지지 못해 아둥바둥하는 인간사를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다.

▲ 쥐똥나무.ⓒ김민수
이렇게 예쁜 순백의 꽃에 '똥'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다니 처음에는 의아했다. 향기를 맡아보아도 좋기만 한데 어째서 우리 사람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는 '쥐'라는 동물의 이름에다가 '똥'까지 들어갔는가?

그 의문은 가을에 풀렸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조상님들의 눈썰미가 그러면 그렇지 감탄하게 되었다.
열매의 모양이 영락없이 쥐똥과 같은 형상이었다. 잘 마른 열매를 따다 쥐구멍 앞에 놓아두면 보는 이마다 쥐똥이라고 할 만 한 까만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떤 것은 꽃이 예쁘고, 어떤 것은 줄기가 예쁘고, 어떤 것은 이파리가 예쁘고, 어떤 것은 뿌리가 예쁘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예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씨앗'이 아닌가?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동안의 이미지를 다 까먹을 줄을 쥐똥나무는 알았을까?

그러나 이것도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고 쥐똥나무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대견할까? 고슴도치도 자기의 새끼는 예쁜 법이니.

▲ 쥐오줌풀.ⓒ김민수
쥐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쥐오줌도 있다.
그러면 이 쥐오줌풀은 씨앗이 열렸을 때 쥐오줌을 뿌려놓은 형상일까?
쥐오줌풀이라는 이름을 얻은 내력은 뿌리에서 나는 향기(?)가 쥐오줌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름 하나 붙여주기 위해서 그 식물의 가장 튀는 속성을 알기까지 세심하게 관찰한 이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쥐오줌풀'을 노래했다.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
오늘 해질녘
다시 한 번 눈 떴다 눈 감는
하느님,
저만치 신발 두 짝 가지런히 벗어놓고
어쩌노 멱감은 까치처럼
맨발로 울고 가신
하느님, 그
하느님

- 김춘수, 쥐오줌풀 전문

느닷없이 쥐오줌풀을 보고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을 떠올린 시인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맨발로 울고 가신'이라는 대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십자가의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쥐오줌풀은 고사리를 한창 꺾을 4월말에서 5월초에 피어나는 꽃이다.
4월은 예수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부활한 달이요, 1980년 이후 5월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달이니 그 죽음과 고난들을 넘어서 부활하는 계절에 그 마음을 담아 피어나는 꽃이 쥐오줌풀이 아닐까 싶다.

▲ 쓰레기나물.ⓒ김민수
이름이 너무 적나라해서인지 '만수국아재비'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 귀화식물이다.
'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식용가능하다는 이야긴데 비위가 강한 분들은 한번 쓰레기나물을 뜯어서 갖은 양념을 해서 먹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그 이름을 알기 전에는 먹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홍어 같은 것을 맛나게 먹는 것처럼 말이다.

식물체에서 쓰레기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이다. 제주는 바람이 많아서 꽃향기를 맡기가 쉽지 않다. 필자의 코가 예민한 것도 아니라서 아주 강한 향기를 가진 치자나 수선화 같은 것들의 향기나 맡을 수 있을 정도다. 정말 쓰레기냄새가 나는지 확인을 해보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때문인지 그냥 풀냄새 정도였다.

별로 예쁘지 않은 꽃인데다 냄새까지 나니 환영받을 만한 꽃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번식력은 엄청났다.
귀화식물인 공단풀, 개민들레와 함께 제주의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을 정도로 무성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보는 듯해서 섬뜩했다.

이름이 못 생긴 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생명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순전히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 덕분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 김민수님은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것을 즐겨 합니다. 자연산문집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 '을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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